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월
사람의 직감이란 때론 너무 정확하다. 나는 내 직감에 가끔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 직감을 믿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살아생전 아버지 음성을 다시 들을 기회도, 아버지의 맑은 눈빛을 볼 기회를 놓쳐버렸으니까. 그 직감을 믿어야 했다. 아니 마음 가는 대로 따라야 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괜찮겠지. 지난주에 뵈었을 때도 건강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가 전화하시겠지.
어려서부터 나는 예감이 뛰어난 아이라는 소릴 많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한 말이 맞아떨어지는 수가 종종 있었으니까. 어쩌면 인근에서 용하기로 이름난 점쟁이 소리 들었던 할머니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모른다. 공 줄을 강하게 타고났다는 소리나, 뼈와 피 속에 신기가 흐른다는 점술가의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어떤 스님은 자기가 제자로 받아줄 것이니 출가를 하라고도 했고, 점쟁이는 산에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를 하라고도 했다. 무당이 되어도 큰 무당이 될 것이고,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면 이름을 떨칠 큰 스님이 될 아이라는 말도 들었다. 세속에 살면 심신이 불편해져서 고생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힘든 세파를 견뎌내야 할 팔자를 타고났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저 놈의 가스나는 단명할 팔자를 타고 난기라. 부모 가슴에 못만 박고 말 끼라. 정 붙이지 말거라.”
할머니는 부모님께 내게 정 붙이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당부하기도 했다. 부모 가슴에 못 박고 먼저 갈 자식이라고 조금만 아파도 죽게 내버려 두라고까지 했다. 딸 하나 없는 셈 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읊었다. 후일담이지만 할머니는 내 명을 잇기 위해 나를 스님에게 팔았다고도 하고, 무당에게 신딸로 올렸다고도 했다. 할머니가 푸닥거리를 하려 갈 때도, 절에 기도드리려 갈 때도, 미륵불에 불공을 드릴 때도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것이 할머니가 일러준 명 치레 하는 수단이었다.
할머니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나는 어려서 병치레를 많이 했다. 열 살 전후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마을에 홍역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들이 죽어나갈 때 젖 먹이었던 나도 그 아이들처럼 죽어 나갈 뻔했다. 명이 끊어졌다고 이불에 싸서 마당의 덕석(멍석) 위에 엎어두고 아버지께서 지게를 가지려 간 사이 실낱같은 울음소리를 내 죽지 않았음을 알렸고, 예닐곱 살 적에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병원 출입이 잦았다.
“둘아! 니, 에미 두고 죽을래? 에미 두고 죽지마래이. 에미도 니 가삐모 못 산다.”
나를 둘러업고 잰걸음을 하면서 울먹이시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나는 아들 손자 원을 하시던 할머니의 비손 덕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톡 튀어나오자마자 탯줄을 단 채 함지에 담겨 안방 문 앞의 시렁에 먼저 얹혔다가 내려온 아이다. 첫 울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할머니는 고추 검사를 해 보지도 않고 손잔 줄 알았단다. 미륵불을 신봉하고, 미신을 믿고 받들던 할머니의 액막이 처방이었다. 손이 귀한 집에 태어난 자식이 아들일수록 명이 짧으니 명 치레하라고 시렁에다 먼저 얹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공 줄을 강하게 타고난 탓인지, 할머니의 비손 덕인지 모르지만 병약하고 울보였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선머슴아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키웠던 것이다. 명 치레 못하면 가슴에 한 맺힐까 봐 야단 칠 것이 있어도 유야무야 넘어갔고, 억지를 써도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저 황소고집을 누가 꺾을꼬. 가스나가 고집이 너무 세모 팔자가 사나운 법인데. 선머스마도 저런 선머스마가 없거마. 고치나 한 개 달고 나왔시모 올매나 좋것노.”
할머니의 푸념 소리를 들으며 처녀가 되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날이었다. 생일상을 걸게 차려주시며 할머니는
“인자 이놈의 가스나 맘 놔도 될랑가. 심들다 싶으모 니 명 이사는 기라 생각하고 살거라. 해마다 내가 니 명 이살라꼬 백일기도 디린 줄 니는 모리 끼라. 다 미륵님 덕이고, 너거 애비 덕이다. 너거 애비가 우짠지 니를 안 놓칠라카이 미륵님이 돌봐 주신기라. 백일기도 들어 가모 너거 애비가 더 지극 정성이었제. 니가 알턱이 있것나마는.”
그랬구나. 나도 알고는 있었다. 언니에겐 무척 엄하고 냉정하셨던 아버지지만 내겐 살가우셨다. 딸자식이지만 가문을 빛낼 인물이 되길 바라셨다. 나는 아버지 덕에 내가 무척 영리하고 잘 난 줄 알았다. 여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특별한 존잰 줄 알았다. 책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밤마다 등잔불 밑에서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이 들었던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책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가 책 속에 빠져있는 모습을 바라보길 좋아하셨다. 내가 무슨 책을 사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 호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는 이웃집 아저씨께 꾸어서라도 내 손에 돈을 잡혀 주셨다. 언니는 종종 그런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이용했다. 나를 이용해 아버지께 용돈을 두둑하게 타내는 방법이었다. 언니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 달랐다.
그날은 구월 들어 두 번째 일요일이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꾸만 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슴이 묵직하고 답답한 것이 사소한 일에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 어제 전화했을 때도 괜찮다 하셨는데. 만약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주셨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실 그날,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남편의 갑작스러운 출타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나는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면서 하룻밤을 지냈다.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날이 새면 혼자라도 아버지를 뵙고 와야지.’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월요일 아침나절이었다. 남편과 아이가 빠져나간 후, 집안 청소를 끝내고 친정 갈 준비를 하는 중인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가슴이 막막해지는 것이었다. 전화벨은 쉬지 않고 울렸다. 조용히 손을 뻗쳐 수화기를 들었다.
“누야…….”
“아버지 돌아가셨구나.”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젯밤에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어. 아무래도 아버지가 이상하시다고. 그래서 밤에 집에 들어가 아버지 옆에서 잤어. 아침에도 별일 없어서 잠깐 시내에 나왔더니 그새 가셨어.”
“그래, 알았다. 별말은 없으셨니?”
“며칠 전에 한의원에 모시고 갔다 오는데 그러셨어. ‘이제 너거들 할 만큼 했다. 준비하거라.’ 그게 유언이셨어. 어제부터 말문을 닫으셨어. 그래도 좀 더 사실 줄 알았는데. 누야. 인자 어떻게 해.”
“예상했던 일이잖아. 선산에 모셔야지.”
울먹이는 동생의 전화를 담담하게 끊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망연자실하게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잔디밭에서 하얀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햇살이 너무도 맑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주전자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렸다. 살인을 하고도 무관심했던 이방인의 뫼르소가 생각났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태연히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고 여자를 사귀고 그 여자와 잠을 잘 수 있었던 남자의 내면에 고인 무의미가 생각났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고요했다. 나는 커피 잔에 진하게 커피를 타서 다시 창가에 가 앉았다.
시간이 꽤 흐른 후 천천히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수화기 저쪽에선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지금 갈 끼가?”
“좀 있다. 당신은 천천히 와도 돼.”
“운전하겠나?”
“걱정 마.”
커피를 마시고 집 안팎 청소를 끝냈다. 먼지가 뽀얗게 묻은 차도 씻고, 세탁기에서 씻은 빨래도 꺼내다 햇볕에 널었다. 더 이상 집 안팎에는 할 일이 없었다. 여기저기 눈을 주다가 결국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운전석에 앉았다. 차는 잘 달렸고, 나는 눈에 익은 풍경 속에 섰다. 낯익은 담장을 지나 친정집 대문을 들어섰을 때는 먼저 온 언니의 곡소리가 들렸다.
“니가 왔구나.”
방문을 열며 반기는 아버지의 얼굴 대신 이웃 아주머니와 울어서 목이 쉰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아이고 아이고 하고 세 번 곡하고 들어가 아버지를 뵈어라.”
이웃 아주머니가 일러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노란 삼베옷을 갈아입고 곱게 잠들어 계셨다. 나는 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창백한 이마는 싸늘했다.
“아부지, 막둥이 왔어. 눈 떠봐.”
나는 아버지의 볼도 쓰다듬어 보고, 손도 잡아 주물러보았다. 아버지의 잠은 깊고도 깊었다. 수건을 적셔다 아버지의 얼굴을 닦아 드렸다. 그래도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코끝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누운 아버지. 너무도 평온한 그 모습에 나는 그만 눈물을 쏟았다. 아이고 아이고 후렴을 넣어 곡하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잉잉 엉엉, 앙앙 아부지, 아부지, 꺼이꺼이 숨이 넘어갔다. 울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깊은 잠을 주무시는데 내가 울면 깰 텐데. 이젠 울지 말아야지. 아버진 내 우는 꼴을 못 보셨잖아. 막둥이 우는 소리에 저승도 못 간다고 하셨지.
아버지의 방에서 나오자 이웃 아낙네들이 저들끼리 우스개로 흉을 봤다.
“아이고 아이고 곡하라 쿵께 잉잉이 뭐꼬. 모단양반이 저승 가다 돌아서서 웃것다.”
장례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 모든 것이 허례허식 같았다. 마당에 천막을 치고 손님맞이에 들어가고, 한쪽 구석에는 계속 음식을 만들어 내고, 한 사람은 계속 술이며, 찬거리를 사 나르고, 장례식에 필요한 상복 등, 물품들이 들이닥치자 울고불고할 겨를도 없었다.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엄숙함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상복을 입고도 손님맞이에 쫓아다녀야 할 만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겪은 장례식은 할머니의 장례식뿐이었다.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렸었고, 멀리 있었기 때문에 초상 전날 밤에 도착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상여가 나갔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이 별반 없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아침 상복을 입고 정지 앞에 서서 할머니의 꽃상여를 배웅했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언니와 어머니가 상여를 붙들고 호곡하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았을 뿐 그 외엔 상가에 잠깐 조문객으로 다녀온 기억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병풍으로 가려진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날밤을 새웠지만 아무 소리도 아무 말도 들리지도 않았다. 금세라도 병풍을 제치며 아버지가 ‘우리 막둥이 왔구나.’ 하실 것 같았다. 욕창이 난 등이 아프다고 내게 보일 것 같았고, 담배가 피우고 싶다고 담배에 불을 붙여 달라고 하실 것 같았다. ‘아버지 괜찮아!’ 나는 병풍을 젖히고 아버지의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머니의 꾸중을 들었다.
“니가 자꾸 그라모 너거 아부지 저승 강도 못 건너고 구천에 맴돈다. 이승에 맺힌 정 뚝 끊어 삐고 가시도록 해 디리야제. 이녘도 인자 맘 푹 놓고 가이소. 인자 편한 팔자 아이요. 한 날 한 시에 죽자쿠더마 먼저 갔으니 이자삐지 말고 좋은 자리나 맹글어 놓고 날 데불러 오소.”
평소에 말이 없던 어머니의 사설은 청산유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나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