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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06. 2023

77. 나를 되새김하는 날

 나를 되새김하는 날     


 세계적인 유명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비슷한 취향을 발견한다. 책 읽기, 글쓰기, 상상력 등,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는 것, 올가 토카르추크가 읽었던 책들 역시 내가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책들이다. 다만 유명 작가에게는 있지만 내게 없는 추진력과 욕망을 본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한때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꾼 적도 있다. 글만 잘 쓰면 누군가 알아서 끌어줄 것이라 믿었다. 바보다. 내가 쟁취하려 하지 않으면 아무도 끌어주지 않는다. 또 하나 어떤 소설이든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내 소설은 비전이 없나 보다. 슬프다. 


 이문구 선생님을 생각할 때가 많다. 타고난 글재주 썩히지 말라했었다. 농사는 남편에게 맡기고 소설만 쓰라했었다. 평생을 섭렵해도 모자라는 책의 홍수 속에 내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던 것일까. 읽을 책도 많았다. 깊이 있는 독서를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각박했다. 글 쓰는 것을 취미쯤으로 인식한 사람들 틈새에서 나는 외톨이었고 비상식적이었다. 상식적인 여자가 되자. 평범한 여자로 살자. 내가 나를 세뇌시키며 현실에 안주했다고 본다. 문학이나 예술을 하는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말도 작용했다. 내 팔자는 내가 만든다. 난 평범하고 사랑받는 다복한 여자로 살고 싶다. 이런 바람도 유효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셀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튼튼한 바람막이가 되어준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내 자리가 안전하지 않았나 싶다. 말 많고 탈 많은 농촌, 충효를 중시하는 가부장적인 시어른 곁에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늙어가는 나는 있어도 나는 없었다. 그 나를 잃지 않기 위해 틈만 나면 책을 섭렵했고 글을 썼다. 타고난 끼는 천형이라고 생각한다. 그 끼를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갈망과 분노, 절망을 곱씹으며 살 수도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것도 운명의 장난일 수 있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몫에 만족하기 참 어려운 것 또한 사람이다. 


 이제 되새김할 나이가 되었다. 살아온 날은 살아온 대로 알찼다는 생각을 해야 남은 나날이 알차지 않을까. 우주의 어느 별에서 나의 분신이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나 않을까. 내가 걸어온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을까. 요즘 넷플릭스로 중국 드라마를 본다. 책 읽다 눈이 침침해지면 머리 식히는 용도다. 심각한 영화는 외면한다. 심각해지기 싫어서다. 아름다운 영상물에 날개옷을 입고 시공을 초월해 휭휭 날아다니는 선남선녀의 모습이 좋다. 중국 황실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 부모와 형제간에 벌어지는 암투와 사랑을 보면서 권력의 속성을 생각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정치계를 사이코패스 집단이라고 하던가. 


 나는 신화나 전설이 흥미롭다. 천계와 인간계의 다리 역할을 하는 무녀, 도사, 점술가, 천기를 읽고 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중국의 건국 신화를 다룬 <산해경>을 즐겨 읽게 되는 것도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내가 시청 중인 중국 드라마 취영롱도 무족과 황족의 줄다리기다. 바탕에 깔린 것은 권력과 남녀상열지사를 그린 드라마다. 그냥 멍 때리고 본다. 매회 비슷한 줄거리다. 시공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 권력의 속성, 형제자매, 부모 자식 간에도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왕가 이야기다. 황제가 놓는 바둑의 바둑돌이 된 사람들, 치워지는 바둑돌이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나는 아름다운 영상과 날개옷을 입은 선남선녀를 보는 것이 즐겁다. 


 나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전설이 깃든 한국의 구전과 아버지가 읽어주시는 중국의 영웅전을 들으며 자랐다. 무협지와 영웅전을 즐겨 읽으며 문학에 눈 떴다. 상상의 인물을 그려내기도 즐겼다. 어려서도 혼자 잘 노는 아이였다. 읽을거리만 있으면 됐다. 주변에 친구도 적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상상의 친구랑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시를 썼고, 편지를 썼고, 동화를 썼다. 멍 때리기 잘했고, 병치레도 많이 했다. ‘저것이 사람 구실이나 하겠나.’ 할머니는 혀를 찼었다. 


 엄마 등에 업혀 한의원에 간 기억이 있다. 몇 살 때었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지 싶다. 엄마는 나를 업고 우리 동네에서 시장가 한의원까지 걸어가면서 우셨다. ‘니가 죽으모 에미도 죽는다.’ 한의사 할아버지는 진맥을 하고 배에 침을 꽂았다. 몇 시진이 지났던가. 한의사 할아버지는 마루에 문종이를 깔아주며 똥을 누라고 했다. 나는 검은 곤약 같은 찐득찐득하고 새까만 똥을 눴다. 할아버지는 한약을 몇 첩 지어 주셨다. 가난하던 시절 한약 값은 무엇으로 충당했을까. 엄마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단명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나는 아직도 살고 있다. 할머니와 엄마의 비손 덕일까.  


 아직도 나는 내 속에 있는 소설을 밖으로 다 내 보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우물 같을 때 있다.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문제는 내가 쓰는 글들이 신변잡기에 머물고 평범하다는 거다. 내가 꿈꾸는 세상이 평범한 세상이라 그럴까. 이승이나 저승이나 매한가지라는 생각 때문일까.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일까. 그리워하는 것을 차단해 버려서일까. 무엇이 그리운 지도 잊고 살아서일까. 그래도 나는 살고 쓰고 읽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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