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 8월
사방에서 아우성이다. 사흘들이 쏟아지는 비에 전국은 난장판이다. 벼는 논바닥에 자리를 펴고, 푸성귀는 삭아 내렸다. 이재민이 속출하고, 폭우에 가족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넋을 놓고 앉았다. 아무것에도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절망감에 탈진한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생활고로 도둑질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들의 푸념은 ‘어쨌든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 ‘할 짓이 없어 도둑질을 했다.’ ‘잘 사는 놈들 숨겨 논 재산 좀 나누어 가진 것이 죄냐.’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수재의연금을 접수한다는 소식을 달았고, 물바다가 된 도시와 농촌을 소개했다. 천재지변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산입에 거미줄 칠까 보냐고 스스로를 달랬다. 생활고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연일 언론매체를 탔다. 실업에 울던 사람들이 이젠 물난리에 울었다. 모두들 가슴 졸이며 세상이 어찌 될 것인가 암담해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먹는 것을 거부하면서 기운이 나면 술만 찾았다. 동생과 내가 연일 들락거리면서 병세를 관망했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너무도 맑고 깨끗했다. 기운이 없을 따름이었다. 아버지의 엉덩이에 동전만 한 욕창이 생겼다.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보챘다.
“막둥아, 내 궁디 봐라. 아파 죽것다. 뒷방 늙은이 되기 싫어 자는 듯이 죽을 라 캤는데. 와 이리 안 죽고 애를 멕일꼬. 산에 알밤이 버얼겋게 떨어졌을 낀데. 송이가 났을 낀데. 내가 안 가모 훨훨 피서 짜부라지고 말낀데. 너거 옴마는 아무리 설명해 조도 쇵이 나는 곳을 못 찾것단다. 겨우 우리 산에 나는 거나 따올까. 돈이 썩어나는데 내가 이라고 있으니 속이 새까맣게 탄다. 너거 일도 벅찰낀데 말라꼬 왔노?”
하시다가도 막상 우리 집에 간다고 나서면
“온제 또 올래. 조심해서 가거래이. 예뿌다. 우리 막둥이.”
하시면서 눈물 글썽이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외로워하셨다. 어머니가 벌겋게 떨어져 있는 알밤을 주우려 밤 밭에 가시면 혼자 누워계셔야 하는 아버지, 그렇다고 어린 남매를 데리고 힘들게 가게를 운영하는 올케가 와서 병상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거니와 출가한 딸이 제 살림과 아이들 뒷바라지 던져버리고 친정아버지 병 수발을 들고 있을 형편도 아니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아버지를 놓고 돈 타령하고, 형편 타령한다는 게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하는 게 낫다느니, 그냥 편하게 사시는 날까지 사시다 가도록 그냥 두는 게 낫다느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결국에는 아버지 의사가 중요했다. 아버지는 병원이 한사코 싫다 하셨다. 어머니 곁에서 남은 생을 마치고 싶다 하셨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는 당신 몫이라며 가타부타 따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어머니 연락을 받으면 열 일 제치고 달려가기를 수없이 했다. 노인의 병이란 것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가늠을 할 수 없게 했다. 괜찮은가 싶어 안심했다가 금세 돌아가실 것 같다는 기별에 부랴부랴 달려가기를 거듭하다 보니 동생도 나도 지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자신의 병명을 알려 달라고 했다.
“무슨 병이고? 대충 짐작은 한다만 내 명이 올매나 남았다노? 지침을 한 분 시작하모 좀체 안 그친다. 창자가 다 올라오는 거 같다. 가래가 뿍디그리 하다. 먼 병이라 카데?”
“담배를 달고 사시니 그렇지 뭐.”
아버지께 차마 사실을 말씀드릴 수 없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살아계시는 동안 마음 편하게 해 드리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니는 아버지도 자신의 병명을 알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야 살 의욕도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은 노인일수록 죽기 싫다는 것이다. 언니 말에도 일리는 있다. 살려고 하는 의지라도 가지게 하고 싶었고, 돌아가실 마음 준비라도 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연세가 높아도 죽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이라 했다. 어머니는 노망이 들어도 아버지가 오래 사시기를 바랐다.
“고생을 해도 내가 한다. 영감탱이가 젊어서도 내 속을 썩이더니 늙어서까지 내 속을 이리 썩이는가 생각하모 밉다. 하지만 60 평생을 너거 아부지 의지하고 살아온 내가 너거 아부지 없이 우찌 살것노. 거기 살붙이고 살아온 정인기라. 아무 소리 마라. 너거 아부지는 내가 돌본다. 너거한테 짐 안 지우꾸마. 너거야 아부지가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셔야 내가 편하것다 싶지만 아니다. 내한테는 저 영감탱이가 젤이다.”
아버지는 자주 심통을 부려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너거 아부지가 입을 꼭 다물고 죽이고 약이고 안 묵을라쿤다. 무슨 병인지 안 갈카 주모 굶어 죽것단다. 애가 터져 죽것다. 내 밉단다고 일부러 이불에 똥 칠갑을 한다.”
어머니의 넋두리는 눈물바다가 되어 그친다. 그 말을 듣고 나면 나는 또 열일을 제치고 친정으로 달려간다. 내가 차린 밥상 앞에 앉은 아버지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구전재전 이야기에 열을 올리시며 날만 좋아지면 산에 가겠다고 벼른다.
“너거 옴마가 또 전화질 했제? 전화요금 내 물어주나 봐라. 담배랑 술을 싱카 놓고 안 준다 아이가. 그래서 심술을 좀 부렸더니 또 너거들 성가시게 했네.”
“야야. 내가 진짜 너거 아부지보다 먼저 죽것다. 밥은 안 묵고 술만 묵은 깨 술병이라 캐도 내 말을 안 믿는다.”
“치아라. 내가 서너 살짜리 알라로 보이나.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격고 살았다.”
역정을 내는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신 자리에서는
“내 죽거들랑 너거 옴마한테잘 해야 한다. 내한테 시집와서 고생만 오지고로 한 사람이 너거 옴마다. 내가 빨리 죽어야 너거 옴마라도 편할 낀데. 노망 들어 더 고생시키까 무섭다.”
아버지의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가을이었다. 큰 동생 진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셨던 아버지. 아무 말도 없이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오르셨던 아버지, 밤이 이슥해서야 뒷산 개울가에 앉아계신 것을 발견했었다. ‘먼저 간 놈은 자슥이 아니라 원수다.’ 아버지는 그 말만 하셨다.
아버지는 진석이 초상 날도 지게를 지고 산에 가셨다. 그 후론 진석이에 대해선 말 한마디 않으셨다. 진석은 오래전에 아버지의 눈 밖에 나서 자식 노릇을 못하고 살았다. 아니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는 말이 옳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너무나 초연하셨다. 가끔 친정에 들리면 아버지께서 술 먹는 횟수가 는다고, 술병을 차고 다닌다는 어머니의 푸념이 늘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아버지의 말술은 호가 나 있었다. 아무리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셔도 술주정이라는 것을 몰랐고, 남의 앞에 실수하지도 않으셨다. 타고난 술꾼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건강했다. 소고기는 고기로 치지도 않으셨다. 비개가 잔뜩 있는 돼지고기 한두 근을 한 자리에서 먹어야 든든하다 하시고, 소주는 한 자리에서 댓 병 한 병을 마셔야 술 먹은 것 같다 하시던 분이셨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진석이를 화장해다 강에 뿌린 후부터 가끔 술을 먹고 길거리에 쓰러져 주무시기도 하고, 장날만 되면 열 일 제치고 장돌뱅이를 하려 나서서 속이 썩는다는 어머니의 푸념이 날아들게 되었다.
“너거 아부지가 큰 아 앞세우고 충격이 컸던 갑다.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 속을 알 수가 없제. 말 안 하는 그 속이 썩고 있었던 기라. 요새 와그리 잠을 못 자느냐고 했더니. 큰 아가 자꾸 꿈에 보인다는구나.”
급기야는 술병을 얻어 앓아눕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래도 술만 깨면 장골 못지않게 집안일을 해냈다. 외양간에 서너 마리의 소를 키우고, 단감과 밤나무를 심어놓은 산판을 가꾸었다. 자식들이 노인네 힘들다고 소도 팔아치우고, 산에도 다니지 못하게 해도 그런 낙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오히려 꾸지람을 했다. 아직은 자식들 주는 생활비로 살고 싶지 않다 하시는 아버지.
“니는 그래도 내가 살아 있싱께 큰소리친다. 내 죽고나 봐라. 누가 니 돌봐 주것노.”
“아나 콩콩, 영감 죽고 나모 나도 새 영감 얻어 깨가 서 말은 쏟아지도록 살 끼다.”
내 눈엔 사랑싸움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아름답게 비쳤다. 밉다 귀찮다 하시면서도 서로 의지해 사시는 두 분을 보며 나는 또 속울음을 삼켰다. 아버지께서 저러다 치매라도 걸려 오래 앓아누우시면 그 변덕에 우리 어머니 어찌 견디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도 아버지께서 자리보전을 하는 날이 많아지자 몰라보게 수척해지셨다. 저러다가 어머니마저 덜컥 몸져누우면 두 노인네 병 수발은 누가 드나. 내 욕심 앞서 지레 겁부터 났다.
“내 죽고 나모 새 영감 얻어서 잘 살아라.”
“하모, 얼른 죽기나 하소. 내 팔자 상팔자다 함서 춤이라도 출낑께. 영감쟁이 죽다 안 함서 죽도 한 숟가락 안 묵고 내 애를 태우니 내가 먼저 죽것소.”
“그래, 내 안 묵고 퍼뜩 죽을란다.”
두 분이 나를 사이에 두고 말다툼을 하시다가도 아버지가 토라지면 어머니는 또 가만히 술잔을 권하며 달래셨다.
“영감, 가만히 누워 숨만 붙어 있어도 오래만 살아주소. 당신이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잠서?”
티격태격하는 두 노인네 푸념에다, 잘 나가던 소시 적 이약에다, 우리 4남매 키운 애환 보따리 푸는 걸 듣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 안이 자글자글 끓었다. 사위자식도 자식인데 친정 부모님께 너무 무심하다고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다가도 한 다리 건너가 천 리라는데. 나도 시부모님 자리보전하면 남편처럼 무심하게 굴지나 않을까 싶어 속엣것 다 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곤 했다.
그렇게 가슴 졸이며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야야, 너거 엉가가 갈차 조삤다. 너거 아부지 병을.”
전말은 이렇다. 아버지의 변덕이 죽 끓듯 하자 장단을 맞추기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큰딸이라고 50이 넘은 언니에게 전화로 하소연을 했고, 아버지께 묵은 감정이 많았던 다혈질인 언니는 그 길로 달려와 아버지를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악다구니를 해 대며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아부지 땜새 불쌍한 우리 옴마가 먼저 죽것소. 옴마 없시모 누가 아부지 모신다디예? 젊어서 그만큼 애 멕이셨시모 인자 좀 편하게 해 주어야 할 꺼 아닙니꺼. 얼라도 아니고 해도해도 너무 합니더. 우리 옴마 불쌍해서 우짜노오. 청상과부 할매 시집살이에, 사랑채에 여자 갈아들이는 아부지 땜에 속 다 썩어 문드러진 우리 옴마 보고 우짜라꼬 이랍니꺼. 아부지 병명이 뭔 줄 아십니꺼. 폐암이라 쿠데 예. 그것도 폐암 말기라요. 수술도 안 된다디요. 병원에 입원해도 진통제밖에 약이 없다디요. 인자 아부지 알아서 하이소. 그래서 아부지 모시고 한약방 들락거린 옴마라요. 암을 잘 고친다는 데가 있으면 달려가는 우리 옴마라요. 참말로 속 터져 죽것십니더.”
언니의 넋두리를 듣고 있던 아버지께서 말없이 돌아누우시더란다. 그 길로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며칠 동안 눈도 뜨지 않으셨단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일어나 먹을 것을 달라하시더란다. 약도 싫다, 죽도 싫다 하시던 분이 끼니 챙겨 드시고, 약주도 드시고, 언제 그랬던가 싶게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을 찾으시더란다.
그렇게 팔월이 가는 길목에서 욕창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기운을 차리셨다. 지팡이를 짚거나 어머니의 손에 의지해 문 밖 출입도 하시고, 약도 잘 드시고, 밥은 힘들지만 죽은 많이 드시려고 애를 썼다. 어머니께 의지해 마당을 거닐기도 하고, 집 옆에 있는 못 둑에 나가 앉아 햇살바라기도 했다.
“아무래도 모단어른이 올매 안 남았는 갑소. 죽을 때가 되모 욕창으로 썩어가던 몸도 깨끗하게 아뭄시로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온다 하디요. 그라다 한 순간 명줄을 놓는다 하디요. 모단 띠나 자식들이 모단어른 옆을 항시 지키고 있어야 할 끼요.”
마을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암 선고를 받았다고 금세 명줄을 달리하는 것도 아닐 터. 나와 동생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음식을 잘 드시니 살도 오르고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지는 것 같았다. 엄마도 아버지가 나날이 좋아진다고 하셨다. 오진이었을까. 마음병이었을까. 어쨌든 건강이 좋아진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자마자 데리고 친정에 갔다. 단 며칠이라도 아버지 곁에 있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먼 길을 나설 만큼 건강을 되찾으신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날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집 옆에 있는 못 둑 나들이를 했다. 그 못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동네 조무래기들은 늘 그곳에서 진을 쳤다. 여름엔 거머리에 물리면서도 자맥질을 했고, 수영 실력이 늘어 내기 경주를 하기도 했다. 가을에는 물을 빼고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 미꾸라지를 잡았고, 겨울엔 얼음을 지쳤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사흘들이 집을 비웠지만 집에 있는 날은 어린 딸을 위해 온갖 것을 다 만들어 주셨다. 여름철엔 제릅데기(겨릅대기의 방언. 껍질을 벗긴 삼의 속대)나 띠를 잘라서 물레방아를 만들어 주셨고. 겨울철엔 못 둑에서 빈 논바닥까지 미끄럼을 탈 수 있는 짚단을 엮어 만든 썰매와 얼음판을 지칠 수 있게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내가 스케이트를 가지고 못으로 달려가면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 오셔서 못 가장자리에 불을 피워주셨다. 물에 빠져 신발이 젖었으면 그 젖은 신발을 말려주셨고. 언 발을 녹이게 해 주셨다. 남자애들과 전쟁놀이를 하면 나무총을 만들어 주시며 여자라고 남자에게 지면 안 된다고 격려해 주셨다. 어머니께서 딸을 아들처럼 키워 어쩌려고 그러냐고 지청구를 늘어놓아도 아버지는 웃기만 했다. 아버지는 우리 사형제 중 유독 나만 편애했다는 것을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다. 언니가 자수를 놓고, 바느질을 배울 때도 나는 황소를 끌고 산으로 오르거나, 지게를 지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내 등에 꼭 맞는 지게를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셨는지 모른다. 두 딸 중에 한 명이라도 아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후 아버지의 바람대로 내게 남동생 둘이 생겼다.
어머니는 가끔 이런 말을 하신다.
“아~가 넷이나 되어도 너거 아부지 등에 업피 큰 거는 니 뿌이다.”
아버지는 소원하던 아들이 둘이나 생겼지만 어쩐 일인지 그 아들들보다 나를 더 챙기셨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의 넓적한 등에 업혀 집에 오기 일쑤였고, 오일장이 서는 날은 아버지를 찾아 시장 바닥을 뒤지고 다녔다. 아버지를 만나면 푸짐한 용돈을 타서 만홧가게로 달려갈 수 있었고, 국수나 쇠고기 국밥을 올챙이배처럼 뽈록하도록 얻어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에 오면 어머니는 남세스럽게 다 큰 계집애가 덜렁덜렁 업혀 온다고 눈총을 주시곤 했다. 장날 생선을 사 와도 ‘막둥아, 갈치 사 왔다.’ 내가 좋아하는 갈치였고, 엿가락이나 눈깔사탕을 사 와도 ‘아나, 우리 막둥이 거다.’했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괜한 타.”
밑도 끝도 없는 선문답을 했다. 아버지는 멀리 강을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슬그머니 못 가장자리에 내려가 소금쟁이나 방게를 잡아다 아버지 손바닥에 놓아드리면 빙그레 웃으셨다. 못 둑 아래 논에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벼이삭을 뽑아다가 아버지 손에 잡혀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멀리 자물 거리는 푸른 강을 바라보면서 저 강이 저리 변할 줄 누가 알았느냐고 혀를 차셨다. 나룻배가 다니던 강바닥이 말라버린 것처럼 아버지의 삭신도 말라 있었다. 다만 추억만이 살아서 아버지를 지탱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늙고 병들어 이젠 방구들만 지고 누워있어야 할 처지가 된 당신의 일생이 안타까우신 것인지 눈가가 촉촉해지셨다.
“막둥아, 옛날에 이 아부지는 말이다. 책 보따리 메고 학교 가는 애들이 참말로 부럽었니라. 참말로 험난한 세월이었제. 니가 공무원 시험에 떠억 붙었을 적에 아부지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과거 급제 한기라. 니가 머스마였시모 한 자리해 묵었을 낀데. 그 좋은 직장을 말라꼬 때려치우고 촌구석에 들어가 고생을 하는지. 니는 관직에 있어야 팔자가 편할 낀데. 쪽박도 깨삐고 고생길로 들어설 때는 참 섭섭했니라. 하지만 지 팔자는 지가 맹그는 갑다. 니가 글쟁이가 되었다니 인자 안심이다. 니는 진작 그리 풀리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직장 때려치우고 농촌에 들어와 사는 것을 마뜩잖아하셨다. 농사짓는 사위가 마음에 찰리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야윈 어깨를 꼬옥 끌어안았다.
아버지와 지내는 일주일 동안 아버지의 일생을 조금이나마 깊이 바라볼 수 있어 기뻤다. 나를 편애한 이유도 세상에 태어난 아들이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부모 가슴에 못 박고 가는 아들보다 튼튼하게 자라주는 딸이 더 귀했기 때문이란다. 나는 생기 차 보이는 아버지의 밝은 웃음소리와 눈빛을 보며 한 시름 놓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끔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다고 하셨지만 약을 드시고 나면 혼곤하게 잠이 들곤 하셨다. 무엇이 효도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원하는 것은 다 들어드리고 싶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도 고맙다고 했다.
“인자 너거 집에 가 봐야제. 아녀자가 너무 오래 집을 비우는 것도 탈이 생기는 법이다.”
아이들 개학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 나는 대로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드렸지만 가을걷이가 시작되자 친정집은 멀기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