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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11. 2023

78. 안개 섬에서

안개 섬에서    

  

  집을 폭 감싼 안개는 숲도 길도 보이지 않고 차량 소리도 멎었다. 눈발이 흩날렸고, 진눈깨비가 되더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응달에 쌓인 눈은 언 채로 녹지 않고 마당의 눈은 빗방울이 녹였다. 삽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운무다. 안개 섬에 갇혔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이 저절로 없어졌다. 수영장을 포기했다. 거실에 난로를 피우고 책을 읽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를 정독했다. 밑줄을 그어가며 사흘 째 책을 읽는 재미에 빠졌다. 번역자의 서평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비닐우산을 쓰고 마당을 걸었다. 발바닥에 전해오는 폭신한 감촉, 비닐우산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진눈깨비 소리, 나목의 가지에 앉은 눈, 이 나무 저 나무 오가며 지저귀는 새들, 구름 안에 숨은 햇살을 느낀다. 사람 소리만 빠진 집, 안개는 연기처럼 쓱 밀려왔다 쓱 밀려난다. 당기고 미는 것이 사랑이라든가. <다정한 서술자>의 ‘메탁시의 영토’를 생각한다. 내가 보는 사물과 나 사이에는 어떤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안과 밖의 경계 안에 사이가 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연옥이 있다지. 

 

 오늘 나는 그 연옥에 갇혔다. 안개에 점령당한 집, 어두운 기운보다 밝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집, 안개는 고립무원에 빠진 나를 다정한 서술자가 되게 한다. 영롱한 구슬을 달고 있는 나뭇가지도 , 뻣뻣한 찻잎도 내 손가락의 온기에 바르르 떤다. 승용차 옆면의 글자가 눈에 띈다. ‘Woo’ 영어로 읽힌다. ‘우’ 한글로 읽힌다. 처음엔 누가 왔다가 일부러 써 놓고 간 줄 알았다. 다가가 살펴보니 승용차 지붕에 쌓였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만든 글자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작가에게 기벽이 있다고 했다. 그 기벽을 살리라고 했다. 내게도 기벽이 있는가. 있었다. 과거형을 쓴다. 상식적인 여자가 되라는 뼈아픈 충고도 들었다. 살아오면서 남과 다른 내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두려워하고 피해야 하지만 겁 없이 뛰어들기, 남의 이목을 생각지 않고 본능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지탄받았다. 지금도 농부는 내가 화를 내면 ‘막가 파 성질’ 나온다고 한다. 농부는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나올 정도로 냉정한 여자라고 한다. 남들은 참 정 많고 따뜻한 심성이라는데.

 

 아무튼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여자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내 속엔 죽지 않는 메탁시의 영토가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아도 책을 잡는 습관, 돈도 안 되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틈만 나면 글을 쓰는 습관, 친구를 찾아 나서기보다 혼자를 즐기는 습관, 자잘한 일상에 잡혀 책과 글쓰기와 멀어질 때 화가 나는 것도 작은 기벽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직도 삶이 힘들다고 주절거린다. 에고를 놓아버리려고 노력하면서도 에고에 잡혀 있는 나를 자각할 때, 내 나이 또래인 유명 작가들을 생각할 때 느끼는 절망감, 아직도 작가로서 욕망하는 나와 좌절하는 나 사이에 메탁시 영토는 분명히 있다.

 

 안개 섬에 갇힌 나는 메탁시 영토에 갇힌 나를 생각한다. 다정한 서술자에서 작가는 ‘메탁시의 영토에는 인류 고유의 기억과 경험, 신화, 옛이야기들이 저장돼 있고 예술과 정신이 만들어낸 다양한 산물들이 모여 있다. 여기서 다양한 유형과 모티브, 신화 및 역사의 시간이 뒤섞인 혼합물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나는 지리산 자락에서 자랐다. 지리산에 얽힌 수많은 전설과 신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지리산은 내 글의 텃밭인데 나는 아직 첫 삽도 찔러보지 못한 것 같다. 이번 생에서는 이대로 종착역에 도착해 내릴 것만 같을 때 있다. 

 

 온종일 안개는 집을 포위한 채 풀지를 않았고, 나는 그 집에 갇혀 자유를 만끽한다. 철통 같은 감옥일지라도 그 감옥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자유인이다. 문득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생각난다. <처음처럼>,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을 읽으며 얼마나 감동했던가. 글을 쓰는 것이나 남의 글을 읽는 것이나 내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다. 즉 카타르시스다. 누가 내 글을 읽고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작가로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밤은 안개를 어둠으로 바꾼다. 어두운 하늘과 산 그림자 사이 선만 그어놓는다. 선 아래는 조금 더 짙은 어둠, 선 위에는 조금 더 밝은 어둠이다. 메탁시의 영토는 바로 여기에도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안개에 갇힌 섬은 여전한 밤, 마당에 나서 바라본 집, 따뜻한 불빛, 지붕 위로 오르는 난로의 연기가 밤안개와 어우러져 자리를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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