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란 것이 존재하는 세상인가.
10.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는 세상인가.
외삼촌이 내민 차표에 <부산 - 의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령!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어머니의 고향이 의령이란 말인가. 나는 차표를 보고도 외삼촌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차표를 손아귀에 꼭 쥐고 어머니의 유해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차 안은 좌석이 반이나 비어 있었다. 외삼촌과 나는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외삼촌은 창가에 앉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외삼촌은 며칠 새에 많이 수척해지셨다. 칠순이 다 된 어른이 엿새를 절밥을 먹고, 썰렁한 절 방에서 잠을 잤으니 수척해 지신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지만 나는 왠지 죄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살가운 정을 주고받은 사이도 아니었고 이야기를 오래 나누어 본 사이도 아니었으니 타인과 같은 존재였지만 사십오 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피붙이였다. 그래서인지 남 같지는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혈육의 끌림이라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외삼촌은 내가 유일하게 아는 혈육이었다.
나는 그분의 옆얼굴을 보면서 어머니를 만나고 있었다.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 가는 곳이 의령 어디쯤인지 묻고 싶었지만 기다리면 알 것이다.
차는 출발했지만 수심이 가득 찬 외삼촌의 눈은 한 번도 내게로 향하지 않았다.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외삼촌은 사천에서 농사를 짓는다 했지만 그분에게선 농사꾼 냄새가 나지 않았다. 구릿빛 얼굴이야 햇빛 못 보고 사는 도시 노인네들과 다르고, 크고 투박해 보이는 손이야 흙을 만지는 농사꾼의 손으로 보이긴 하지만 감색 양복으로 깔끔하게 정장을 한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도시에 사는 어르신 같았다. 반백의 머리며, 맑은 눈빛, 우뚝한 콧날 등, 이목구비가 선연해 젊어서는 꽤 잘 생긴 축에 끼었을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색을 발견했다. 남상을 지녔지만 뜯어보면 미인이라던 어머니를 그분의 옆모습에서 찾아낸다는 것이 슬펐다.
외삼촌은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다부진 인상이었다.
나는 내 모습 어딘가에서 그 분과 닮은 점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소릴 들으며 자라왔으니까
“권섭이라 했던가?”
무릎 위에 얹힌 보자기를 만지작거리며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해 있던 내게 날아온 외삼촌의 첫 물음이었다.
“예.”
“자네도 인자 장년이니 말귀는 틔었을 거라 아네. 뜻밖에 툭 불거진 외삼촌이라 믿기가 힘들 끼다만 엄연한 사실이란 거는 외모만 봐도 알 거고 궁금한 기 많을 끼라. 나도 어찌 입을 열어야 할지 난감한 거라. 졸지에 누야도 저 세상 가삐고 그 짐이 내한테로 떨어졌으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 하모 참 기가 막힐 일이다.”
“형제분이 많습니까?”
“삼 남매 뿌이다. 너거 옴마하고, 내 하고, 죽은 동생하고. 우리 집안은 손이 귀했니라. 웃대는 번창했던 모냥이지마는 차차 아래로 내리 옴서 자슥이 귀했다. 니 외할배가 형제 분이었제.”
나는 물어야 했다. 내 아버지의 존재를.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속을 답답하게 했다. 나는 외삼촌의 표정만 살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렵기도 했다. 이미 두 아이의 아비인데도 나는 여전히 열예닐곱 살짜리 소년처럼 어리다는 생각을 했다.
“고생함서 살았제?”
“어머님이 저 키우느라 고생했지예. 평생을 행상으로 사셨는데 호강도 못 시켜 드렸십니더.”
“안 그래도 됐을 낀데. 너거 외할배, 외할매가 너거 옴마 땜에 명 보존을 몬 했는지도 모르제. 어머이가 너거 옴마 집 나간 날을 잡아 꼭 밥 한 그릇을 떠다가 부뚜막에 놔두고는 했니라. 참 누야도 모진 사람이었제. 가차이 있음 시로 우찌 그리 소식 한 장 없었시꼬.”
“어머님이 어쩌다 집에서 나와 살게 됐습니까?”
“그 이약은 세세히는 모린다. 나는 겨우 진주에서 보통학교 고등부에 댕기고 있었제. 그러니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니라. 누야가 집 나간 기 아부지 탓인 줄만 알았제. 와 그런고 하니 너거 옴마는 진주 여자 보통학교 고등부에 댕기다 중간에서 핵교를 작파했었다. 딸 아가 보통학교만 나오모 됐지 공부 더 해서 머에 쓸 것이냐며 집에서 얌전히 살림 배우다가 시집가라는 기 아부지 명령이었제. 그래서 누야는 시집을 갔지. 그런데 누야는 시집에서 나와 친정인 우리 집으로 다시 왔니라. 집을 나간 것도 나는 아부지 때문인 줄만 알고 있었제. 니를 뱃속에 넣고 간 줄도 우리 식구 아무도 몰랐니라. 누야가 살았으리라 생각했시모 우짜든지 찾을라 캤제. 그 험한 난리 통에 살았시 끼라 생각도 몬한기제. 너거 옴마 땜에 집안이 풍비박산된 셈이다. 큰 집 하고도 원수지간이 된 기라.”
“우리 아부지에 대해 아십니꺼?”
“그래, 알고는 있다만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다. 너거 옴마 이약이나 해 주꾸마.”
어머니는 신세대 여성이었다. 공부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시골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몰래 진주 여자 보통학교 고등부에 입학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양잠 기술을 배우려고 양잠 학교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했다. 농촌의 구석구석에 뽕나무가 심어져 자라고 봄, 가을, 일 년에 두 번 집집마다 누에를 치는 것이 권장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진주에는 어린 처녀들을 모아 누에 키우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고 숙식 제공까지 했기 때문에 가난한 시골 처녀들은 양잠 학교 들어가는 것을 큰 복으로 알았다. 해방이 되기 일 이년 전에는 종군 위안부라는 명목으로 정신대에 보내기 위한 처녀 모집 장소로 변했지만 가난한 산골 처녀들은 일본 군수품 공장에 돈 벌려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같았다.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더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다달이 봉급까지 준다니 그 보다 더 좋은 곳이 있겠는가. 안 그러면 밤 낮 없이 길쌈에 산과 들 헤매며 먹을거리를 찾아야 하고, 날품팔이라도 해서 양식을 벌어야 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었으니까.
가난한 농가에서 여자는 상 일꾼이었다. 낮에는 흙에 파묻혀 세월을 삭였고 밤에는 길쌈으로 잠을 잊었다. 여름에는 삼을 삼고, 겨울에는 베를 짜고 그렇게 바지런을 떨어도 쌀밥 구경은 꿈도 꿀 수 없고 보리밥이나마 배 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작농이거나 소작농이거나 마찬가지였다. 쌀은 전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빼앗기고 농민들이 부황이 들어 허덕이게 되면 나라에서 배급을 주었다. 콩깻묵은 어쩌다 한 번이고 옥수수나 수수 찧고 나온 겨가 가족 수에 따라 지급되었다. 그것도 많이 주면 다행이겠지만 한 입에 톡 털어 넣어버리면 알맞을 만큼 적은 양이었다. 농민들은 너나없이 배가 고팠고, 친일 지주들은 얼굴에 개기름이 자르르하도록 살이 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먼 친척집에 세 들어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외할머니는 남편 몰래 어머니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급하기 위해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외가는 그 마을에서는 부농에 속했지만 빠듯한 살림 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만 타관에 내놓고 안심할 수가 없어 보통학교 다니는 외삼촌을 딸려 보냈다. 두 아이를 도시에 내 보내 공부시키기에는 학비가 턱없이 많이 들었다. 또한 시국이 하도 혼란스러운 때였으니 과년한 딸 가진 집은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어머니 때문에 속을 바글바글 끓이다가 무조건 시집 안 간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나돌자 외할아버지께 이실직고를 했다.
일본은 전쟁의 막바지에 조선 처녀들을 정신대란 이름으로 차출했다. 순박한 산골 처녀들은 밭을 매다가, 물동이를 이고 샘터에 갔다가, 순사한테 끌려갔다. 아이들까지도 순사라면 기겁을 하고 피해 달아날 만큼 군복을 입고 닛본도라는 칼을 찬 일본 순사는 무서운 존재였다. 농촌의 구석구석에까지 조혼 풍습이 휩쓸고 지나갔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를 강제로 집에 데려 오게 했다. 외할아버지는 열여섯 살이었던 어머니의 혼사를 서둘러 정했다. 어머니의 고향에서는 두 집안이 사성 거래를 하고도 처녀는 친정에서 한 해를 묵혔다가 혼례를 올리고 시댁으로 들어가는 관습이 있었다. 어머니는 열일곱에 합천에 사는 전주 이 씨에게 시집을 갔다. 어머니의 남편도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 해 팔월 해방이 되었다.
“우리 아부지가 큰 집에서 제금 남서 논 서 마지기 하고 집 한 채를 상속받았다더라. 종손이 제일이었던 시절잉깨 그것도 오감 할 지경이었제. 큰 아부지는 그것도 아깝다 생각했실 거다. 아부지하는 배 다른 성제였싱께. 큰 아부지는 욕심이 많았던 분이었다. 그라모 머하노 그 많은 재산 다 날리고 말았는데. 큰 아부지 돌아가시고, 양자 보냈던 내 동생도 그리 되삐고 난께 재산은 딸들 차지가 된 기제. 우리 집도 이사를 해 삐고 나서 큰 어머이는 재산 정리해서 딸내미 따라 도시로 나갔다드마. 아매 큰 어머이는 저승에서도 너거 옴마를 원망할지 모르것다.”
“와 예?”
“종손의 대를 끊어 삔 웬수라꼬. 그렇지만 니가 이리 엄전하니 이기 잘 됐다 캐야 할지 잘 못 됐다 캐야 할지 분간을 못하것다. 또 니한테 우찌 말해야 할지도 모르 것고. 아는 기 병일 때도 있는데 누야는 와 내한테 이런 짐을 지우고 가시는지.”
외삼촌은 한숨을 푹 쉬면서 얼굴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얼굴에 고뇌가 어른거렸다. 무엇이 외삼촌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일까. 사십이 넘은 조카에게 못할 말은 무엇일까.
“왜 우리 어머님이 종손의 대를 끊었다고 하시 지예?”
“그 이약은 차차 하자. 너거 옴마는 시집살이 3년인가 하다가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왔니라. 자형이 빨갱이 물이 들어서 산사람 따라 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일본군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죽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나는 확실히 모린다. 어른들 이야기에 관심도 없었고 그때는 내가 집을 떠나 있었던 탓도 있다.”
나는 어머니가 왜 셋집의 자투리땅이라도 기를 쓰고 가꾸려고 했는지, 왜 도시의 외곽 지역만 찾아다니며 흙냄새를 맡고 곡식이 영그는 것을 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머니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농민의 딸이었던 것이다. 내가 농촌으로 터전을 옮기고 싶어 하는 이면에는 그런 내력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외삼촌을 통해 농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알고 보니 저도 농민의 아들이네 예”�
“그라모, 한 핏줄 속에 흐르는 기 농사꾼 기질인데 거기 오데 가것노.”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농사짓고 사는 농민들은 세상의 소리보다 시절에 맞추어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고 가꾸는 것으로 모든 시름을 잊는다고 했다.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픈 대로 허기를 때우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며 먹을거리를 찾고 한 알의 곡식알도 귀히 여기는 것이 농민이란다. 대세의 흐름에 따라 가진 자에 대한 불만도 분노도 속으로 삭이고 체념하면서 팔자소관으로 돌리기도 하는 것이 농민이란다.
그러나 자식 대에만은 그 한을 물려주기를 싫어하는 것이 농민의 본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대물림해 온 가난을 자기 대에서 끝내고 싶은 부모 마음이야 요즘도 마찬가지 아닐까.
외할아버지가 아들 둘을 대처로 내 보내 공부를 시켰던 이유도 그랬을 것이다. 종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니 후처한테서 난 자식이란 이유로 외할아버지는 서당 공부만으로 만족해야 했단다. 어려서부터 영리하다는 소릴 들으며 자랐다는 외할아버지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천석이 넘는 살림을 했으니 일본 유학도 보낼 수 있는 형편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종손인 형에게만 돌아가고 형이 유학 가서 흥청망청 하는 동안 외할아버지는 그 큰살림을 혼자서 꾸러 갔었단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아내가 두셋은 되었다. 할무이도 본처가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냉기고 죽은 뒤에 처녀 시집을 왔다고 들었다. 그렁께 아부지는 할무이가 시집와서 논 자슥이다. 아부지는 큰 아부지가 공부를 많이 해 벼슬자리에 오르면 서울이나 부산거치 큰 도시에 나가 살고 논이나 밭의 임자는 자기가 될 줄 알았제.”
그러나 형은 돈만 축내고 돌아와서 종손의 자리에 앉자 동생을 내 보내려고 했고, 제금을 내 보내면서 겨우 다랑이 서 마지기를 떼어 주었으니 외할아버지는 속이 쓰리고 아팠을 것이다. 부잣집 둘째 아들이란 허울만 둘러쓰고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컸을 것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 살던 그 시절엔 돈만 있으면 감투도 살 수 있었고, 면서기 정도는 할 수도 있었지만 증조부는 큰 아들만 출세하길 바랐고 둘째 아들은 우직한 농사꾼으로 자리 잡길 원했다는 것이다. 마름과 작인을 부리고 소작인을 관리 감독하여 천석 살림을 늘려 나가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면서 외할아버지의 욕망을 꺾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시면서 두 외삼촌을 대학까지 보냈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큰 댁 조카들보다 뒤떨어지게 키우고 싶지 않았거니와 자신이 못다 편 꿈까지 실어서 종갓집을 넘어서는 출세를 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럼 어째서 어머이는 공부를 다 못 하게 했습니꺼?”
“그 시절 농촌에서는 딸을 공부시킨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니라. 보통 학교만 나와도 개명한 집에 살림 있는 집 딸아 라는 간판이 붙어 다녔다. 그만큼 너머 손가락질도 받아야 했다. 신식 공부한 처자들은 발랑 까져서 못 쓴다는 소문이었제.”
“그나저나 시집에서 소박맞고 온 어머이를 외할아버지께서 받아들였습니꺼?”
“딸 자슥이 시가에서 쫓기 왔는데 우떤 에비가 니 잘 왔다 하것노. 너거 옴마가 보따리를 싸서 친정에 오자 아부지는 노발대발했지. 죽어도 그 집 귀신이니 그 집 살박에 가서 죽으라꼬 내쫓았제. 동네 부끄럽어 못 살겠다며 난리가 났었니라. 너거 옴마 성질도 보통이 넘었니라. 농약병들고 와 아부지 앞에 앉아 아부지 앞에 죽으모 죽었제 그 집 귀신은 안 될끼라꼬 맞대거리를 하는데 우짜것노. 자슥한테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맞는 기다. 아부지 옴마는 누야가 아를 못 낳아서 쫓기 난 줄 알았시 끼라. 어른들 상식으로는 혼인한 지 3년 이모 아가 한 둘은 돼야 하거든. 근데 아가 없는 기라. 누야가 집에 왔을 때야 무슨 사단인지 알겠더니만. 사실 누야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니라. 나는 누야 맘을 쪼맨은 알것더마. 그래도 설마 했제. 그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싱께.”
“어머이가 좋아하던 사람 예? 제 아버집니꺼?”
내 물음에 외삼촌은 한동안 입을 다무시고 계시더니 혼잣말처럼 하셨다.
“아닐 끼다. 그럴 리는 없어. 누야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시니 나도 참 답답 하거마.”
“그 사람이 살아 있습니꺼?”
“죽었다. 오래전에. 인자 눈 좀 붙이 거라. 다 와 간께내.”
외삼촌은 더 이상 내 말에 대꾸를 안 하겠다는 뜻으로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혀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을 따라 흐르는 나지막한 산에는 잎사귀를 떨어뜨려버린 겨울나무가 바람에 휘청거렸다. 모롱이 하나를 돌면 동네가 나왔다. 길 따라 구석구석 오밀조밀하고 자그마한 촌락이 들어앉아 햇살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왜 멀리서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은 저리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가. 저 속에 한 발만 들어가 보면 소설보다 더 진한 삶의 이야기가 굴비 엮어지듯이 엮여 있는데.
나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그 마을에서는 그래도 제법 잘 사는 집의 고명딸이었으니 부모님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타고난 영리함과 고운 인물로 사람의 입질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솜씨 또한 뛰어났으니 동네 총각들이 군침깨나 흘렸을 것은 뻔한데. 그중 어느 총각과 눈이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없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아내와 나의 관계를 그다지 탓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가 대학 진학 시험에 떨어지고, 입에 대지도 못하던 술을 마시고 다니며 불량기 있는 아이들과 어울리자 하루는 어머니가 나를 불러 앉히더니 물었었다.
“니 그 딸아하고 무슨 일 있제?”
“그 가스나 이약은 하지도 마이소.”
“와? 너거 사고 친거 옴마는 안다. 그 아가 니 보다 더 힘들었을 낀데 니가 이런 행동하는 줄 알모 그 아 맘이 우떻것노.”
“인자 안 만내기로 했어요.”
“그라모 니도 맘 단디 무라. 머스마가 그만한 일로 인생을 그르친다면 불알을 떼 내삐야 할 끼다. 니 나이가 올해 몇이고? 그 보다 더 험한 꼴도 당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 시상인데. 한 분 맺은 인연은 그리 쉽게 끝나는 거 아니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참고서 산다고 많은 돈을 요구해도 군 말없이 주시고 용돈이라며 덤으로 더 주셨던 것이다.
사람은 흔히 젊다는 것을 좋은 것이라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무모한 도전의식보다 안전제일 주의로 흐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했다. 따뜻한 가정에서 안주하며 가족애를 돈독히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진다고도 했다. 나는 어떤가 그 말에 꼭 어울리게 사는 남자다. 아내와 자식밖에 모르는 꽁생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애처가란 소리가 지나쳐 공처가란 소리를 들으며 산다. 시계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시간관념에 철저하고, 공짜를 싫어하는 성질이다. 내게 맡겨진 일 하나는 빈틈없이 해 내고, 좋으나 싫으나 내색 않으면서 속으로 삭이고 사는 덕에 어떤 사람은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앞뒤가 꽉 막혀 늘 푼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늘 내 고집대로 살아왔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 없는 사람이 무섭다며 저 황소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으리라고 혀를 찬다. 아마 내게 가장 질린 사람은 아내가 아닐까. 감정 표현이 둔한 사람은 그만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부담을 주는 모양이다. 아내는 가끔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입이 덧나느냐고 따지곤 하는 걸 보면 무던히도 혼자 속앓이를 하는 모양이다.
“좀 농담도 하고, 소탈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들면 좀 변하려나 했더니 나이가 들수록 입에는 더 본드 칠을 하고 사니 살아갈수록 당신 시집이 힘들어 비명을 지르고 싶단 말 입니더. 우찌 사람이 잔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으니 내가 무슨 재미로 살우. 옆집 식이 네처럼 아옹다옹하면서 사는 사람이 때로는 부럽소.”
“나도 그라모 바람을 피워야 돼것 거마.”
“누가 바람 피우라 하요. 이건 싸움을 걸어도 싸움이 안 되니 내 속만 타제.”
아내는 내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지만 내가 벽창호처럼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그것이 서운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모양인지 가끔 그렇게 바가지를 긁곤 한다.
아내에게 잘해 주고는 싶은데 나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 그것은 어머니의 절제된 교육을 받고 자라온 어린 시절 때문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내게 속에 든 말을 못 하게 했다. 말로 하지 마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막았다. 가장 가까운 모자지간이면서 가장 먼 모자지간이기도 한 것이 어머니와 나 사이였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속으로 삭이는 버릇을 어려서부터 키워온 것이다. 그것은 차가우면서도 강했던 어머니의 영향이라 할 수밖에 없다.
“다 왔다. 내리자.”
외삼촌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내가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 있으니 자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눈을 떠 보니 차는 자그마한 주차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차장 주위의 풍경이 낯설었다. 처음 길이니 당연한 일인데도 왠지 허전했다. 서너 대의 버스가 홈에 들어서 있었고 막 떠나는 차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차에서 내렸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며 이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몰라 외삼촌의 표정을 살폈다. 갑자기 뱃속에서 쪼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기 빠르겠다.”
“얼마나 더 가야 합니꺼?”
“한 이삼십 분은 걸릴 낀데.”
“점심이나 묵고 가입시더.”
외삼촌과 나는 주차장 밖으로 나와 음식점을 찾아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