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단편소설>
칠불사 가는 길
하동읍에서 화개장터 가는 길은 벚나무 터널이 길게 이어졌고,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한 길은 습하고 길었다. 길가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음식점도, 찻집도, 민박집도, 모텔도 산자락을 등지고 앉은 초라한 마을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낡고 후줄근해 보였다. 오히려 폭우에 깨끗하게 세수하고 나온 울퉁불퉁한 바위 덤과 검푸른 기름을 바른 듯 반질거리는 잘 다듬어진 야생 차밭이 더 포실해 보였다. 폭우 한 차례 쏟아지고 나면 안개에 가렸던 시야가 살짝 벗겨지다가 다시 어둠이 창을 때렸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에 쥐가 났다. 차창의 와이퍼도 힘겨워했다. 마치 다리를 다친 사람이 한 걸음, 두 걸음, 온 힘을 다해 발자국을 떼는 것처럼 와이퍼는 창에 부딪히는 빗물을 닦아 내느라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지금 혼신을 다해 삶을 부여잡고 있듯이. 머릿속에서 자꾸 내려놓으라 한다. 그가 잡고 있는 것의 실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놔버리란다. 놔버리라는데. 무엇을 놔야 할지 몰라서 탈이다. 놔 버려? 그는 운전대에서 손을 뗀다. 순간 옆에서 그를 꽉 잡는 소리, 놔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빠, 저기 봐, 멍멍이가 떠내려가. 진짜야. 어, 금세 물 밑으로 들어가 버렸어. 진짜 멍멍이였는데. 멍멍이가 가 버렸어. 아빠, 우리 멍멍이 잘 있을까?
창에 얼굴을 대고 밖을 바라보던 별이가 소리쳤다. 창을 툭툭 두드렸다. 안타까운 아이의 목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섬진강은 넘칠 듯 출렁거렸다. 부유물들이 엉켜 빠르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 백 미리 이상 폭우가 쏟아진다던 일기예보가 오랜만에 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달이는 안전벨트를 풀어버리고 의자에 올라앉아 창문에 두 손을 짚은 채 소리치는 별이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빠 운전하잖아. 빨리 앉지 못해?
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고 달이는 별이의 가슴에 안전벨트를 채웠다.
참 야무지다. 콩쥐를 쥐어짜는 팥쥐 엄마의 목소리가 동화책에서 튀어나왔나. 어린 게 앙칼지기는. 그는 옆에 앉은 달이의 볼을 손등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달이는 금세 앙칼진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슬픔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다섯 살짜리 달이의 눈은 아이의 눈이 아니라 세상 풍파 다 겪은 후 달관의 경지에 든 노인의 눈 같다. 깊고 검은 동공은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다. 그 눈은 그에게 묻는다. 우리 거기 가서 살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달이는 다시 왜요? 눈으로 묻는다. 달이 맘에 쏙 들 거야. 그 역시 눈으로 대답한다. 달이는 고개를 가로로 세차게 젓는다. 아니란다. 그 눈은 우리 집이 좋단다. 우리 집으로 다시 가잔다. 엄마가 왔을지 모른단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우리 집 이제 없어. 팔았다는 거 알지? 거기는 이제 남의 집이야. 엄마는 오지 않아. 그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아빠, 싫어. 난 우리 집이 좋아. 엄마가 올 거란 말이야.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한 검은 눈의 달이가 소리쳤다.
그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칠불사 가는 길은 아직 멀었고, 빗줄기는 굵은 고무줄처럼 쏟아지고, 창밖의 와이퍼는 기진해서 끅끅 창을 긁어대고, 푸르고 검고 희고 둥근 무늬를 가진 아나콘다는 여전히 구불텅구불텅 기어가고 있었다. 달이는 아나콘다의 등에 기대어 울었다. 별이는 우는 누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울지 마. 울지 마아.
아빠, 배고파
별이가 그의 의식을 깨웠다. 그는 그제야 두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꾸러기 두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려고 했지만 두 아이는 밥을 거부했다. 갈 길이 바빠서 그냥 두 아이에게 외출복을 갈아입히고, 차에 태운 후, 두 아이의 옷가지를 싼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었다. 그 역시 배가 고팠다.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어 본 적이 없다. 현관 옆에 수북이 쌓인 소주병과 맥주병이 그의 밥이었다. 술을 먹고 뻗어 자다 일어나면 달이가 그 조그만 손으로 밥을 차려다 주곤 했다. 냉장고에 들었던 시어 빠진 김치그릇에 누렇게 변한 밥솥의 밥을 퍼다 상에 올려놓고 ‘아빠, 밥 먹고 자, 아빠 밥 먹어’라고 그를 흔들어 대곤 했다.
그는 금세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달이의 눈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나, 죄라면 내 죈데. 내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죈가.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생에서의 삶이 이토록 가혹한가.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진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마음 맞추어가며 살아줄 참한 여자를 원한 것이 잘못인가.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결혼 실패에서 얻어진 것은 배 다른 딸 둘과 아들 하나다.
스물넷에 한 여자를 사랑했다. 기계공업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손재주가 좋았다. 어려서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직한 그는 사무실에 있던 한 여자와 연애를 했다. 첫 여자는 말이 없고 온순하고 참했다. 현모양처 형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여자랑 결혼하면 평생이 행복할 것 같았다. 3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둘 다 가진 게 없으니 간단하게 동거부터 시작했다. 결혼식 대신 사진관에서 결혼 예복을 빌려 입고 결혼사진도 찍었다. 자취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한동안 깨가 쏟아졌다. 순지라는 딸도 생겼다.
1997년 아이엠에프 즉 국제구제금융사건이 터지면서 회사는 문을 닫았다. 실직자가 된 그는 고향으로 향했다. 늙은 부모가 있는 고향, 산골짝 다랑이 몇 도가니로 생계를 이어가는 지지리도 가난한 오지마을이었지만 빌붙을 언덕이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는 다랑이를 다듬어 축사와 가정집을 손수 지었다. 사슴을 입식했다. 어떤 사업이든 가진 것 없이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빚을 내서 시작해 봤자 본전 치기도 못할 정도로 경제는 어려웠다. 생활에 쪼들리기 시작하자 아내는 직장에 나가겠다고 했다. 읍내 근처에 있는 전자제품 만드는 공단에 취직했다. 아내가 벌어오는 생활비로 사는 일이 계속되었다. 순지가 대여섯 살 즈음이었다.
야간작업을 한다고 연일 퇴근이 늦어지던 아내가 외박을 했다. 다음날 아내를 찾아 공단에 간 그에게 공장장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아내가 회사를 그만 둔지 한 달도 더 됐다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했지만 아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지를 데리고 아내의 친정에 찾아갔지만 아내의 행적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아빠아, 배고파
별이가 다시 칭얼댔다.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화개장터라는 푯말이 보였다. 구례 쪽에서 내려오는 강물과 쌍계사 쪽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있는 화개장터, 그는 장터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아이를 앞세우고 장터로 향했다. 초가와 기와를 얹은 집이 이색적이다. 장터 들입에 영화 역마의 촬영지라고 붙인 포스터가 신기한지 두 아이가 그 옆에 가서 배우의 얼굴을 만진다. 그는 역마란 영화를 본 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본 것처럼 포스터가 낯설지 않다. 그렇다. 김동리 작가의 소설 역마를 영화한 것이리라. 시장 안은 한산했다. 문 닫은 상가도 많았다. 저잣거리에 옥화 주막이 있었다. 늙수그레한 여자가 역마의 주인공이 살던 옥화 주막이라고 그들을 끌어당긴다. 참게탕, 재첩국, 은어튀김, 산채 비빔밥, 보리밥 정식 등 메뉴가 다양하다.
그는 두 아이를 데리고 여인을 따라 옥화주막에 들어가 앉았다. 은어튀김과 산채 비빔밥을 시켜놓고 두 아이를 바라보며 소설 역마를 생각했다. 주막집 옥화는 여기서 역마살 든 아들 성기를 데리고 살았다. 아들의 타고 난 역마살을 잠재우기 위해 쌍계사 절에 보내 절 공부까지 시켰다. 체 장수가 데려온 계연을 키워 아들과 짝을 지어 주면 아들의 역마살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은 타고난 역마살을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것, 운명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란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운명은 어떤 길이란 말인가. 무엇에 대한 거부를 해 본 적도 없다. 자신에게 순응하며 살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좋은 여자 만나 평생 해로하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꿈 아닌가. 그가 특별한 것을 원했던가. 아니었다. 몇 달 동안 순지를 안고 아내를 찾아 전국을 돌았다. 아내가 떠난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아내가 딸을 생각해서라도 돌아와 주길 바랐다. 돌아와 준다면 남은 인생 깨소금 쏟아지게 살아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순지를 키우며 혼자 살았다. 사슴을 치고 젖소를 기르며 아내를 기다렸다. 칠순이 넘었지만 건강 하나는 자신 있다던 아버지가 어느 날, 동네 앞길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선산에 모시고 혼자된 어머니를 그의 집으로 모셨다. 어머니가 살림과 딸을 돌봤다. 몇 년이 흘렀다. 딸이 고등학생이 되었다. 딸은 똑똑하고 예뻤다. 딸은 그의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딸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기숙사가 딸린 여학교에 들어가자 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딸이 도시 유학을 떠나자 세상이 텅 빈 것 같았다. 잔소리꾼인 어머니와 사는 삶이 지겹고 싫었다. 사십 고개를 넘어가는 그는 자주 술병으로 나팔을 불었다. 아내 찾기를 포기하고 순지를 바라보며 살기로 작정하고 끊었던 술인데 딸을 외지로 유학 보내면서 다시 입에 댔던 것이다. 어머님은 술독에 빠지는 아들을 묵과하지 못했다. 모자간에 잦은 다툼이 일어나고 언성이 높아졌다. 어머니는 술독에 빠져 살 바에야 여자 독에 빠지라며 재혼을 하라고 그를 밀어붙이다 어느 날 홀연히 보따리를 쌌다.
칠불사 통광 시님 찾아가련다. 그 절에 들어가 공양주나 하면서 남은 인생 살고 싶다.
어메 좋으실 대로 하소. 근데 통광 스님이 뉘요?
이놈아 내가 까마귀 괴기 믹이더나. 그걸 까 무? 니가 순지 에미 만냈을 때 이 에미가 뒷절 해주시님한테 니 사주를 물어보러 갔다 안 쿠더나. 그때 큰 시님이 와 계신 거라. 우리 시님 캉 이바구 하는데 큰 시님이 시큰둥하게 한 마디 하더라. ‘중 될 놈이 여자 취하면 그 업을 어찌 다 갚을꼬. 보살님이 절에 가서 살아야겠네.’ 그러더라. 그라이 내를 받아 줄 끼다.
어머니는 집을 떠나며 한 마디 더 때리고 갔다.
너거 애비 뒤치다꺼리에도 넌더리가 났는데. 잘 죽었지. 아암, 잘 죽고 말고, 오래 살았시모 설움 오지기 받았을 기다. 아이고 인자 나도 편하게 살란다. 남은 인생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멀쩡한 자슥 놈이 여편네 하나 건사 못하고 저 에린 걸 혼자 키운다 칼 때 가슴이 새까맣게 탔었는데. 저 애린 것이 인자 철이 들었더라. 할미 없어도 잘 살기다. 나는 간다. 남은 인생이 아깝지도 않나 이놈아, 니 불쌍한 딸내미 장래 생각해서 사람답게 살아라.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밥을 비볐다.
두 아이의 밥을 먼저 비벼 주고 자신의 밥을 비비는데 아이들은 볼이 미어지게 잘도 먹어댔다. 두 아이는 한 손에는 은어 튀김을 잡고, 한 손으로는 숟가락질하기 바빴다. 배가 몹시 고팠던 모양이다. 그는 밥맛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께 자신이 찾아간 용건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두 아이 생각하면 암담했다. 저 천진스러운 두 아이와 나는 무슨 인연으로 만났을까. 나는 왜 이 엿 같은 운명의 고리에 얽혀 사는가. 밥알이 입안에서 돌돌 굴렀다.
소강상태에 들었던 빗줄기가 무섭게 내려쳤다. 금세 저잣거리는 흥건하게 젖었다. 와달 비 한 줄기 세차더니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뚝 그친다. 그 새 두 아이는 입가심으로 물을 먹고, 그도 남은 밥알을 꾸역꾸역 씹어 먹었다. 은어 튀김 몇 개가 남아 아이들 간식한다며 주인에게 싸 달라고 했다.
딸이우? 참 예쁘다. 이런 애들 자라면서 더 인물 나는데.
주인 여자는 자꾸 달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우리 딸 여기 맡길 테니 아주머님이 길러 줄라요?
그럴까? 너 우리 집에서 살래?
달이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그의 등 뒤로 숨는다. 별이도 따라가 숨는다. 그의 양쪽 허벅지에 매달려 주막을 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아주머니도 웃고, 그도 웃었다.
화개장터 앞을 흐르는 벌건 섬진강 황톳물은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갔다. 그는 쌍계사 쪽으로 길을 잡았다. 별이는 다시 창가에 얼굴을 붙인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자꾸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인 쌍계사 벚나무 터널은 더욱 어둡고 을씨년스럽지만 양쪽 산줄기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사람도 차도 보기 드문데 거친 물소리만 사방에서 우렁우렁 울었다.
어머니 떠나고 혼자 남은 그는 술에 더 깊이 빠졌다.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고, 술이 또 술을 먹었다. 젖소를 처분했다. 사슴도 네 마리만 남기고 몽땅 처분했다. 그 돈으로 술을 마셨다. 술에 절어 살았다. 어느 날 집에 다니러 온 딸은 거실에 잔뜩 굴러다니는 술병과 술에 절어 있는 그를 보자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고 선걸음에 등을 돌렸다.
아버지 딸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네요. 할머니가 떠난 이유를 알겠어요. 저 때문에 혼자 살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용기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아버지란 것을 아니까요. 아버지는 축사에 있는 저 사슴만도 못해요. 죽을 작정이면 저까지 괴롭히지 마시고 일찌감치 죽을 준비나 하시든지. 다시는 안 와요.
딸은 현관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그는 멍하니 현관을 쳐다봤다. 내가 꿈을 꾸었나?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을 봤나? 창문을 열었다. 딸이 울면서 골목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헛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는 현관을 박차고 나가 딸을 불렀다. 딸을 잡으러 뛰어가면서 순지야! 순지야! 딸을 불렀지만 아무리 불러도 딸은 돌아보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지그재그로 걷던 그는 몇 걸음 못 가 마당에 엎어져 정신을 잃었다.
그의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벌써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 뻗었다. 그 길로 앓아누웠다. 손끝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하루가 지났다. 술기운이 빠지면서 손이 떨떨 떨렸다. 사방에 술병이 떠다녔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술병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빈속에 술만 먹어대니 꼴좋다. 어머니가 히죽거렸다. 목이 말랐다.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은데도 물 한 컵 챙겨 줄 사람이 없었다. 아니, 몇 날 며칠을 굶어도 죽 한 그릇 끓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앓다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죽어 백골이 되어 썩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구더기가 끓고, 똥파리가 나는 방안, 낡은 이불이랑 같이 썩어가는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억울해. 억울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죽는 것은 억울했다.
그는 일어났다. 스스로 죽을 끓여 먹었다. 엉망진창이 된 축사를 다시 손봤다. 사슴이 새끼를 낳았다.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문이 났다. 동네 친구가 중매를 섰다. 도시 여잔데 결혼은 한 번 했지만 아이도 없이 이혼하고 혼자 산다고 했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정신 차렸다고, 재혼해도 되냐고, 딸은 좋다고 했다.
두 번째 여자와 처음으로 읍내 복지회관 강당을 빌려 결혼식을 올렸다. 첫 아내와 올리고 싶던 결혼식이었다. 딸의 축하 노래를 받으며 그는 자기 인생에서 더 이상 고통스러울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은 인생은 진짜 무지개빛깔로 빛나게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도 않았고 평탄하지도 않았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흐르는 물도 많다. 새 아내는 자주 아팠다. 도시 여자라 시골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지만 몇 달이 지나서야 숨겨둔 지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병 때문에 첫 결혼에 실패한 것이었다. 간질, 일하다가도 게거품을 물며 밭이나 논 골에 쓰러져 그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를 자주 했다. 그는 새 아내에게 잘해 주고 싶었지만 남자를 알면 그 병은 더 심하게 도진다는 것을 귀동냥했다. 그는 새 아내 옆에 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술병을 허리에 찼지만 전처럼 인사불성이 되진 않았다. 딸을 또 잃을까 봐 겁났기 때문이었다.
심약했지만 새 아내는 말없이 축사 일을 도왔다. 아내 노릇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자꾸 밖으로 겉돌았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잠자리에 드는 일이 드물어졌다. 자연스럽게 아내는 안방에, 그는 딸의 빈방에 자는 횟수가 늘어났다. 각방을 쓸수록 아내의 얼굴은 파리해져 갔지만 그는 무심했다. 어디 아픈가. 병원 가자면 아내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일이 좀 돼서 피곤해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착한 여자였다. 결혼 한지 겨우 한 해가 지난 어느 날 아내는 축사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혐오했다. 도대체 되는 것이 없었다. 사슴을 팔아치우고 다시 자동차 생산 공장노동자로 돌아갔다. 기계를 만질 때만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기계는 정직했다. 그가 정직하게 제 구멍에 조립만 잘하면 자동차 한 대가 만들어지고, 자동차는 어디든 쌩쌩 잘 달렸다.
쌍계사와 칠불사가 갈라지는 지점까지 왔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