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래난초를 찾아서

<끝>

by 박래여

여자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여자가 말이 없다는 것은 긍정적인 반응이란 것을 남자는 안다. 초계 면에 도착해서 모텔을 찾았다. 여자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말없이 따라왔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모텔에 들어서면서 적당히 실망했다. 요즘 여자들 진짜 정조관념이 없어. 이 여자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마찬가진 걸.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여자에게 확 꽂혔던 것일까. 박물관의 흐릿한 조명 탓이었나. 뭐 어때, 잠깐 스쳤다 가는 바람이라도 괜찮지. 진짜 꽃뱀인가. 남자는 너무 쉽게 따르는 여자에게 실망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낸 것도 잠깐이었다. 그녀의 발그레 상기된 볼을 보는 순간 분명히 어디선가 만났던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여 명이 넘게 선을 봤었다. 선 봤던 여자 중 한 명인가. 가만, 그러고 보니 여자는 남자를 알고 있는 듯했다. 풍기는 뉘앙스가 그랬다. 분명 어디선가 만난 여자야. 남자가 물었다.

우리 진짜 만난 적 없어요? 저기 박물관이나 고분군 말고. 어디선지 언젠지 전혀 기억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당신이 낯설지 않다는 겁니다. 뭔가 생각날 듯 날 듯하면서 오리무중입니다. 설마 나를 시험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전생을 믿으세요?

여자가 뜬금없이 말했다.

전생! 최면술사라도 찾아봐야겠군.

남자의 말에 여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모텔 방에 들어갔다. 남자는 모든 생각을 탁 접어버렸다. 여자는 먼저 씻겼다며 욕실로 향하고, 남자는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고 침대 쪽으로 가다가 딱 멈추어 섰다. 신기하게도 모텔 침대보에 아주 특이하게 생긴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나선형으로 꼬아 올라가며 핀 꽃 그림이었다. 무덤에 피어 있던 꽃, 여자에게 한 줄기 꺾어 줬던 꽃, 그 꽃이 양팔을 벌리고 남자를 끌어당겼다. 남자는 침대에 엎어졌다. 꽃 무덤에 푹 빠진 남자는 거침없이 뜨거워졌다. 야릇한 신음소리가 남자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남자는 꽃을 어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꽃도 남자를 애타게 기다렸다는 듯이 낙지처럼 휘감겨 왔다. 어느새 꽃은 여자로 변해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여자의 몸은 탄력이 있었다. 이런 여자를 낙지 같은 여자라고 하는 것일까. 남자는 여자를 뜨겁게 안았다. 파도가 철썩 치고 갈 때마다 은빛 모래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여자는 모래밭에 꽃을 그렸다. 짙은 진달래 꽃빛을 띤 요염한 꽃은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불꽃은 맹렬했다. 남자의 뼈까지 녹아내린 후에야 꺼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바탕 뜨거운 불꽃이 피었다 진자리에 매캐한 연기가 차올랐다. 남자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선산을 도굴한 놈과 붙어먹은 년이 어떻게 낯짝 들고 여기서 사나. 우리 다 죽어야 해.’ 남자가 비틀거렸다. ‘다 죽이고 나도 죽겠다. 우리는 화형을 당해도 싸, 옥전 정 씨 가문의 후손이 내 대에서 끝났구나. 원통하고 절통해라. 이런 썩을 년, 가문에 먹칠을 한 년을 살려둘 수 없지. 같이 죽자.’ 검은 연기가 고을을 감쌌다. 누구 하나 불을 끄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중년 남자는 자신의 몸에 등유를 끼얹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방 안에 갇혔던 젖먹이 아이를 업고 두세 살짜리 아이를 품에 안고 얇은 이불을 덮어쓰고 있던 여자, ‘우리 인자 죽는구나. 그래, 억울한 누명 쓰고 죽는 것이 한스럽지만 우리 새끼는 내가 데리고 간다. 죽자, 죽어야 산다. 아가, 쪼매마 참아라. 그람 괜찮아질 기다.’ 그때, 누군가 방의 뒷담을 털어 여자와 아이를 빼냈다. 포대기로 꼭 싸맨 아이를 업은 여자를 등에 메고 이미 축 늘어진 꼬맹이를 옆구리에 낀 채 산으로 들고튀던 그림자, 도굴된 무덤 속에 숨어 지낸 그 밤이 아슴푸레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남자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

저를 불렀어요?

남자는 물끄러미 여자를 바라봤다. 온몸의 맥이란 맥은 다 풀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어머니를 닮았다. 넋이 빠진 듯 널브러져 있던 남자가 여자를 안으며 물었다.

당신 이름은?

저 꽃 이름과 같아요.

사는 곳은

맞춰 봐요.

그냥 가르쳐주면 안 돼?

안 돼요.

전화번호는?

힌트, 다음에 다라 국에 오면 알 수 있다.

다라 국? 농 따먹기 말고, 나 피곤하니까. 약속합시다.

어린애처럼 치근대긴.

난 진심이란 말이오.

힌트 둘, 마음 가는 곳에 길은 분명히 있다.

여자는 더 이상 남자가 무슨 말을 못 하도록 남자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여자의 손가락은 몹시 차가웠다. 남자는 여자의 손가락을 다시 빨았다. 마치 엄마 젖꼭지를 빠는 갓난쟁이처럼 부드럽고 거칠게 그러면서도 배가 몹시 고픈 갓난쟁이처럼 허겁지겁 빨았다. 손가락에서 여자의 전신을 빨아들였다. 여자는 안개처럼 빨려 들어왔다. 남자는 안개를 마셨다. 안개는 아무리 마셔도 허기가 졌다. 여자는 남자의 눈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남자가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여자가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는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이 공허했다. 그때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작고 둥근 탁자 위를 비췄다. 거기 무덤가에서 본 꽃 한 송이가 부끄럼 타듯이 놓여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우리가 만났던 것은 꿈이 아니에요.’ 꽃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남자는 그 꽃을 소중하게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는 즉시 유리잔에 생수를 담아 꽃을 꽂았다. 시들시들 말라가던 꽃이 물기를 빨아들여 싱싱해질 즈음 남자는 야생화 사전을 뒤지고 있었다. 꽃 이름을 찾았다. 타래난초! 여자가 남기고 간 꽃, 옥전 고분군에 무리로 피어 있던 꽃, 무덤과 무덤 사이를 은은하게 치장하고 있던 꽃은 타래난초였다. 남자는 인터넷을 뒤져 타래난초에 관한 것을 섭렵했다.

//타래난초는 한반도 각처 산야의 초지에서 나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0~50cm이며, 여러 개의 방 추상 뿌리가 있다. 잎은 밑동에서 좁은 피침 형으로 나고 길이는 5~20cm이다. 꽃은 분홍색으로 털이 나는 이삭꽃차례를 이루며, 꽃차례는 비꼬인다. 꽃받침은 피침 형, 끝이 뾰족하고, 곁 꽃잎은 꽃받침보다 약간 짧으며, 꽃받침과 같이 투구 모양을 이룬다. 입술꽃잎은 흰색, 꽃받침보다 약간 길고, 끝부분이 구부러진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타래난초라고 한다. 초원이나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며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서>//

//타래난초 씨앗은 너무 작기 때문에 발아에 필요한 영양분조차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래난초는 무서운 전략 하나를 생각해 냈다. 난균이라는 곰팡이 무리를 불러 모아 놀랍게도 자신의 몸에 기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자기 몸속으로 들어온 균사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해서 발아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난균까지 완벽하게 분해, 흡수해서 자라는데 필요한 영양분으로 삼는다. 그러나 까닥 잘못하면 거꾸로 균의 침입을 받게 돼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마치 '살을 잘라 뼈를 세우는 것'과 같은 위험한 전략이다. 아나카키 히데히로 <풀들의 전략>//

남자는 유리잔에 꽂아 둔 타래난초를 가만히 들어다 본다. 여자가 웃는다. 여자는 남자를 빨아들여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런데 왜 말없이 사라졌을까. 책임지라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수도 있는데. 꽃뱀처럼 들러붙어 남자의 살을 잘라 뼈를 세울 수도 있는데. 남자는 단 몇 시간의 짧은 만남에 자신의 생애가 걸렸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고 싶을수록 더욱 선명하게 시시각각 부각되는 여자였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 이미 그녀에게 잡혀버린 남자는 다시 한번 아나카키 히데히로의 <풀들의 전략>에서 타래난초의 생존 방법을 읽는다. 등골이 오싹해 온다. 유리잔에서 싱싱한 빛을 발하는 타래난초, 작은 꽃 한 송이에 그녀의 눈빛이 숨어 있다. 타래난초는 잔디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잔디 뿌리의 박테리아를 교환하여 공생하기 때문이다. 박테리아가 바로 난균이라는 곰팡이 무리라는 이야기다. 그녀는 누구일까. 왜 그녀는 이 꽃을 놓고 간 것일까. 다시 만나고 싶다. 어디서 찾지? 남자는 알고 있다. 그녀를 찾으려면 다시 합천 박물관으로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다라 국에 오면 다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진 다라 국을 찾아가는 길목은 어디 있을까. 남자는 어쩌면 그 길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잔디 없으면 살 수 없다는 타래난초는 벌써 한 달째 남자의 책상 위에서 더욱 싱싱하게 피어나고 있다. 연분홍 꽃잎을 반쯤 열고 유혹하고 있다. 나를 찾으세요. 내 이름은 타래난, 난초예요. 오직 당신을 위해서만 피는 꽃이랍니다. 밤마다 여자는 그의 꿈속에 찾아와 춤을 추었다. 연분홍 날개옷을 펄럭거리며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여자를 쫓아가다 잠에서 깨어났다.

남자는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다시 간단하게 여행 가방을 꾸렸다. 남자의 여행 가방에는 지난번 합천 여행길에서 가져온 <2천 년의 역사 여행 합천 박물관>의 카탈로그가 들어 있었다. 남자는 카탈로그를 펼쳐 다시 읽었다. 다라국의 성립은 ‘서기 400여 년 전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이 불러일으킨 부산 김해 지역의 격심한 정치, 사회적인 충격의 여파로 이 지역 주민의 일부가 합천 옥전으로 옮겨왔다. 고분의 규모뿐만 아니라 갑옷과 투구를 비롯한 무기, 말갖춤, 장신구, 등 부장유물이 성격으로 보아 이 시기에 다라 국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라국은 ‘후기가야를 대표하는 대가야연맹체 일원이었으며 <일본서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임나부흥회의에 참석하는 등 당당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가야제국 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것은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각종 철제품과 옥, 유리제품들에서 증명되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라 국, 멸망해 버린 아버지의 나라, 잡초는 질긴 뿌리로 어디서든 건재한다. 잡초 속에 핀 꽃, 그곳에 가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가는 곳에 길은 분명히 있다. 남자는 여자를 믿었다. 남자는 다라 국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합천박물관을 향해 길을 떠났다. 남자는 탐스러운 무덤과 무덤 사이에 숨은 그 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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