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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05. 2022

71.내 삶의 반추

내 삶의 반추    

 

  가족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마뜩잖다. 늘 소소한 일상을 푸는 글을 썼다. 남편 흉도 보고 시부모님 흉도 보고, 서운함도 가감 없이 노출시켰었다. 글쟁이로서 밖으로 드러내기 가장 어려운 것이 개인 사다. 개인사를 적나라하게 노출할 용기가 있어야 진정한 글쟁이라는 말도 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진솔하게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치부까지 드러낼 수 있는 그녀는 진정한 작가다.

 

 그런데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내가 쓴 글을 지면에 노출하기를 꺼린다. 왜냐면 내 서운함을 적나라하게 쓴 글들을 형제자매들이 읽으면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다. 타인이었던 여자가 남편의 가족 속에 편입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건이 아니라 삶이다. 결혼을 한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며느리와 타향에 사는 손윗동서, 손아랫동서, 아주버님, 시동생, 시누이 등, 더불어 살면서 가족 간에 잡음이 생길 소지는 많다. 물론 고맙고 감사할 일도 많다. 

 

 나는 내 삶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에 막힘이 없었다. 진솔함, 오직 나 자신에게 진솔하고 진지한 글쓰기를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내 시각으로 다독거리고 보쌈하듯이 글을 썼다. 묘사를 통한 심리파악에 힘쓴 글쓰기다. 삼십 수년을 시댁 근처에서 산다. 시집살이하다 분가하고도 여전히 시댁은 내 일터였다. 긴 세월 어찌 시부모님과 형제자매, 동서들에 대한 서운함이 없었겠나. 

 

 그래도 살아낸 것은 가족 간의 화목과 사랑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꾸라지 한 마리가 우물을 흙탕물로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어느 집이든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집안이 잘 되고 며느리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 풍파가 인다고 했다. 며느리 탓이 아니다. 시부모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 간에 서로 반목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돌아가신 후가 문제다. 유산상속을 놓고 콩가루 집안이 되는 집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문제에서 가족 모두 공평해야 화목한 집이 된다. 며느리는 상속권도 없고 시부모의 보호자도 못 된다. 부부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 

 

 종속 관계를 당연히 여기는 남자들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뿌리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국가의 수장이 제대로 처신을 못해 국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시절이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형제자매간의 서열에서 윗사람이 처신을 잘해야 아랫사람도 따른다. 가족 간의 분쟁이 나는 것도 공평하지 못한 윗사람의 처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현명하지 못했으면 서열 1위인 맏형이 공평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유산이다. 부모가 남긴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 부모를 모신 형제자매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각자 할 말은 있다. ‘나도 할 만큼 했다.’는 식으로.

 

 우리 사정을 아는 이웃 형님이 ‘어른들 모신다고 참 고생했는데 그래도 참 예쁘게 사는 아우님 힘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울컥 목젖이 젖어왔다. 삼이웃이 아는 일을 정작 알아줘야 할 사람은 외면한다. 말 한마디에 천양 빚을 갚는다는데. 개인사를 쓰다 보면 한풀이가 되고 억울해서 ‘아, 난 바보처럼 살았어요.’ 유행가 가락이 저절로 나온다. 내가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면 입에 발린 ‘고생 많다.’는 말의 진실은 어디 있는가. 

 

 지난해 봄부터 여름까지 시집온 지 삼십 수년 만에 처음으로 푹 쉬었다. 병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봤다. 내 몸이 아픈 것의 절반은 마음에서 온 병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끌려가며 산 삼십 년 세월이 허무해서 울었다. 뼈마디가 삭아 내리는 통증에 시달리며 휠체어에 의지해 겨우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었던 나날, 코로나바이러스에게 고마워한 나날이었다. 면회 금지라고 농부도 아이들도 사절했었다. 사십 여일 만에 만난 농부와 아이들이 타인 같았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삼십 수년을 가슴 밑에 다졌던 응어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랬다. 나를 짓누르던 극심한 진통 뒤에 평화가 왔다. 나는 겨우 삶의 문리를 틔운 것 같았다. 내 마음이 바뀌니 현실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진 것 같았다. 일상이 평화로웠다. 가끔 무리해서 통증이 찾아올 때도 쉬어주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끌려가지 않는 삶, 내가 주도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가슴에 화가 차지 않았다. 인간의 일생 중에 몇 번의 고비가 있고 그때마다 깨달음의 진주를 얻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주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을 것이고 진주를 얻는 사람은 지혜로울 것이라고 본다. 

 

 한동안 내가 나를 지켜볼 것이다. 불편한 심기가 가시면 나는 당당하게 가족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자랑이든 부끄러움이든 소소한 일들이 구슬처럼 꿰어서 남은 내 인생을 완성시켜 줄 것이다. 어차피 나 외는 모두 타인이다. 타인의 인생은 이야기일 뿐이다. 종속 관계든 대등관계든 관계는 이어지다가 끊어지는 것이고 나 외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이것 또한 지나간다. 누가 먼저 글로 남긴 문장이지만 모든 사람의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 잠시 머물다가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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