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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27. 2023

 탐욕을 읽으며 시인을 애도하다

탐욕을 읽으며 시인을 애도하다 


    

 탐욕은 인간의 본능이다. 욕심보다 더 큰 것을 탐욕이라 부른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하나를 가지면 두 개를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이고 그 욕심이 더 커지면 이미 탐욕에 잡힌 거다. 내게 필요한 하나를 취했으면 그것에 만족해야 하는데.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 끊임없이 빈 곳을 찾아내 채우고 싶어 한다. 탐욕은 만족을 모른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거기에 자만심과 이기심까지 보태진다.


  엘프리데 엘리네크의 <탐욕>을 읽는다. 그 작가를 기억한다.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글을 써야 한다.’ 그 문장에 꽂혔던 것일까. 작가의 이름 엘리네크가 내 의식 깊이 박혀 있었다. 도서관에 들려 책을 골라왔는데 그 작가의 <탐욕>이었다. 막상 책장을 펼치자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시 읽고 있다. 소설은 인간의 탐욕을 다룬다. 집을 가진 불행한 과부들의 마음을 빼앗고 재산을 탐하고 죽이고 그 여자의 집을 취하는 살인자 지방경찰관과 그 아들의 행적을 그리면서 환경문제를 다루고 세계를 다루고 있다. 말주변이 좋은 건지. 언어유희를 즐기는 건지. 암튼 서술자의 언어유희가 빛나는 소설이다.  


 <탐욕>을 읽으면서 현재 한국 권력을 가진 정치계 인사들의 행위를 생각한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떠올린다. 정치계는 내가 모르는 분야지만 인간의 탐욕을 제대로 보게 한다. 한 나라의 기둥인 정치계의 권력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농촌의 작은 마을, 거기 속한 사람들의 탐욕을 생각한다. 크든 작든 인간의 탐욕은 누구나 가진 본능이 아닐까.


 농촌의 작은 마을 이장도 감투다. 한 번 쓴 감투를 스스로 벗어던지려는 사람은 드물다. 주민이 만장일치로 이장으로 추대해도 이런저런 핑계로 물러나는 사람도 있고 장기 이장을 하는 사람 중에 탐욕에 눈먼 사람도 있다. 그의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고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면 주민들은 단합해서 이장 직을 물러나게 할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은 쉽게 이장이란 감투를 내놓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이장 감투를 벗게 되면 동네 사람과 척을 지게 된다. 음양으로 사탕발림과 편 가르기, 언어폭력과 협박도 이어진다. 주민을 위해서라기보다 제 잇속이 먼저다. 물론 개중에 억울하게 보쌈당한 정직한 이장이 있을 것이다. 주민을 위해 봉사하려고 애쓰는 숨은 인재도 있을 것이다. 싸잡아 매도할 수는 없지만 작은 권력도 쥐면 탐욕이 덤으로 붙는다.


 마침 문자로 부고 한 장 날아온다. 아직 칠십도 안 된 시인이 죽었다. 부고 소식에 가슴이 먹먹하다. 내가 인식하는 그녀는 참 당차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겨우 나보다 한 살 위였던 그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여자 같다고 느꼈다. 명예욕도 강하고, 인정받기 위해 발로 뛸 줄 아는 그녀, 그녀에 비하면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수룩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옆에 서면 그녀는 어른인데 나는 무지한 어린애 같았다. 내게 모자라는 것은 가진 그녀가 부러웠는데 그만 떠나버렸다. 온종일 그녀와 연관된 기억을 더듬었다.


 저승사자가 호시탐탐 노리는 몸뚱이로 살면서도 세상에 남길 것을 챙기고 거기 매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다른 사람 다 죽어도 나는 안 죽을 거야. 내 나이가 아직 청춘인데. 쉽게 죽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고 한계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언젠가는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 죽음을 인지하며 사는 사람은 잘 죽는 방법을 연구하기보다 세상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 안달한다. 작가는 개인 작품집에 집착하고, 화가는 개인 그림에 집착하고, 부자는 돈에 집착하고, 권력자는 권력에 집착한다. 권력도 돈도 예술혼도 지니지 못한 평범한 사람도 남기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다시 <탐욕>을 편다. 작가 엘프리데 엘리네크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 작가의 작품을 읽었었다. 그때 읽은 책이지만 다시 읽으니 새롭다. 작가의 언어유희와 인간의 심리분석에 매료된다. 탐독을 할 수 있어 좋다.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날카롭고 신랄한 비판에 진저리 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소설 탐욕은 살인자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서술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탐욕에 대해, 여자와 남자에 대해, 환경문제에 대해, 사회 부조리에 대해 예리하게 파헤친다. 역시 독서는 재탕 삼탕의 묘미가 따로 있다.  


 그래도 오늘은 우울하다. 죽은 시인을 위해 애도한다. 올해 나올 시집이 있다니 유고시집이 되겠지만 어떤 혼이 스며있을지. 나는 그녀를 애도하며 여전히 <탐욕>을 읽는다. 나의 탐욕은 무엇일까. 나를 돌아보기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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