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래난초를 찾아서

<처음>

by 박래여

<단편소설 >


타래난초를 찾아서


남자는 아나카키 히데히로의 <풀들의 전략> 중 ‘사람들은 잡초를 이름 없는 풀이라고 멸시한다. 그러나 이름 없는 풀은 없다.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잡초에겐 자기만의 이름과 아름다움과 특징이 있다. 그것들은 다양하고 생기에 차 있다. 잡초의 삶도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잡초의 특징은 무엇보다 역경에 끊임없이 마주 서는 강인 함이다. 잡초는 식물계의 하층민인 셈이다.’를 떠올리며 여행 가방을 꾸렸다.

남자는 요즘 사는 게 시들하다. 종이박스를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과장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장가도 못 간 노총각이다. 어머니는 사지 멀쩡한 사내가 여자도 한 명 꿰차고 들어올 줄 모른다고 사람 취급도 안 한다. 어머니의 등살을 피해 원룸 하나를 얻어 딴살림을 난 지도 오래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동생은 벌써 아이가 셋이다. 맏이 자리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때도 있다. 참하고 야무진 제수씨도 몸이 달아 친구들 몇 명을 소개팅했지만 남자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뭔가 2% 부족했다. 그렇다고 남자의 눈이 높은 것도 아니고, 곰보째보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기생오라비 같다는 말을 듣던 남자다. 누구든 ‘장가갈 거냐 말 거냐’ 물으면 ‘장가가야지. 총각으로 늙기는 싫다.’ 말은 잘한다. ‘어떤 여자가 좋냐’ 물으면 ‘첫눈에 내 혼을 쏙 빼놓는 여자.’ 답은 시원하다. 문제는 여자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여자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남자다. 특히 역사나 고분군에 대해 관심이 많다. 틈만 나면 여행 가방 꾸려 무덤 탐사에 나서길 즐기니 어느 천 년에 여자를 꿰찰 수 있으랴.

이번에도 그렇게 무덤에 안겼다.

남자는 옥전 고분군을 향해 나무그늘 아래 난 오솔길을 걸어 오르며 손에 든 카탈로그를 펼쳐 읽었다.

//옥전고분군 사적 326호-옥전 고분군은 황강변 야산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고총고분 27기를 포함하여 고분의 총수가 약 천 여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 유적은 1985년 겨울부터 1992년 봄까지 5차에 걸쳐 경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 된 고분은 모두 146기인데.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의 갑옷과 투구, 각종 무기, 말갖춤, 귀걸이, 고리자루 큰 칼 등, 무려 이천오백 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남자의 혼을 쏙 빼놓았던 것은 황금으로 만든 용봉분양고리자루 큰 칼이었다. 남자는 마지막 황금 칼을 쥔 사람이 누구였을까. 몹시 궁금해하며 야산 정상부에 두루 뭉실 솟아 있는 무덤 곁으로 다가갔다.

탐스러운 젖무덤이었다. 억센 손아귀가 꽉 잡고 주물러도 균열 하나 가지 않을 것 같은 탱탱하고 둥근 젖무덤이었다. 남자는 무덤과 무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가끔 둥그스름한 무덤을 쓰다듬기도 했다. 두 팔을 벌리고 무덤을 안아보기도 했다. 까끌까끌한 풀잎이 남자의 가슴에 간지럼을 태우기도 했다. 사방이 적요했다. 파란 잔디밭에 난 오솔길의 흔적이 아주 예뻤다. 좁다란 오솔길에는 풀이 누웠다. 바람도 누웠다. 남자는 누군가, 무엇인가 가만가만 오고 간 흔적을 따라 걸으며 하늘을 봤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하늘이 무덤과 무덤 사이를 새파랗게 칠했다. 티 없이 맑은 저 무덤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남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무덤을 감싸고도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 한 조각을 주웠다. 슬픔은 자잘한 은빛별이 되어 흩어졌다.

남자는 무덤과 무덤 사이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키를 낮추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멀리 아늑하게 내려다보이는 황강과 파릇하게 모가 자라는 들녘으로 가 있던 눈길을 거두어 발을 봤다. 황토색 바지 위로 소리 없이 기어오르던 개미가 놀라 딱 멈춘다. 남자는 개미를 손톱으로 톡 쳐냈다. 개미가 톡 떨어진 자리에 갑자기 환한 꽃이 피었다. 무덤 주변이 온통 연한 분홍빛 비단 천을 깔아놓은 것 같다. 파란 잔디 위로 삐삐처럼 쑥 올라와 핀 꽃, 하얀 꽃과 분홍 꽃이 핀 줄긴데 부끄럼쟁이 소녀를 연상시켰다. 꽃은 남자의 눈길에 파르르 떨었다. 남자는 개 중에 가장 도드라진 분홍빛의 선명한 꽃줄기를 가만히 싸 안아 꽃에 입을 맞추었다. 나선형으로 돌아 올라간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핀 꽃이 화들짝 놀랐다. 남자는 슬며시 웃었다. 꽃은 얼떨결에 남자에게 첫 입술을 빼앗기고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참 곱다. 너는 부끄럼도 탈 줄 아는 꽃 같구나. 부끄럽니?

네에. 부끄러워요.

순간, 맑게 구르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흠칫 놀라 무덤 주위를 둘러봤다. 무덤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없었다. 다시 이명처럼 들려오는 소리, 네에. 부끄러워요. 꽃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남자의 의식이 몽롱해졌다. 뭔가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했다. 날아다니던 은빛별이 모여들어 정수리에서 목을 통해 명치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어지러웠다. 남자는 꽃을 쓰다듬던 손길을 거두며 둥근 무덤에 등을 기댔다. 자신의 침대보다 더 편안했다. 동산만 한 둥근 무덤과 무덤 사이에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어둑한 그늘을 만들었다. 남자는 소나무 그늘을 밀어낸 자리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꽃을 잡아당겼다. 작고 앙증맞은 꽃을 다닥다닥 매단 꽃대가 쑥 뽑혀 나왔다. 남자는 손에 든 꽃을 바라봤다. 순간 꽃 한 송이가 뚝 떨어져 날아갔다. 연분홍 날개옷을 입은 소녀가 춤을 추며 사라지는 환영을 보았다. 남자는 바람을 타고 나르는 꽃을 좇다가 팔랑팔랑 흔들리는 연분홍 나비 떼를 발견했다. 그제야 무덤 주변이 온통 꽃밭이란 것을 알았다. 꽃이 속삭였다.

내 이름을 찾아봐. 내 이름을 기억해 둬. 바보야,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잊었어. 나를 알고 싶으면 찾아봐. 내 꽃말은 추억이야. 추억, 우리는 모두 추억을 먹고살아. 넌 나를 기억해야 해. 우린 만난 적 있으니까. 아니, 만나야 하니까.

이명처럼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꽃을 입에 물고 두 손을 뒤통수에 대고 깍지를 낀 채 잔디밭에 누웠다. 둥근 무덤이 양쪽에서 포근히 감싸 주었다. 마치 풍만한 여인의 가슴팍처럼 편안했다. 소나무 그림자가 한 발짝 물러섰다. 등에 깔린 잔디가 푹신했다. 하늘에서 태양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눈을 감았다. 불꽃이 붉게 피어올랐다.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화염에서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났다. 남자는 코를 벌름거렸다. 그 냄새가 싫다. 남자가 담배냄새조차 지독히 싫어하는 것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매캐한 그 냄새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연기 냄새는 가끔 그를 지독히 혼란스럽게 한다. 언제였을까. 숨을 할딱이며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던 적이 있다. 누구였을까.

참 좋다.

또다시 목소리가 살며시 남자 곁에 누워 속삭였다. 남자의 하얀 반팔 티 아래 드러난 팔뚝에서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는 남자의 팔꿈치 위에 머리를 얹고 남자의 귀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소나무는 고개를 숙여 남자를 나무그늘로 덮었다. 반듯이 누운 남자 위로 푸른 꽃대가 올랐다. 푸른 꽃대는 나선형 계단을 만들기 시작하고 계단마다 분홍빛 날개옷이 펼쳐졌다. 나선형으로 피기 시작한 꽃이 수줍은 듯, 부끄러운 듯 예쁜 입술을 벌려 남자의 입술에 댔다. 부드러운 여자의 입술이었다. 은은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비단을 만지듯 감미로운 입술은 꿀맛처럼 달았다. 남자는 입술을 빨았다.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여자를 채 갔다. 매가 병아리를 채듯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 날아갔다. 여자는 슬픈 눈으로 돌아봤다. 안 돼, 안 돼. 남자는 사라져 가는 여자의 날개옷을 잡으러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가지 마. 가지 마.

괜찮으세요?

누군가 남자를 흔들었다. 괜찮으세요?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눈을 떴다. 여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했다.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봐요. 괜찮으세요?’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옥을 구르듯 맑은 목소리였다. 아니, 기와지붕 추녀 끝에서 땅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빗방울 소리 같았다.

진짜 괜찮으신 거예요?

이름이 뭐지!

남자는 실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이름 요? 반말까지? 이봐요. 잔디밭에 너무 오래 누워계시면 살인진드기에게 물릴 수도 있어요. 살인진드기에 물려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신문도 못 읽었어요? 일어나세요. 햇볕이 너무 강해요. 자외선 오래 쐬면 피부암 걸린다는 것도 몰라요? 여기가 당신 안방인 줄 아세요? 백일몽을 꾼다더니 이 아저씨가 진짜 백일몽을 꾸나 봐. 괜히 친절하게 굴었네. 미안해라.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가만 흔들던 여자는 거칠게 가슴을 탁 쳤다.

남자는 눈을 번쩍 떴다. 여자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남자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직도 몽롱하다. 눈을 쓱쓱 비빈 후 여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긴요. 고분군이죠.

그래요? 당신은 누구요? 우리 어디서 만났던가요?

만났으니까 여기 있지요.

여자가 웃었다. 그제야 남자는 제정신이 돌아와 여자를 기억해 냈다.

저기 박물관 안에서 황금 칼?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다시 올라왔어요? 여긴 먼저 구경하고 내려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었지요. 댁이 여기로 올라가는 것을 봤는데 시간이 꽤 지나도 내려오지 않더군요. 박물관 문은 닫혔고, 일행도 없고, 심심해서 올라와 본 거죠. 그러니까 우린 구면이네요.

그렇군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어요. 소나무 그늘이 시원했던 모양입니다.

소나무 그늘은 저만큼 도망 가 있는데요.

여자가 웃으며 소나무 그늘을 가리켰다. 진짜 소나무 그늘은 발치 아래 멀리까지 밀려나 있었다. 남자는 옆에 핀 꽃 한 줄기를 뽑아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말없이 꽃을 받아 바라보았다.

참 곱다. 이 꽃에 대해 아세요?

아니요.

이 꽃은 잔디가 없으면 필 수 없는 꽃이랍니다.

혹시 꽃 이름을 아세요?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남자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여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꽃을 코앞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무아의 경지에 빠진 표정이 저럴까. 이 외진 곳에서 낯선 남자랑 만났지만 여자는 전혀 남자를 남자로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외간 남자에 대한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여자는 오래전부터 알던 남자를 만난 듯 친근하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니 같이 놀러 온 연인처럼 굴었다. 여자는 선 자세로 앉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시다. 해가 기울었네요. 해 떨어지면 이곳은 다라왕국이 된답니다. 무덤의 문이 활짝 열린대요. 어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이란 것이죠. 어둠의 문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이승 구경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죠. 특히 여기처럼 천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은 위험합니다. 순장당한 여자들이 나와 남자를 납치한대요.

그래요? 그럼 저랑 같이 천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시렵니까?

남자가 장난스럽게 응수하며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끌어당겼다. 남자가 일어섰다. 참 당돌한 여자군. 박물관에서는 얼음처럼 차갑게 굴더니. 남자는 장난 끼가 다분한 여자의 푸른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들이 경남 합천군 쌍책면 황강옥전에 있는 합천박물관에서 만난 것은 유월 마지막 주 오후였다. 각자 박물관에서 얻은 <천년의 역사여행 합천박물관>이라고 적힌 관광 책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라 문화 실, 고고 관, 다라 역사 실에서 무심하게 지나쳤었다. 여자와 남자는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지나치는 관람객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부류였다. 그러다 그들의 눈이 딱 한 번 마주쳤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라 국 국왕의 무덤이라는 옥전 M3호 고분에서 나왔다는 용봉문양고리자루 큰 칼 옆에서였다. 여자는 무심히 눈을 돌렸지만 남자는 여자에게서 금세 눈을 뗄 수 없었다. 왜냐고?

여자는 특이했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에 자줏빛 바지와 헐렁한 윗도리의 개량한복을 입었지만 가느다란 몸매는 감출 수 없었다. 숱이 적은 긴 생머리를 목 뒤에서 붉은 손수건으로 질끈 묶은 것까지 특이했다. 여자는 남자와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용봉문양고리자루 큰 칼 앞에서 딱 마주쳤지만 여자는 남자를 외면했다. 남자는 자꾸 여자를 훔쳐봤다. 아니,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해야 옳다. 감전사를 일으킬 만큼 남자의 가슴은 뛰었다. 하지만 여자는 한 번도 남자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의 눈길이 없자 남자는 꼭 정인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훅 하고 올라왔다. 잘 났어 진짜. 쳇

남자도 여자를 외면했다. 남자는 전시물을 꼼꼼히 살피는 척했지만 말초신경까지 곤두섰다. 눈과 마음이 온통 여자에게 갔다. 여자는 여전히 무심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여자가 살짝 비껴서 남자 곁을 지나칠 때였다. 남자는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는 여자에게서 은은한 향기를 맡았다. 찰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 여자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지만 손을 뿌리치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여자의 눈은 여전히 남자를 향하지 않고 용봉문양고리자루 큰 칼에 멈추어 있었다.

손잡이의 문양이 참 섬세하죠?

바위틈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맑은 목소리가 사르르 흘러나왔다.

황금 칼이라더군요.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여전히 남자의 손에 잡힌 손을 빼거나 힘을 주는 일도 없었다. 여자의 손은 남자의 손바닥 위에 사뿐히 올려진 꽃잎 같았다. 후, 불면 금세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삼월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꽃잎이었다.

저 칼을 허리에 차 봤으면.

여자가 다시 말했다.

무겁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여자는 남자를 바라봤다. 깊은 우물 속에 뜬 달처럼 여자의 눈은 푸르고 깊었다.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남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손이 아파요. 손 좀 놓아주시겠어요?

그제야 남자는 깜짝 놀라 여자의 손을 놓았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당황했다. 자신이 여자의 손을 잡고 있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남자는 똑같은 남자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른 남자로 분리된 사람을 거기서 본 듯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처음 만난 여자의 손을 상대방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자연스럽게 잡다니. 그것만이 아니다. 꼭 머릿속에 다른 남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도 걸었지 않는가. 평소 그 남자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남자, 남 앞에 나서기보다 남 뒤에 숨는 남자였다. 남자는 거기서 분열된 또 다른 남자를 봤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잡혀 버린 느낌이랄까. 황당했다.

그들은 각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따로, 혹은 함께 박물관 내를 천천히 돌았다. 남자는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며 여자의 뒷모습을 좇았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여자 쪽으로 쏠리는 것을 의식했다. 이런 미친, 창백한 것을 보니 병색이 완연한 거야. 잠깐 스쳤다 지나칠 여잔데 괜히 신경 쓰이네. 남자는 일부러 여자와 뚝 떨어져 걸었다. 다라 국에 대해 생각했다. 유물이 저렇게 많이 쏟아졌으니 틀림없이 작은 나라가 존재하긴 했을 텐데. 우리 조상 중에 누가 다라 국의 녹을 먹지 않았을까. 가야에 함락되면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았다면 구전으로 전해진 뭔가가 있을 텐데.

난 진짜 저것을 허리에 차고 싶어요.

갑자기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남자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눈은 용봉문양고리자루 큰 칼에 꽂혀 있었다.

당신 귀에 저 옥으로 만든 귀걸이가 걸리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여자가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다라 국이란 작은 나라가 진짜 이곳에 있었을까요?

있었어요.

여자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믿습니까? 대답이 확고해서 다시 묻는 겁니다.

믿지요. 고고학은 역사의 산 증인을 찾는 일이죠. 유적과 유물을 통해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지요.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모든 것을 재조명하고 증명하는 일이 현재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천 년 전 그들의 삶의 방식을 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자각도 하겠지요. 인생살이라는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발견하는 일이니까요.

고고학을 연구하십니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위에 고분군이 있는데 같이 가보시겠어요?

아니요. 거기부터 다녀온 길인 걸요. 가 보세요. 다라 국 사람들이 반겨주실 겁니다. 저는 좀 더 여기에 있다 돌아가고 싶어요. 저 녹 쓴 칼자루가 자꾸 끌어당기네요. 이상한 일이지요? 전생에 저도 화랑의 후손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여자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다시 역사관 속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서야 했다. 곁을 주지 않는 여자에게 굳이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인연의 끈은 지남철 같아서 쌍방 간에 서로 끌어당겨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한쪽만 일방적인 끌림일 때는 금세 뚝 끊어져버릴 수 있는 것이 인연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만약 저 여자랑 인연이 있다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겠지.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등을 돌렸었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관심을 뚝 끊어 버리듯 성큼성큼 고분군을 향해 올라갔던 것이다.

금세 집으로 가실 것 같더니 뜻밖입니다.

남자는 기분 상했다는 듯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당신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어요.

왜요? 제게 관심이 있습니까?

솔직히 차가 없어요. 걷기가 딱 싫은데. 저 좀 태워주시겠어요? 가다가 어디든 내려 주시면 고맙겠는데.

그럽시다. 어차피 나도 나가야 하니까.

남자는 여자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도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남자는 여자를 봤다.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파울로 코엘로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11분에 불과하다고 했든가.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살다 보면 별난 일도 많이 겪거나 보게 되는 것이 인생살이다.

그들은 옥전고분군을 천천히 내려왔다. 작은 연못에 핀 백련이 단아하고 고왔다. 남자는 여자의 모습이 백련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박물관에서는 차갑고, 고분군에서는 수다꾼 같던 여자는 의외로 담담했다. 새털처럼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꼭 쥐어본다. 자신의 손에 여자의 손이 꼭 잡혀 있는데도 손 안이 텅 빈 느낌이 들어 몇 번이나 마주 잡은 손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내려오는 길에 고분군의 내부를 재현한 돌널고분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껴묻이 무덤이었다. 순장의 풍습이 전해지던 시대, 죽은 왕과 왕족을 위해 산목숨이 함께 묻혀야 했던 시절, 무덤 안은 또 다른 왕궁이었다. 봉황문양의 고리자루 큰 칼과 용봉문양의 고리자루 큰 칼이 나온 곳도 그곳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남자는 남녀 한 쌍이 묻힌 껴묻이 무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쌍이라 했지만 유골은 따로따로였다. 남자가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용봉 문양의 고리자루 큰 칼 옆에 누운 시신이 아니라 그 시신의 발치에 뚝 떨어져 누운 시신이었다. 남자는 황금 칼 옆의 시신을 여자로 보고 발치에 누운 시신을 남자로 봤다. 여자는 반듯하게 누웠지만 남자는 온몸을 기울여 여자에게 다가가고 싶은 듯이 여자를 바라보며 여자의 발치에 모로 누워 있었다. 아마 여자는 귀족이었고, 남자는 천민이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한 무덤 안에 있는 것일까.

좀 신기한 무덤이죠?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저 사내는 종이였을까요? 연인이었을까요?

글쎄, 옷 입은 걸로 봐서, 누워있는 자세로 봐서, 남자는 여자에게 예속된 노예나 종이였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뭔가 안타까운 느낌이 듭니다. 남자는 희생양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까요? 제가 보기에 저들은 틀림없이 연인이었을 같아요. 그것도 이룰 수 없는.

남자는 여자의 단호한 대답에 흐르는 찬 기운을 느꼈다. 왤까. 여자가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여자라서 그럴까. 남자는 무덤 속의 남자가 불쌍해 죽겠는데. 억지로 목숨을 빼앗긴 것 같아 억울한 느낌이 드는데.

그만 가요. 무서워요.

그럽시다.

그들은 박물관 주차장을 향했다. 문인석이 서 있고, 연자방아가 놓인 주차장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나무그늘 아래 남자의 하얀 SM5 승용차만 주차되어 있었다.

타시오.

남자가 운전석 반대편 차문을 열었다. 여자는 고개를 까딱하고 운전석 옆에 올라앉았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가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봤다. 여자는 무심한 듯, 한 자세로 창밖만 바라본다. 어디서 왔을까. 여긴 꽤 외진 곳인데 승용차도 없이 버스를 타고 왔다면 멀리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내게 관심이 있긴 있는 걸까. 관심이 있으니 고분군까지 따라왔겠지. 일단 가 보자. 이미 손도 잡았으니 작업은 걸었고, 실행에 옮겨 봐? 남자는 천천히 박물관을 빠져나오며 머릿속을 굴렀다. 요즘 여자들은 헤퍼. 이것이 남자가 서른여섯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이유 중 하나다. 정조 관념이 없는 여자들에게 실망하고 또 실망해서 아예 장가갈 생각조차 안 하고 산다. 여자는 자신이 여자로서 지켜야 할 것은 안 지키면서 남자에게 물질적으로 바라기는 또 얼마나 바라는지. 좋은 직장과 아파트 한 채가 없으면 장가들기 힘든 세상이다. 시부모 모시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다며 자수성가한 고아 남자를 선호한다는 말도 회자되는 세상이니 여자가 무서워서 어찌 장가를 갈 수 있겠나.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늘 어딘가에 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한 자락 버릴 수 없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다.

저기가 다라 린데요. 다라 국에 나오는 왕궁 터가 저기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더군요.

여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합천박물관에서 쌍책면 소재지 오는 중간쯤 지날 때였다. 왼손 편으로 들이 펼쳐지고 들녘 건너편 산기슭에 가지런하게 앉은 긴 마을이었다.

압니다. 저 마을에 대해서는.

그럼 이 지역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아니요. 두세 살 때 떠났다니까. 기억에 없어요. 어머니께 고향이 여기란 말만 들었어요. 내가 중학교 땐가 어머니랑 꼭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지요. 저 마을에 간 것이 아니라 택시를 타고 박물관 있는 저쯤에서 내려 무덤나라로 걸어갔었지요. 그땐 박물관도 없었고, 주변이 온통 논밭이었어요. 어머니랑 한 나절을 저기 가장 큰 무덤 앞에 앉았다가 내려왔었지요. 다라 리에 친척이 산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제 손을 꼭 잡고 저 고분에만 올라갔다 돌아갔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쭤보지 않아 모릅니다.

요즘 다라 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럼 이 지역 어디 사시오?

아니요.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우리 어디 가서 다리 쉼 좀 합시다. 진짜 다라 국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진지하게 토론도 좀 해 봅시다. 뺨 맞을 소리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을 것 같아 하는 말이오. 어떻습니까. 여긴 시골이라 갈만한 곳이 없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도 되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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