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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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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28. 2022

75.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온종일 집 밖을 안 나갔다. 책 읽다 눈이 침침하면 마당에 나가 걸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짙푸른 금목서와 그 아래 차나무, 차나무 아래 소복소복 떨어진 씨앗들, 마른 잔디와 가랑잎 틈새에도 파릇한 잎이 보인다. 어린 풀잎이다. 그중 토끼풀 어린잎이 가장 파릇하다. 자연은 가꾸지 않아도 제 몫을 하며 살고 죽고를 거듭한다. 순환이다. 사람도 자연이다. 태어나고 죽는다. 


 밤사이 첫눈이 내렸고 얼었다. 낮은 맑았다. 예리한 햇살에 닿은 눈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응달에 쌓인 눈은 온종일 그대로다. 햇살은 환해도 바람은 차다. 저수지도 얼었다. 묵언수행하지 않아도 혼자 놀면 묵언이다. 마당돌기도 금세 끝난다. 장작 몇 개 챙겨다 난로 옆에 쌓아두고 불쏘시개를 만든다. 바짝 마른 솔가리에 자잘하게 쪼갠 장작 쪼가리를 넣어 신문에 돌돌 만다. ‘혼자라고 춥게 있지 말고 난로 피우고 있어라.’ 자상한 농부 생각을 한다.


 새벽에 꿈을 꾸었다. 농부가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봤다. 빨간 티에 갈색 바지, 늘 쓰던 챙 있는 모자를 썼다. 웃는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농부의 친구가 같이 가겠다고 서류를 들고 왔다. 농부는 그 친구의 서류도 이미 해 넣었다면서 혼자 떠났다. 뱃전에 서서 앞을 바라보는 농부의 표정이 밝았다. 배에는 착착 접은 박스가 가득 쟁여 있었다. 배는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갔다.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농부를 바라보았다. 농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 마음공부에 진척이 있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꿈은 무의식의 발로라 했다.


 아들과 딸이 전화를 했다. ‘엄마는 혼자 잘 노니 걱정 마라.’ 밥은 먹느냐고 묻는다. 삼시세끼 김장김치랑 너무 잘 먹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혼자 잘 노는 여자다. 골짝물이 얼까 봐 수시로 점검하고 군불 때고 난로 피우는 것이 번거롭긴 해도 즐긴다. 아궁이에 군불을 땐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면 불 속에 빨려들 것만 같다. 불꽃은 열정이다. 내 속에 아직 불꽃이 있는가. 뭔가 하고 싶은 것, 해야겠다는 바람이 있는가. 편안한 것에 안주해버린 건가. 나를 돌아본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를 읽으며 참 많은 공감을 한다. 글을 쓰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글쓰기에 대한 강연은 내게 없는 논리적 글쓰기의 핵심이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일목요연해졌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풀등에 걸린 염주>를 생각한다. 어느 날 소설의 무대였던 고향에 들렀을 때 소설 속 인물과 닮은 사람이 거기 살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친정엄마로부터 그 사람의 개인사를 들었다. 내가 소설 속에서 그렸던 모습과 비슷했다. 


 나는 닭띠다. 내친김에 사주풀이를 보기로 했다.  

  //닭띠 생은 지능과 지모에 뛰어나며 사물을 이루어 내는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담력이 있고 인심을 사며 정보수집 능력과 앞을 내다보는 예견력이 뛰어나다. 또한 무슨 일이든 계획적으로 꼼꼼하게 처리하여 헛일을 하지 않는다. 또 날카롭고 단정하며 체계적이고 결단력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닭띠 생은 자아 중심적이고 고집이 세며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경향이 있다. 닭띠는 크게 되든가 졸아들든가 독단적인 운기를 타고났으므로 자기 특성인 지적 능력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려 있다. 닭띠와 다른 띠와의 관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취한 것을 옮기다.//


 어쩌면 나는 너무 일찍 운명이니 사주팔자니 하는 명리 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사주팔자는 바꿀 수 없다고도 한다. 이순 중반까지 큰 굴곡 없이 사는 것도 평범한 사주를 타고 난 덕은 아닐까. 험난한 길로 뛰어들기보다 편안한 길을 택했고 거기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내 길을 가기 위해 내가 감수해야 할 고통이나 아픔을 미리 차단한 것은 아닐까.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시인은 ‘풀이 더 많고 사람의 발자취가 적은 길을 택했다’고 했다. 나는 풀이 없고 사람의 발자취가 많은 닦아놓은 길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살면서 몇 번의 고비는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험한 길보다 편한 길을 택했다. 나만 참으면 모두 해결될 것을 믿었다. 덕분에 마음공부는 됐다. 참을 인자도 새겼다.


 어쩌면 나는 타고난 사주팔자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택한 삶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처럼 내가 택한 길을 걸으며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를 한 적도 있다. 그 길을 갔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보다 더 낫게. 혹은 지금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지나 않을지. 인생은 많은 가닥 길이 있지만 한 사람이 가는 길은 외길이다. 사람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다. 굴곡지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하다.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하다. 걷기 싫다고 멈출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제 이순의 후반 길에 섰다. 후회는 없는지. 좀 더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자각도 한다. 편한 길만 찾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한 순간도 현실에 안주해 나를 잃어버리지는 못했다. 늘 한 곳이 빈 것 같았고 그 비움을 독서와 글쓰기로 채운 것을 보면 책과 글이 있어 사는 삶이다. 가족이 소중했던 것일까. 중학교 졸업 후 도시로 유학을 떠나면서 가족은 늘 그리움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따라 이리저리 낯선 곳, 자취방을 떠돌며 외로웠었다. 평생 이사 다니지 않을 내 집을 동경했었다. 지금 나는 그 집을 지고 산다. 더는 옮겨 다닐 필요가 없는 전원주택에서 늙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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