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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02. 2023

이야기 꽃이 핀 날

 이야기꽃이 핀 날     


 글은 마음에서 우러난 대로 써야 한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함을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수필이 그렇다. 나를 반추하고, 나를 곧추세우게 하는 글이 수필이다. 수필은 사유하는 글이라고도 한다. 신변잡기를 나열하는 것은 수필이 아니라는 말도 한다. 자신이 택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음미하는 글쓰기를 수필이라고도 한다. 나는 현실에 발을 붙인 글쓰기를 지향한다. 미사여구나 독자를 생각해서 쓰는 글은 본심이 아닐 수도 있다. 교훈적이거나 가르치려는 글을 접할 때면 진심보다 가식이 느껴진다. 사람의 본성은 가르치려는 경향과 배우려는 경향을 가진 것 같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 속에도 가르치려는 경향이 강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 선후배 사이,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옳음을 강요하고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이 따르기를 바란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내 말이 우선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며 자신의 생애 하루하루가 자연의 경외심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어린이를 왜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을까. 어린이는 순수하다. 세파에 시달리기 전이라 단순하고 직설적이라서 그럴까.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천진스러움 때문일까. 중국 유가 사상가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수양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했지만 나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에 더 무게를 둔다. 


 농부는 나를 지적할 때가 많다. 성인이 된 남매에게 이래라저래라 가르치려 한단다. ‘또 봐라. 그냥 둬라. 저거 알아서 잘한다.’ 딱 잘라버릴 때가 있다. 가끔은 약이 올라 ‘당신은 애들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래. 왜 내 말만 토를 달아?’ 되쏘아주기도 하지만 한 발 물러나보면 농부의 말이 맞다. 부모가 말하지 않아도 자식은 알아서 제 인생 살아간다는 거다. 애들이 어릴 때는 바른 길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이미 성인이 된 자식은 부모가 간섭할 필요가 없다. 자식이 부모에게 의견을 물을 때는 진심으로 답해줘야 하지만 자식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모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실천은 참 어렵다. 구십 노인이 칠십 자식에게 ‘차 조심해라. 길 조심해라.’하는 그 마음이 어찌 잘못이라 할 수 있겠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노파심이라고 표현한다.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과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점에서 노파심이 많은 어미다. 그럴 때마다 농부는 ‘애들이 알아서 한다. 잔소리 그만해라.’ 지적해 준다. 젊어서는 성질도 냈다. 왜 나를 탓하느냐고. 애들이 모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도 모르냐고. 농부에게 대들던 나도 변했다. ‘옙, 스승님, 또 제가 쓸데없는 걱정 했네요. 그래요.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고맙습니다.’ 일부러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인사를 하고 웃어넘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얼마 전부터 인터넷의 속도가 뚝 떨어져 애를 먹었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은 우리 컴퓨터 용량 탓이라며 서비스 센터에 연락해 보란다. 농부는 그런 일로 아들에게 전화했다고 잔소리를 한다. ‘옙 스승님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했다. 덕분에 삼십 년째 단골인 삼성 컴퓨터 사장님이 오셔서 업그레이드시켜주고 유튜브도 네플릭스도 뚝딱 뜨게 만들어주고 갔다. 두 시간이나 걸린 작업인데도 수고비는 한 끼 밥값 정도다. 점심 먹고 가라 해도 사양한다. 결국 집에 있는 농산물 두어 가지 챙겨줬다. 나는 신나게 중국 드라마를 본다. 마법의 세계는 늘 매혹적이다.


 지금 쓰는 내 글이 수필이 되던 신변잡기가 되든지 상관없다. 내 진심을 담은 글이다. 하루하루 내가 살고 느끼고 본 것들을 기록하는 것에 그칠지라도 그 틈새에 따뜻함이 존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깔린다면 나는 또 하루를 잘 살아낸 거다. 


 점심을 먹으러 동네 음식점에 갔다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한과공장 사장님과 읍내 농부의 친구 부인이다. 참 오랜만에 마주 보는 얼굴에서 세월을 느꼈다. 우리 부부 얼굴에도 세월이 두께가 앉았겠지. 늙어가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잘 늙어가는 것인지. 잘 익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하루 일과를 쓰는 지금 빙긋이 웃고 있다. 이야기꽃이 핀 날이 행복했음이다. 덕분에 점심 잘 얻어먹고 책도 얻어 왔다.


 글을 쓰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다. 내게 진솔하지 않으면 내 글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없지 않을까. 남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내 마음의 행로를 그리는 글쓰기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쓰련다. 내 글이 심연에서 길어 올린 청량 수 한 모금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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