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이야기

<처음>

by 박래여

<단편소설>

하동 이야기


우리는 하동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섬진강은 여전히 검푸르렀다. 억새밭도 여전하고, 재첩을 건지는 어부들도 여전한 하동포구를 달리며 아주 오래 전 그날을 떠올렸다.


내가 은진을 만난 것은 하동 모 관청에 발령을 받고 간 날이었다. 마침 현관을 나오는 중년 남자를 만났다. 관리과가 어디냐고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발령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대뜸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행정계장 조무송이오.’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이 공무원보다 껄렁한 주먹 패나 역도 선수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진짜 역도 선수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의 첫 인상은 전혀 호감이 안 갔다. 아하, 당신이었군. 속으로만 짐작하고 나 역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행정계장의 손은 거칠었다. 꽉 잡는 손가락의 힘이 강했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들어갑시다. 하동이 처음이오?

그렇습니다.

그렇잖아도 기다리던 참인데. 잘 왔소.

너스레를 푸는 그의 몸짓과 행동이 꽤 과장스러웠다.

어쨌든 행정계장 조무송을 따라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관장 실이라는 팻말이 붙여진 문을 거칠 것 없이 밀고 들어갔다. 긴 머리를 등 뒤로 묶은 곱상하게 생긴 여자가 책을 보다가 발딱 일어났다.

은진아! 잠깐 관장님 뵙고 나올 거니까. 차는 타지 마라.

찰라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고개를 까딱하고 도로 제 자리에 앉아 책에 눈을 박았다. 아니 뒤통수로 눈 두 개가 살짝 올라와 나를 관찰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은진과 나의 첫 대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반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딱 8초라고 하던가.

들어갑시다.

나는 은진이라 불린 여자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관장실로 들어갔다. 관장 실에서 만난 60대 초로의 남자는 첫 인상이 퍽 관료적이었다. 다분히 신경질적으로 보였지만 관장은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게 다였다. 바람 휭휭 부는 들 가운데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행정계장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꼴이었지만 나는 막대기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내려가보라는 듯이 관장이 손짓을 했다. 관장에게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오니 은진이란 여자는 여전히 책에 눈을 박고 있었다.

은진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간다. 나중에 보자.

도대체 나로서는 감을 잡을 수 없는 몇 마디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여자 쪽은 여전히 조용했다.

관장 실에서 내려와 관리과장을 뵈었다. 어느 곳을 가나 관료직의 뻣뻣한 목울대를 느꼈다. 잘 왔다. 잘 부탁한다. 입에 발린 인사말이 오가고, 악수를 하고 관리과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자자, 여러 분, 오늘부로 우리 군내로 온 이 도홍 주삽니다. 앞으로 묵계 지소에 근무할 인잽니다.

반응이 냉랭했다. 아니, 모두 필요이상으로 경직된 얼굴이었다. 기분이 최고조에 이른 듯이 구는 사람은 행정계장 조무송 뿐이었다. 이상하군. 앞으로 한 식구로 살 사람에게 첫 반응이 저렇다니, 이 동네가 소문처럼 그렇게 배타성이 강한 건가. 아니면 외지인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이 지방 출신이라 그런가.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나. 호기심과, 안됐다는 듯이 외면하는 눈빛도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머릿속은 되묻고 있었다. 묵계 지소? 이건 아닌데. 연이가 앉았던 자리가 내 자린데. 공석으로 있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자아, 이 주사, 조금만 기다리소. 밀린 결제 좀 해 놓고 봅시다. 참, 거기는 관내 임지지만 도서벽지라 다니는 차가 없어요. 택시 대절을 해 놨어요. 내가 모시고 갈 거니까 길 잃을 염려는 없소. 기다리는 동안 우리 관내를 둘러보던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선선히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혼자군, 그제야 탱탱하게 긴장했던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심호흡을 한 후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관청은 읍내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있었다. 나지막한 담장 밖으로 푸른 소나무 군락지가 보였다. 저기가 송림이군.

연아, 시작이다. 날 지켜 봐 줘.

3년 전, 나는 진해로, 그녀는 하동으로 발령이 났었다. 그녀는 가끔 낙서 같은 편지를 보냈다.

여기 하동은 좀 이상한 동네 같아. 시골이면서도 시골 같지 않은 느낌, 특히 사무실 분위기가 그래, 한 사람이 좌지우지 하는데. 어째서 그런지 아무도 그 사람에게 대들지 않아.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달 난 얼굴이야. 인사권도 그가 다 잡고 있어. 나도 잘못 보이면 묵계 같은 오지로 갈지 몰라. 하지만 경관은 참 좋다. 조용하고 넉넉한 느낌이랄까. 볼게 참 많은 곳이야. 일단 사무실 가까운 곳에 송림이라는 푸른 솔밭이 있다는 것과 너른 모래밭, 하동포구의 푸른 물줄기가 눈을 시원하게 해.

또는, 니가 보고 싶다. 여기서 나는 외톨이야. 많이 외롭다. 아무도 속을 드러내지 않아 무서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그런 끈끈한 정이 참 그립다. 너 같은 친구가. 난 틈만 나면 송림 숲으로 간다. 모래밭을 맨발로 걸어봐. 모래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꼭 아기 살 같아. 강 건너가 광양, 전라도 땅이래. 다리 하나로 연결돼 있는데. 앞으로 전라도 땅도 답사를 해 볼 생각이야. 참 하동포구는 강이라고 하지만 물이 짜더라.

또는, 관광지라서 그런지 봄가을이면 희한한 광경을 본단다. 글쎄, 관광차가 끝도 없이 왔다 가거든. 모래와 숲이 좋아서 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미꾸라지를 방생하는 거야. 근데 그 미꾸라지가 모두 물 밖으로 나와 파닥거리는 거 있지. 관광차 떠나고 나면 또 진풍경이 펼쳐지데. 후줄근한 할머니들이 플라스틱 함지나 들통을 들고 다니며 뭔가 줍는 거야. 늘 그게 궁금해서 어느 날 물가에 나가 봤지. 미꾸라지나 붕어, 남생이 같은 민물고기와 자라 새끼였어. 물을 떠 맛을 봤는데. 글쎄 짜잖아. 바닷물이었어. 방생이 아니라 산목숨 생매장 시킨 거였어. 모르고 한 일이니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날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도홍아, 나 사랑에 빠졌어.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인데. 꼭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 우리는 주말이면 사람들 눈을 피해 만난다. 그 사람이 하동에 왔으면 하동의 진가를 알아야 한다고 이름난 명소를 데리고 다니네. 하동 자랑을 좀 할게. 우선 지리산을 등에 업고 있으니 골마다 빼어난 계곡이 많아. 대표적인 계곡은 피아골, 대성동 계곡, 쌍계사 계곡, 박경리 작가의 토지로 유명한 화계장터, 시장국수가 맛있어. 화계장터에서 구례 쪽 길로 나오면 바로 강이야. 섬진강에는 나룻배가 다녀. 뱃사공이 털보야, 장미 한 갑 사다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음은 악양 평사리,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본무대잖아. 악양은 처음 갔을 때는 실망했어. 그냥 다랑이가 층층이 있는 평범한 골짝이었거든. 조 씨 고가를 보기 전에는 그랬다는 뜻이야. 골목의 돌담이 참 아기자기한 동네더라. 그리고 유명한 절이 있지. 쌍계사, 불일암, 칠불사, 꼭 들려볼 곳은 청학동 도인 촌과 삼성 궁이 있어. 나 그 곳에서 결심했다. 그 남자의 여자로 살겠다고.

하지만 거의 일 년 만에 받은 편지는 나를 긴장시켰다.

도홍아, 참 힘들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 여길 떠날 것 같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쫓겨날지 몰라. 묵계 같은 오지에 가서 살 수 없어 나는. 사표를 낼 생각이야. 그 남자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어. 그 남자, 죽이고 싶다. 소리 소문 없이 죽이는 방법 좀 알려 줘.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이듬 해 봄 어느 날이었다. 퇴근시간이었다. 전화가 왔다. 그녀였다. 사무실 가까운 카페에 앉아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달려갔더니 연이는 매혹된 사랑이라는 진한 칵테일을 시켜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일 있구나. 매혹된 사랑이 독초로 변한 얼굴이군.

연이는 말이 없었다. 초췌할 대로 초췌한 몰골이었다. 연이는 여자 키로서는 큰 편에 살이 좀 붙은 늘씬한 미인이었는데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진짜 어디 아픈 거야?

아니, 그냥 피곤해서.......땅속이든 하늘이든 한 순간 사라졌으면 좋겠다.

질투 나게 따끈따끈한 사랑 이야기를 실어 보낼 때는 언제고 벌써 두 사람 파투 난 거야?

연이는 말이 없었다.

너 사표내면 내게 와라. 평생 밥 먹여주고 재워 준다.

됐네요. 그리고 고마워. 언제나 너는 든든한 내 친구야. 요즘도 운동에 미쳐 살아? 운동 밖에 모르는 너, 태권도 사범 자격증에 유도와 검도 유단자, 월남도 갔다 왔지. 무술의 달인 같지 않은데. 달인이란 거 신기해. 연애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벌써 애가 서넛은 달린 유부남일 텐데. 너도 연애 좀 해라.

너 있잖아. 너만 있으면 돼. 농담으로 듣지 말고 생각 좀 해라.

연이는 피식 웃으며 빈 칵테일 잔의 둥근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더니 넋이 빠진 듯 혼잣말을 했다.

그래, 난 조무송이가 팔팔 뛰는 꼴을 봐야겠어. 은진이, 고것부터 작살을 내고 싶어.

혼자 연극 하냐?

내가 농담을 건네자 그제야 정색을 하며 말했다.

도홍아, 부산에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주먹 잘 쓰는 남자라면 좋겠는데. 호신술 개인교습 좀 받았으면 싶어서. 전화번호만 적어주면 내가 알아서 할 게.

나는 부산에서 유도 도장을 하는 이상범 선배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간다. 너랑 찐하게 한 잔 하고 싶어 왔는데. 미안.

김연이, 그녀는 예전의 생기발랄하고 거칠 것 없던 여자가 아니었다. 어딘가 지친 듯, 아픈 듯, 불안하고 허기진 모습이었다. 내 가슴이 무너졌다. 그녀와 나는 입사 동기다. 공무원 시험장에서 만나 인사를 터고 같이 합격해서 발령을 받은 덕에 연이랑은 친구 이상의 관계다. 독신주의를 주장하는 연이는 나와 동갑이지만 결혼할 생각은 애초에 없다고 했다. 외로울 때면 가끔 술친구가 되고, 남자가 그립다 하면 내가 남자노릇 해 주는 이상야릇하지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관계를 지난 몇 년 동안 이어 왔다. 각자 근무처가 다르니 서로 자주 만나기도 어렵지만 만남도 즉흥적이고, 사랑도 즉흥적인 여자가 연이였다. 그 여자를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에 깊이 담고 있었다. 마지막 선택은 내가 될 거라는 웃기지도 않는 자신감, 서로 독신 생활 실컷 즐기다 지치면 합치자고 농담을 하는 사이, 그녀는 농담 속에 든 내 진심을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그녀가 변했다. 세상만사 덧없다는 식으로. 아니,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그가 누굴까. 조무송! 내 눈에도 파란 섬광이 뻗었다. 연이를 울게 하면 가만 안 둬. 그가 누구든지.

나를 만나고 간 그녀는 진짜 어느 날 홀연히 잠적했다. 왜? 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마지막 그녀의 편지는 단 한 문장이었다. 하얀 백지에 굵게 휘갈겨 쓴 ‘조무송, 그를 처단하고 싶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녀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수취인불가라는 낙인이 찍혀 돌아왔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를 준 이상범 선배에게 물어봤지만 그런 여자의 전화를 받은 적도 도장에 온 적도 없다고 했다.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연이의 행적을 더듬어야 했다. 하동으로 전출을 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등 뒤에서 또랑또랑 방울을 굴리는 예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은진이란 여자다. 눈이 부셨다. 입가에 은은한 웃음을 머금고 긴 생머리를 목 뒤로 질끈 묶은 여자, 쌍꺼풀 진 상큼한 눈에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목이 둥글게 팬 빨간 티에 초록색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허벅지만 살짝 덮은 치마 아래 알맞게 뻗은 다리, 슬리퍼 위에 얹힌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발톱,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가씨군. 저 눈웃음, 몇 놈을 죽였을까. 연이가 샘 낼만 하군.

제 몸에 뭐가 묻었나요?

나도 모르게 은진의 몸을 탐색하고 있었나보다.

아닙니다. 아가씨가 하도 미인이라서 넋을 잃었다고나 할까.

피, 순진하게 봤는데 헛다리짚었네요.

저 순진합니다.

거짓말!

근데 위층에서 봤을 때는 그 옷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사무실 안에서는 위에 가디 건을 걸쳐요. 옷 색깔이 너무 틔죠?

아니요. 산다화 같은데요.

산다화? 무슨 꽃인데요? 이름이 참 예쁜데.

동백꽃을 산다화라고 합니다. 특히 은진 씨처럼 붉고 탐스러운 꽃을 말하기도 하죠.

그녀의 얼굴이 잠깐 발그레 물이 들었다. 일단 성공이군.

택시 한 대가 정문 입구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벌써 정분 난 얼굴인 걸. 은진아, 관장님 찾으신다.

때맞추어 조무송이 나오며 은진과 나를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습하고 깊은 땅속에서 먹이를 찾아 온 몸의 촉수를 곤두세우고 흙을 파내는 두더지처럼 그의 눈빛은 기분 나쁘게 탐색적이었다.

택시는 하동포구를 돌아 길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끝도 없이 갔다. 하동지역은 처음이라 내 눈에는 모든 게 경이롭게 비쳤다. 너른 골짝에 햇볕을 밭아 하얗게 빛나는 크고 작은 바위들, 그 바위를 돌아 콸콸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 계곡 옆에는 넓고 좁은 들이 펼쳐지기도 하고, 산비탈에는 곡선을 그린 다랑이가 오밀조밀 예쁘게 치장을 하고 있었다. 묵정이도 있지만 벼와 참깨, 고추, 배추, 등 곡식과 채소가 풍요롭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직 구월 초입이라 산 빛은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청청한 편이고, 차창을 스치는 바람은 시원했다.

이 주사, 김연이 씨랑 잘 아는 사이오?

창밖 풍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옆에 앉았던 조무송이 느릿느릿 물었다.

아, 예. 입사 동기라서.

그렇소? 가끔 만나기도 했소?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던데.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동료일 뿐입니다.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여기서 사표 내고 간 후론 통 소식을 들을 수 없소.

저도 잘 모릅니다.

나는 앞만 바라보았다. 아득하게 멀기만 하던 산 주릉이 겹겹이 내 앞에 와서 턱 멎는 것 같았다.

그 친구를 꼭 한 번 만났으면 싶은데. 찾을 수가 없소.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관내 인사이동이 있었소. 연이 씨가 묵계지소로 발령이 났어요. 그런데 사표를 던지고 사라진 거요.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아가씨 더마.

나는 침묵을 택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 역시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니까.

묵계, 가보면 알겠지만 풍광이 참 멋진 곳이오. 지리산 품에 안긴 골짝 치고 안 좋은 곳이 없소만, 거긴 특별한 곳이오. 묵계에서 한 사십 리 걸어 올라가면 도인 촌이 있소. 도 닦아 볼 생각 있으면 한 번 가보시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은 도인 촌이오. 아시오?

예, 무릉도원이란 말은 들었습니다.

그래요. 무릉도원일 수도 있지. 이인로의 파한집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지.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지리산에는 청학동이라는 데가 있는데 그곳은 좁고 험한 길을 기어서 몇 리를 들어가면 문득 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널찍하고 기름진 벌판이 있다. 거기에는 청학이 깃들고 있었던 탓에 그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옛날 세상을 시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던 곳인 듯 아직도 무너진 담과 낡은 구덩이가 가시덤불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지요. 나도 다음에 퇴직하면 청학동에 들어가 살까 싶소만.

김연이 씨가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나요? 발령이 그쪽으로 났다기에.

아니, 원했다기보다 읍내 생활이 힘든 것 같아서 수양 차 보내려고 했었소.

외람된 말씀이지만 연이 씨와 계장님이 상당히 친했다고 하던데요.

친했지. 한 직장에 있다 보면 상관과 여직원 사이가 돈독해지는 법 아니오?

그 이상은 아니었나요?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꼭 형사한테 취조를 받고 있는 기분인 걸. 이 주사, 보기보다 직선적이오.

죄송합니다.

나는 웃었다. 비굴할 정도는 아니지만 편안하게 웃어 주었다.

허, 이 친구 제법인 걸.

거기 가면 큰 댐이 있소. 휴가철엔 사람이 제법 북적이지.

묵계 덕인지, 청학동 도인 촌 덕인지 모르겠지만 묵계 가는 길은 이제 소로가 아니다. 대로다. 울퉁불퉁 하지도 않다. 숲이 우거진 산속 깊은 골로 들어가는 느낌은 있지만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가에는 군데군데, 눈요기 감 같은 아기자기한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산골 풍경, 텅 빈 것 같으면서도 꽉 차 있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산골 마을.

계장님, 다 왔습니다.

운전기사가 현실을 일깨웠다. 차 앞을 보니 잘 나가던 포장길이 뚝 끊어지고 흙으로 된 넓은 공터가 나왔다. 운전기사는 공터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내리고 택시는 돌아갔다.

자네가 근무할 곳이 저기라네.

조무송이 가리키는 곳은 길 위쪽의 작은 건물이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건물이 아니라 돌담 위에 축 늘어진 느티나무 한 그루였다. 물론 길 쪽으로 가지를 쭉쭉 늘어뜨린 것이 연륜을 자랑했다. 그 속 어딘가 건물이 있겠지만 길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자네, 여기 경치 기차지 않나. 저 댐만 봐도 시상이 절로 떠오를 게야. 시인이라며?

아닙니다. 겨우 습작기 면했는걸요.

내가 알기론 모 신춘문예 출신이라고 하던데. 소문 빠르지? 우리 지역에 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 손바닥 안에 든 손오공이라 생각하면 될 게야. 내가 바로 그 부처님이라 생각해도 별로 틀리진 않을 게고. 잘 해봐. 여기서 나오는 길이 의외로 수월해질지 아나. 도시 사람들이 처음 여기로 발령받아 오면 유배지에 귀양 온 줄 알지. 잘 하면 봉알자리가 될 수도 있는 곳인데 말이야. 왜 다들 도시로만 가려고 혈안인지. 나는 이런 곳이 좋더마. 자네도 도시 사람이니 얼마간 견디기 힘들게야. 내가 가끔 불러내 줌세. 여기서 돈 쓸 일이 별로 없으니 술값은 자네가 책임지고. 어떤가?

그는 은근히 협박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복종해야 다음에 여기서 빼 내어 좋은 곳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김연이 씨도 이곳을 좋아했을 것 같은데요.

두꺼비가 알을 깔 때가 되면 능구렁이를 찾아가 약을 바짝 올린다지.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능구렁이가 제 죽을 줄도 모르고 덥석 두꺼비를 먹어치울 때까지. 두꺼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능구렁이 뱃속에 알을 까놓고 느긋하게 죽음을 맞는다지. 능구렁이 뱃속에서 부화한 두꺼비새끼가 능구렁이 살과 피를 먹고 자라 뱃가죽을 뚫고 나올 때를 상상하며 행복한 죽음을 맞는 거지. 나는 조무송에게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무송은 나를 예리하게 쏘아 보았다.

가세, 저기 계단만 오르면 별천지가 펼쳐진다네.

우리는 아스팔트가 끝나고 시작된 흙길을 터벅터벅 걸어 계단 쪽으로 향했다.

특이하게도 계단은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었고, 수직면에는 버섯 모양의 돌 꽃이 자연스럽게 피어 있었다. 자연석으로 계단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거다. 나는 그 계단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여기서 몇 년 살아 봐?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다섯, 스물, 스물다섯.......마음속으로 계단을 세면서 천천히 걸었다. 조무송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와 나의 거리가 한 계단 두 계단 멀어질수록 나는 자유로워졌다. 나를 옭아매려고 던져 둔 올가미에 걸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던 걸음걸이가 나도 모르게 반듯하고 편하게 바뀌었다.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자 모래가 깔린 작은 운동장이 나를 반겼다. 꽤 넓었다. 그 운동장 안쪽으로 작은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 건물 옆에는 국기계양대가 있었고, 쭉 뻗은 간짓대 끝에는 깃발 두 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현대식 건물 뒤편으로 작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관사겠지. 나는 건물을 향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섰다. 마지막 계단의 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눈앞에 푸른 저수지가 넘실거렸다. 묵계 댐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묵계 댐은 꽤 넓고 컸다. 골짝을 통째로 막아 놓았으니 어련할까. 댐이 없을 때의 골짝은 어땠을까. 자연스럽게 굽이굽이 흘러 내려가던 물줄기가 큰 바위에 부딪혀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어야 아름다운 법이라 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금세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산 빛을 그대로 담고 있는 댐의 물은 선경이 따로 없었다. 조용하고 아늑했다. 조용하고 아늑하다는 것은 사람이 내는 기계음이 없다 뿐이지 숲은 조용하지 않았다. 풀벌레와 매미의 자지러진 합창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자연향이라 할까. 연이는 저 댐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빨리 오시라는데요.

고개를 돌렸다. 보기만 해도 상큼한 순박한 아가씨가 마주 보았다.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안에 들어가자 신발장이 나오고, 작은 마루가 놓였고, 그 안쪽에 사무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무실 안은 간소하고 깨끗했다. 문 옆에는 간단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싱크대가 놓였고, 창을 등지고 지소 장 명패가 놓인 책상과 디귿자 형으로 가운데는 찻상이 놓이고, 한쪽에는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가죽의자가 놓이고, 맞은편에는 책상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 가죽의자에 조무송과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조무송과 여자가 일어나 반겼다. 여자는 자신을 하정숙 지소장이라고 소개했다. 같이 근무하게 되어 반갑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그 손을 마주 잡았지만 잘 부탁한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김연이 씨도 여기 왔다가 사표를 내고 갔습니까?

나는 갑자기 지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인사차 들렸다면서 짐 싸서 다시 오겠다더니 영영 오지 않았어요.

그랬군요. 전화 한 통 써도 되겠습니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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