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르신
팔십 대의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다. 시름시름 앓은 지는 제법 됐다지만 골목길을 느릿느릿 걷던 모습을 뵌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전화를 받은 농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도 길어봐야 십 년 아니겠나.’ 십 년이면 농부도 나도 80대 문턱이다.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다. 살아갈 날이 그보다 더 짧을지 길지.
그 어른은 법 없이도 살 분이었다. 말 수도 없고 행동도 굼떴지만 부지런하셨다. 글자도 못 읽는다고 했다. 남들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치부하지만 내 눈엔 선인이었다. 따뜻했다. 아이들 어릴 때 그 어른 이웃에 살았다. 남의 빈집을 빌어 분가를 했을 때다. 그 어른은 들며나며 너덧 살이었던 우리 애들을 보살펴주셨다. 애들에게 과자도 주시고 꽃도 꺾어주셨다.
그 어른의 집안 살림은 아내가 두량했다. 아내는 팔방미인이다. 동네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젊어서 나는 ‘저렇게 예쁘고 야무진 아주머니가 저 아저씨랑 사는 게 신기해.’ 그런 생각도 했었다. 부부 사이는 남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 어른과 아내는 금슬이 좋았다.
가끔 마을회관이나 골목길에서 그 어른을 마주쳤을 때 인사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어른을 모델로 소설을 구상했었다. 선하고 착한 사람, 못 배우고 가난해도, 남들에게 바보라고 뒷공론을 들어도 무심하게 자신의 일만 하는 사람, 남이 어려움에 처하면 능력껏 도와주는 사람,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들과 따따부따 할 일이 있어도 ‘안 사람한테 물어보소. 내가 뭘 알아야지.’하시며 아내를 찾던 어른이셨다.
“많이 고생 안 하고 가셨대?”
“집에서 좀 앓긴 했지만 병원으로 옮긴지 일주일만이라네.”
잘 살다 가셨구나. 고생 적게 하고 가셨구나. 복대로 살다 가셨구나. 극락이든 천국이든 무릉도원이든 윤회의 사설에서 벗어나 해탈의 길을 가셨을 것 같다. 그 어른은 그런 어른이셨다. 남들과 싸움하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성내는 것을 본 적도 없다. 늘 웃는 얼굴이셨다. 농부랑 ‘저 분 얼굴이 해탈한 얼굴이야.’ 그런 농담도 했었다.
세계가 불안하다.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강진이 발생했다. 4만 명을 넘어선 사망자 수에 망연자실이다. 기적 같은 생환소식도 들린다. 살고 죽는 것을 한 끗 차이라 하던가. 지금 내가 살아있지만 언제 죽음 선고를 받을지 알 수 없다. 영과 혼을 합쳐 영혼이라 한다. 짐승은 영은 있어도 혼이 없다하고 사람만이 영과 혼을 가졌다고 한다. 그 많은 영혼들이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우리도 언젠가는 떠난다. 살아있는 동안 내가 모았던 짐들 비울 수 있는 한 비우고 치워두고 가야지. 정리정돈 해 놓고 담백하게 살다 자는 잠에 갈 수 있기를. 농부는 저승길 떠난 그 어른의 영혼을 배웅하러 동네로 향한다. 추적추적 땅을 깨우는 봄비소리 쓸쓸하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또 하루를 열고 하루를 접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