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처음>
천사의 목욕탕
구월 중순이었다. 추석 지난 지 일주일 쯤 됐을 때다. 새벽부터 줄곧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성가시게 우는 날은 일진이 사나웠다. 가까운 친인척의 부고 소식이 오거나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성가시게 했다. 정희는 벽에 붙여 만든 평상에서 책을 읽다가 그만 화증이 솟았다. 책을 평상위에 탁 소리 나게 엎어놓고 소리 질렀다.
야, 저리 안 가나. 너 자꾸 귀찮게 할래? 배고프냐?
까마귀는 기름칠을 한 것처럼 윤기 나는 검은 날개를 활짝 펴고 건너 편 버드나무에 날아가 앉았다. 까악, 까마귀가 다시 울었다. 정희는 잡친 기분을 풀 겸 쌀독에서 쌀을 한 사발 퍼나가 삽짝과 길섶에 뿌렸다.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꾼 날이나 이웃집 오줌싸개가 키를 쓰고 쌀을 얻으러 온 날은 액땜하라고 소금을 뿌렸지만 정희는 소금 대신 쌀을 뿌렸다. 먹고 나가떨어지라는 주문도 곁들여서. 까마귀는 쌀을 뿌리는 여자를 보며 갸웃갸웃 고갯짓을 하고 길섶에 숨었던 오목눈이, 참새들이 화르르 놀라 날아올랐다.
이 영감이 살맛나는 갑네. 전화 한 통도 없는 걸 보니.
괜히 심통이 난다. 남편은 동창들과 동남아 여행 중이다. 주저하는 남편의 등을 밀어 여행길에 오르게 한 것도 자신인데. 막상 떠나고 없는 남편의 빈자리는 고요한 못에 돌 하나 던지면 퍼지는 파문 같다. 다시 책을 잡았다. 에크하르트 톨레의『『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마음다지기 딱 좋은 책이다. 겨우 책에 몰입 중인데 차 소리가 들린다.
검은색 승용차가 스르륵 들어와 섰다. 거실의 벽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 시다. 목사리를 풀어놓은 백구를 컹컹 짖으며 삽짝으로 달려간다. 정희는 백구를 불러 개줄을 채워 손에 잡고 삽짝을 주시했다. 운전자는 차를 돌려 나갈듯 하더니 정차를 시켰다. 승용차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젊은 청년과 중년의 여인이 나왔다. 여자와 청년은 정희에게 목례를 했다. 정희도 고개를 까딱하며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외진 곳이라 물어볼 곳을 찾던 중 이 집이 보여 들어왔습니다. 외람되지만 혹 이 주소지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여자는 차분하고 교양이 넘치는 목소리로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겉봉에 쓰인 발신자의 주소가 희한했다. <경남 의령군 칠곡면 신전 골짝, 천사의 목욕탕에서 이장백 씀>이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 면에는 신전이란 동네는 없어요. 신전은 대의 면에 있는데. 바로 등 너머에 있어요.
이미 그 마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마을 회관에 가서 물어봤지만 인근에 천사의 목욕탕은 없다고 하더군요. 혹 신촌을 신전으로 잘못 안 것 아닌가 하면서 칠곡 면에 옛날에 목욕탕이 있었으니 거기 가서 물어보라 하더군요. 거길 찾는 중인데. 재를 넘어 오다 이 집이 보이기에 혹시나 싶어 들려봤습니다. 혹 신전이란 지명이 칠곡 면 인근에도 있습니까?
아니요. 신촌 마을은 있어요. 거기에 목욕탕 하던 집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목욕탕 업을 하지 않아요. 외지인이 들어와 산다는 말도 들은 적 없고요. 노인 두 분이 사는 걸로 아는데. 일단 여기 좀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정희는 어쩐지 두 사람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 그냥 내칠 수가 없었다. 백구를 개집 기둥에 묶어 놓고 두 사람이 평상에 앉아 쉬는 동안 모과 차를 끓여 냈다. 청년은 티와 바지를 입었지만 귀하게 자란 티가 났고, 여자는 웨이브가 굵게 들어간, 어깨까지 찰랑대는 긴 머리에 밝은 하늘색 투피스,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는데 무척 세련되어 보였다.
찾는 분이 누구신가요?
남편입니다.
추석이 엊그젠데 추석에 집에 안 계셨나 봐요?
예, 이 편지만 도착했어요.
기다리시면 다시 연락이 오겠지요.
그럴 것 같았으면 애랑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여자의 눈이 쓸쓸했다. 여자와 청년은 차를 잘 마셨다며 일어섰다. 두 사람을 배웅하는데 왜 자꾸 거기가 떠올랐는지. 정희는 꼭 누군가 자기 머릿속에 들어와 재촉하듯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저기 신전 골짝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거기가면 진짜 멋진 소가 있는데. 저는 그 곳을 천사의 목욕탕이라고 부르거든요. 혹 아저씨도 거기에 반했는지 모르겠네요. 천사의 목욕탕은 내가 지은 이름인데 이상하네. 그 아저씨가 누굴까.
펜션 같은 게 있어요?
아니요.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떠났다.
어둠살이 내렸다. 개밥을 주러 나갔던 정희는 갑자기 백구가 사납게 짖는 바람에 깜짝 놀라 삽짝을 봤다. 낮에 봤던 승용차였다. 정희는 백구를 다시 개집에 묶었다.
저 아래 목욕탕 집에도 가보고 간이 주차장에 사람들이 있기에 가서 물어봤지만 천사의 목욕탕은 없다고 하더군요. 남편이 집을 나갈 때 등산복 차림으로 배낭을 메고 나갔어요. 산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죠. 어쩌면 어느 골짝에 텐트를 치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주머니 말씀이 생각나 염치 불구하고 다시 왔습니다. 그곳에 가 볼 수 없을까요?
오늘은 늦었는데 밤에 갈 곳은 못 돼요. 남편이 차를 가지고 가셨나요?
한 십년 된 산타페를 타고 다녀요.
차가 있으면 사람도 있겠군요.
그렇겠지요.
마침 우리 집에 방이 남으니 주무셔도 됩니다. 남편은 여행 중이거든요.
그날 밤 여자는 남편에게서 받았다는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여보, 미안하오. 모든 재산은 당신과 재현이 앞으로 등기해 놨소. 나를 찾지 마시오. 나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소. 여기서 한 여자를 알게 되었소. 그녀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 생각이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소. 당신도 재현이도 행복하길 바라오. 당신의 남편이었던 사람으로부터 행복을 빌며 안녕!>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정희는 그들과 신전 골짝으로 향했다.
거기, 저수지 다리에서 조금 벗어난 공터에 먼지를 뽀얗게 덮어 쓴 산타페가 있었다. 여자와 청년은 남자의 차를 확인했다. 차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차문은 꽉 잠겨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차 안은 깨끗했다.
청년과 여자는 사방에 대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공허만 메아리만 돌아왔다. 여자는 천사의 목욕탕에 가 보자고 했다.
정희는 쇠락해가는 숲을 바라보며 가풀막 심한 길을 가리켰다. 쇠목재 밑이었다. S자 모양의 길에서 소나무를 발견했다. 차를 갓길에 세우게 했다. 차바퀴에 커다란 돌 하나를 받쳐놓고 일행은 오솔길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골짝이 가까울수록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비가 잦았던 탓일 게다. 세 사람은 커다란 노송의 등을 짚고 서서 눈 아래 펼쳐진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어머니, 저기......
다급한 청년의 목소리를 따라 가리키는 곳을 봤다. 뭔가 이색적인 것이 보였다. 바위 위로 얼기설기 나뭇가지를 걸치고 그 위에 칡넝쿨과 풀로 덮여있지만 분명 텐트 같았다. 청년은 가풀막을 나는 듯이 내려가 골짝을 건넜다. 청년의 모습이 집채만 한 바윗덩이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텐트의 흔적 아래로 청년의 키가 쑥 올라왔다.
어머니, 찾았어요. 아버지가 여기 어딘가 계세요.
정희와 여자도 골짝으로 내려가 돌다리를 건너 청년이 있는 곳으로 갔다. 텐트 입구의 지퍼를 열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침낭이 따뜻해 보였다. 침낭은 방바닥에 얌전히 깔려 있고 몇 권의 만화책과 소설책, 노트 한 권이 머리맡 부분에 놓여 있었다. 여자와 청년은 남자를 찾아 나갔다.
여보 오~~~~ 재현이 아버지! 재현이가 왔어요. 어디 계세요?
아버지~~~~~저 왔어요. 어디 계세요. 대답해 주세요.
골짝이 우렁우렁 울다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 물소리에 스러져갔다.
정희는 텐트 안에 들어가 가만히 노트를 주워 나왔다. 여자와 청년이 텐트 위로 펼쳐진 너덜겅에 올라 고함을 지르는 동안 정희는 노트를 펼쳤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이 송구했지만 뭔가 그곳에 비밀의 문서라도 있을 것 같았다. 노트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거기 남자가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