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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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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Feb 08. 2023

80. 일상을 조곤조곤 푸는 날

일상을 조곤조곤 푸는 날     


  어둠이 내린다. 술 마신 다음 날은 해장을 하는 농부의 습관대로 점심은 나가서 먹기로 했다.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더니 손님이 줄을 서 기다린다. 돌아 나왔다. 기다리는 일은 못한다. 아무리 맛집이라도.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거기도 만원이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경제가 어렵다 해도 맛집은 어디나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 신기하다. 국밥 한 그릇 비우고 집에 왔다. 아들이 사 준 라꾸라꾸 의자는 참 편하다. 의자에 누워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잠만 들면 꿈으로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눈을 뜨니 어둠살이 내린다. ‘온종일 잠만 잤네.’ 툴툴거려보지만 이미 물 건너 간 일이다. 저녁 준비를 해 놓고 마당을 걸었다. 마당 걷는 것도 힘에 부친다. 쌀쌀한 바람 탓일까. 따뜻한 거실에 들어서고 싶다. 시간을 내 것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생산적인 일이란 것이 뭔지. 다시 책을 잡았다. 페트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는 편안하게 읽히는 소설이다. 두 번째 읽으려고 폈지만 까뮈의 <이방인>처럼 쏙 빠져들지 않는다. 작가란 어떤 직업인가. 

 

 책을 덮어놓고 싱크대 앞에 섰다. 북창 밖의 상수리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멧새 한 마리가 가지를 옮겨 다닌다. 제 멋대로 건반을 두드리는 아이의 작은 손짓 같다. 그 아래 갈잎들이 나붓이 앉았다.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소금 한 옴큼 넣는다. 물이 끓을 동안 창밖을 바라본다. 새까만 쥐똥나무 열매가 푸른 잎 위에서 흔들린다. 왜 쥐똥나무라 했는지 알 것 같다. 열매가 까무잡잡한 타원형의 자잘한 쥐똥을 닮았다.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소쿠리에 씻어 놓은 시금치를 끓는 물속으로 투여한다. 물은 펄펄 살아있던 시금치의 기운을 금세 쑥 뺀다. 

 

 시금치를 뒤적거려 소쿠리에 건진다. 뜨거운 김을 빼려고 얇게 펴며 젓가락질을 한다. 시금치는 데쳐서 찬물에 씻으면 맛이 덜하다. 적당히 식은 시금치를 꾹 짜서 간장, 깨소금,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간단한 양념인데도 손맛이 가미되면 시금치 자체가 맛있다. 정초에 남해 여행길에서 구한 것이다. 노지에 재배하는 것을 주인이 팔기 위해 거두고 있었다. ‘시금치 조금만 파세요.’ 염치불구하고 밭으로 뛰어들었다. 쌌다. 그 집 농부도 선한 인상이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줬다. 시장에 가면 시금치 한 단이 5천 원을 웃돈다. 한 단 풀어봤자 나물로 무치면 두 세끼 먹을거리밖에 안 된다. 저장고에 두면 설까지 끄떡없겠다. 

 

 시금치는 겨울에 제 맛이 난다. 채소 값이 고공행진하면서 시금치가 어찌나 비싼지 사 먹을 엄두를 못 냈다. 해마다 텃밭에 심어 먹었던 것을 돈 주고 사려니 그것도 아까웠다. 비싼 거 안 사 먹으면 된다는 농부다. 그 시금치를 한 자루나 샀으니 부자다. 다듬어서 딸과 아들에게도 잔뜩 줬다. 나도 날마다 시금치나물에 밥을 비빈다. 이웃에서 담가 준 호박고추장이 맛있다. 그 고추장 한 숟가락에 시금치나물 넣고 참기름 넉넉하게 부어 비빔밥을 하면 없던 입맛도 돌아온다. 시금치 된장국도 시원하다. 

 

 열심히 저녁준비를 하는데 군불을 때고 들어온 농부가 ‘밥은 좀 있다 먹자. 배가 안 꺼졌다.’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돼지국밥 맛나게 먹고 와서 낮잠만 잤으니 소화가 될 리 없다. ‘그럽시다.’ 탁 접어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페트 한트케처럼 일상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것도 나만의 글쓰기다. 나도 작가기 때문에 사유하는 힘은 있다고 본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물건도 어느 순간 생명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어 내 가슴에 꽂히기도 한다. 북창 밖의 상수리 나뭇가지에 앉은 멧새처럼. 단조로운 일상도 깊이 보면 단조롭지 않다. 살을 에는 겨울에도 마당가에는 큰개불알이 파란 꽃을 피우고, 광대나물도 자줏빛 꽃을 물고 있다. 잡초라지만 잡초도 거두면 약이 되고 나물이 된다. 쓰임새를 몰라서 잡초라 이름 할 뿐이다. 


  계묘년 정초 시작도 금세 일주일이 지났다. 날마다 뜨는 해고 날마다 지는 해다. 연도만 바뀌었을 뿐 사람 사는 모습은 매일반이다. 농부랑 둘이 마주보며 늙어가는 일만 남은 것 같을 때 사는 일이 허허로워진다. 돌아오지 않을 젊음, 나잇살에 맞게 사는 방법도 모르겠다. 잘 죽어야지. 하지만 잘 죽는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다만 내 삶에 부정보다 긍정을 실어가며 사는 것이 잘 죽어가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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