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나는 다시 이곳에 왔다. 옛 지명이 모의 골짝이지만 내게는 신이 내린 골짝이라는 뜻으로 신전골짝이라 부르겠다. 물론 골짝 바로 아랫동네 이름이 신전이다. 신전, 처음 그 지명을 들었을 때는 옛날에 커다란 신전이 있었던 곳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막상 그 마을에 들려보니 대한민국 시골구석이면 어디나 있음직한 그저 그런 대 여섯 가구가 사는 평범한 오지마을이었다.
신전골짝은 지난여름보다 숲이 더 우거지고, 나무를 감아 오른 칡넝쿨과 으름넝쿨이 더 무성하게 자랐지만 내가 만들어 놨던 텐트 자리는 오직 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듯했다. 우선 텐트부터 쳤다. 바닥에 두꺼운 비닐을 깔고 그 위에 텐트를 치고 텐트 바닥에는 도톰한 매트를 깔았다. 텐트 구석에 고우영의 <삼국지>와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 만화 한 질을 놓고 잡다한 소설책 몇 권 놓았더니 아담한 서재가 됐다.
텐트를 정리해 놓고 등산용 낫과 톱을 챙겨 폭포가 있는 소로 갔다. 소는 여전히 푸르고 깊고 맑았다. 폭포의 물줄기는 거칠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정인이 늦게 와 화난 것처럼 물방울을 사방으로 튀기며 우렁우렁 울었다. 나는 주먹만 한 돌 하나를 주워 폭포에 던졌다.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해 두고 주변 정리를 했다. 칡넝쿨, 다래넝쿨, 으름넝쿨과 축 늘어진 나뭇가지나 자잘한 나무는 낫으로 베고 소의 가장자리에 쌓인 지푸라기 뭉치도 걷어냈다.
땀을 쭉 빼고 홀딱 벗은 채 소에 들어가 누웠다. 소의 너비는 175센티의 내 키와 딱 맞았다. 나는 물에 반듯하게 누워 천사를 생각했다. 천사, 그랬다. 홀연히 나타나 목욕을 하고 사라지곤 하던 그녀는 천사 아니면 귀신이었다. 귀신이든 천사든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녀가 천사라면 나는 나무꾼, 천사의 옷을 훔칠 수만 있다면 나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 정원이다. 가끔 사람들이 기웃거리긴 해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곳, 하지만 그녀는 찾아들었다. 분결같은 살 옷을 입고 검은 거웃을 드러낸 채 푸른 소에서 한 시간 정도 놀다가 사라졌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젊은 처녀 혼자 이런 골짝에 들어와 목욕을 할 수 있지. 내가 꿈을 꾸나. 미친 여잔가. 온갖 상상을 하며 텐트 속에 숨어 그녀를 훔쳐봤었다. 그녀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다. 늘 민소매로 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다. 하얀색 운동화를 신었다. 원피스와 운동화를 벗어 물가의 바위에 올려놓았다. 브래지어도 팬티도 없었다. 알몸 그대로 소에 들어가 놀았다.
그녀는 자주 오는 것도 아니지만 오는 시간은 일정했다. 해가 서산에 한 뼘쯤 걸렸을 때 어둑한 숲길을 바람같이 가볍게 내려왔다가 바람같이 가볍게 사라졌다. 그녀가 숲길을 벗어나면 나도 살그머니 텐트에서 나와 숲길을 나가 보곤 했지만 도로에는 산그늘만 짙어오고 그녀는 사라졌다. 신전 동네에 사는 처녀일까. 차를 타고 왔으면 차 소리가 날 텐데.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일까. 자전거를 타고 왔으면 모롱이 돌아 내려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그녀는 흔적도 없었다. 어떤 날은 무섭고, 어떤 날은 기다렸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는 시간이 이어졌다. 내가 신전 골짝에 텐트를 치고 있었던 한 달 가량 그녀와 나 사이엔 기묘한 설렘이 싹트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면 그녀를 그냥 지켜만 봤을까.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지만 지난가을과 겨울에도 그녀를 찾아 이곳에 와서 며칠 씩 머물다 갔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전마을에 내려가 그녀에 대한 수소문을 해 봤지만 그런 처녀는 없었다. 나는 올 여름을 기다렸다. 열병으로 끙끙 앓으며 기다린 것이다. 오직 희망은 그녀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었다.
아저씨 기다릴게요. 꼭이요.
지난여름이었다. 아내와 다투고 집을 떠난 지 달포가 되어가자 손 전화에 불이 붙었다. 아내는 사흘이 멀다 하고 집에 안 온다고 야단이었다. 실종신고 내겠다고 협박하고, 그렇게 집에 오기 싫으면 이혼 서류 보내라고 협박을 하다 당신 평생 백수로 살아도 좋으니까 돌아와 달라고 사정할 지경이 됐는데도 나는 그녀 때문에 텐트를 걷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나는 하루도 그녀를 못 보면 죽을 것 같았다. 남자답게 손목도 잡아보고, 대화도 나누고 싶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몸이 텐트 안에서든 바위 뒤에서든 꼼짝달싹도 못하게 됐다. 사지가 제 자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틔어 ‘처자, 잠깐 있어 봐요.’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다 천사의 목욕탕에서 이는 소용돌이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만 서울로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윤 선생의 자살 소식이었다. 주부로 잘 산다던 그가 한 달 새 마음이 변한 것일까. 죽음을 택했다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그를 자주 만났을 것이고, 속에 쌓인 앙금도 풀어내 극단적인 생각을 못하게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백수는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도 속이 곪아 병을 앓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는 짐을 쌌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내 곁에 온 그녀는 짐을 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이제 집에 가실 거죠? 늘 거기서 나 보는 줄 알고 있었어요. 우리도 올해는 인연이 끝났지만 내년에 다시 만나요. 나도 여름에만 여기 살아요. 내년 이맘 때 오면 나를 만날 수 있어요. 내년부터 우린 행복할 거예요. 아저씨는 땅을 사고파는 일을 하면 좋겠다. 나를 위해 예쁜 집도 지어요. 아저씨가 있는 그 자리, 내 땅이거든요. 거기 작은 오두막을 지을 생각이니까. 아저씨가 설계 해 봐요. 그리고 올 때 만화책 잊지 마세요. 안녕! 아저씨, 기다릴 게요. 꼭이요.
나는 여전히 한 마디도 묻지 못하고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왔고, 윤 선생의 장례식에 갔다. 윤 선생이 죽은 것은 아내의 바람이었다. 새 남자가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의 당당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윤 선생이 내린 결론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면 만사가 형통된다는 것, 나는 윤 선생이 공원묘지에 묻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윤 선생과 나, 둘이지만 우리는 하나였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그때 그녀가 떠올랐다. 땅을 사고파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했던, 나는 부동산에 대한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쳤다. 시험은 쉽게 붙었고,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까지 직장도 없이 빈둥거리던 아들을 내 옆에 앉혔다. 아들의 전공이 세무회계니 안성맞춤이었다. 일 년을 살면서 십 년을 사는 것 같이 살았다.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만 생각하면 내 거시기는 거대해졌다. 밤마다 아내를 열락으로 이끌었다. 아내는 다시 고분고분한 여자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미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 처녀 때 아내는 백화점에서 고급 귀금속 담당을 하던 매니저였다. 다시 그 끈으로 직장을 잡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여전히 늘씬하고 예뻤다. 아내는 신혼 때보다 더 좋아졌다고 여행 가서 산삼을 구해 먹고 왔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산삼, 그래, 그녀는 내 산삼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 년을 십 년처럼 살다 다시 이 자리에 왔다.
가출을 했던 지난여름, 전국 산 이름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의령의 명산 자굴산을 찾았다. 내비게이션에 자굴산을 치고 찾아 든 곳이었다. 낡은 고물이 된 산타페를 저수지 옆 도로에 세워두고 쉬엄쉬엄 걸어 오르는데 경사가 급한 도로 옆에 있는 굵은 소나무를 봤다. 소나무 곁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은, 멧돼지나 고라니나 산짐승이 다니는 길 같아 호기심이 일었다. 목도 말랐다. 귀를 기울이니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를 따라 숲 안으로 들었다가 막다른 곳에 섰다. 길의 흔적은 거기서 끝났다. 발아래는 낭떠러지였다. 가풀막은 커다란 소나무 뿌리가 반쯤 드러난 채 거의 직각 수준이었다. 골짝을 내려다보던 나는 와우! 감탄했다. 바로 푸른 소였다. 첫눈에 반했다. 골짝은 한낮인데도 햇살이 들지 않아 서늘하고 어둑했다. 주변은 온통 나무였다. 나뭇가지는 축축 늘어졌고 칡넝쿨은 무섭게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뻗어나갔다. 또한 골짝 여기저기 집채만 한 너럭바위 몇 기가 턱 버티고 있었다. 암갈색 너럭바위는 육중했으며 바닥 역시 크고 작은 돌 천지였다.
나는 배낭을 벗어 소나무 등걸에 기대놓고 소나무 뿌리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물가에 닿았다. 가까이서 본 너럭바위는 내 키를 훌쩍 넘었다. 너럭바위에 기어올랐다. 너럭바위에 올랐을 때 나는 한 번 더 감격했다. 서쪽 너덜겅과 북쪽 골짜기가 합쳐져 Y자를 이룬 곳은 단단한 반석이었다. 골짝 양쪽으로 집채만 한 바위가 호위를 하듯 앉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졌다. 두 개의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내린 곳에 푸른 베일을 덮고 엎드린 소가 있었다. 그 소는 깊으나 바닥이 환하게 보였다. 물은 골짝을 따라 아랫녘으로 흘렀다.
나는 너럭바위에 앉아 찔끔찔끔 눈물을 찍어냈다. 백수 생활을 청산해야 살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나. 백수가 된 지 겨우 일 년이다. 처음 백수 생활은 활기찼다. 백수로 사는 선후배랑 등산 친목계를 만들어 여행을 다녔다. 주로 산행 위주였지만. 유럽과 베트남, 네팔, 중국 등 세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산도 섭렵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개인 홈페이지에 걸면 부럽다는 찬사의 댓글이 줄을 달았다. 직장에 매어 못 해 본 것을 모두 해볼 요량으로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무리하게 산을 탄 결과이기도 했으리라. 무릎 관절이 부어올랐다. 퇴행성관절염이란 진단을 받았을 때는 맥이 빠졌다. 물론 아내의 빈축도 샀다. 눈초리도 싸늘해졌다. 한동안 한방 양방을 들락날락하며 치료를 받았다. 무릎통증이 사라지자 다시 집 떠날 채비를 했다. 이번에는 무리가 아닌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했다.
문제는 아내의 반기였다. 나는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내는 마음에 이상이 생겼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단다. 연금을 칠랑 팔랑 다 써버리면 아들 장가는 어떻게 보내느냐고도 한다. 아들이 한 명 있다. 이미 대학은 졸업했지만 직장은 없다. 나와 마찰이 빚어지자 아내는 원룸을 얻어 아들을 분가시켰다.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데 어떤 아르바이튼지 물어보지 않았다. 자식은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딱 잘랐다가 아내의 빈축을 샀다. 졸지에 아직 육십도 안 된 남자가 백수니 이웃 보기 창피하단다. 백수 생활이 오래 가지 않을 줄 알았다. 다시 일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무슨 남자가 미래도 설계해 놓지 않고 덜컥 퇴직부터 했느냐고 내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사실 명퇴를 신청할 때는 신바람이 났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산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산을 사랑했다. 산에 미쳐 살던 한 해는 행복했다.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정도는 등반해야 산사나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도전하겠다. 호기를 부리며 산을 터득해 나가는 중에 퇴행성관절염에 잡혔다. 안나푸르나는 고사하고 북한산 정도도 오르기 힘들어지자 나 자신에게 절망하는데 아내는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더 여행이 간절했다. 이번 여행에서 내 인생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지칠 때까지 돌아다닐 생각으로 아내에게 밑반찬을 부탁했다. 아내는 밑반찬을 만들었다. 멸치 고추장 볶음, 깻잎 양념 무침, 매실 장아찌, 콩장 등이 짭조름하게 만들어져 통에 담길 것이다. 나는 느긋하게 거실에 앉아 한겨레신문을 신문을 읽는데 아내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아내는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싱크대 앞에서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당신 믿다간 아파트 팔아 전세 나게 생겼어요. 쥐꼬리만큼 나오는 연금은 당신 혼자 쓰기에도 모자라는데. 앞으로 어쩌라고요. 당신 비자금 있으면 내 놔요. 저축했던 돈은 곶감 빼 먹듯이 야금야금 먹어 치워 이젠 그것조차 바닥이 날판이에요.
씀씀이를 줄이면 되겠네.
어떻게요? 당신이 돈 안 쓰면 되겠네. 돈 나올 구멍 없는데. 어떻게 하냐고요?
내 연금으로 우리 두 사람 살 수 있잖아. 그 보다 더 적은 돈으로도 잘 사는 사람 천지야.
당신이 살림 살아봐요. 가랑이가 찢어진다고요. 당장 당신 여행경비부터 줄여요?
나는 기름 값 정도만 있으면 돼. 다리도 어지간히 나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나를 찾아볼 생각이야.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지 우리 같이 고민해 봅시다.
고민할 것 없어요. 당신만 사라져주면 만사 해결 돼.
아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소름이 쫙 돋았다. 30년이 넘도록 살 부비며 산 여자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까. 여태 가족을 벌어 먹이다 백수 된 지 겨우 일 년 남짓인데. 몸은 백수라도 매달 연금이 꼬박꼬박 나오니 완전한 백수도 아니다. 아직 아내가 가장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저리 담담하게 할 수 있나. 나는 밑반찬을 싸는 아내의 등을 바라봤다.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었겠지.
당신 그 말 사실이야? 내가 사라져주면 만사 해결 된다는 말?
사실이야. 수수께끼 일 수도 있고. 맘대로 생각해.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사람이 싫은데 이유가 왜 필요해?
직격타를 맞고 비틀거렸다. 한 순간 내 인생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일류는 아니지만 유수 대학의 선생질을 했던 나, 이장백이 싱크홀에 빠져버렸다. 뭔가 할 말을 찾아봤지만 도모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배낭을 메고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세상은 둥글고 할 일은 많다’ 그 말이 떠올랐다. 도무지 세상은 둥글지도 할 일이 많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때 윤 선생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학교에 있다가 나보다 먼저 백수가 된 친구였다.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윤 선생과 간이주점에 앉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농담처럼 아내는 내가 사라져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했더니 윤 선생은 술잔을 후딱 비우고 한참 나를 빤히 봤다. 내가 잔에 술을 채우자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도 사라져 줄 때가 된 거지. 쓸모가 없다고 버려지는 물건이 된 느낌 들었지? 내 아내는 아직 나를 필요로 해서 고맙지만 퇴직하고 아내랑 이혼한 사람 많아.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부인의 심중을 헤아려 쓸모 있는 남자가 되란 말이네. 돈 잘 버는 남자, 백수, 문제는 그게 아니거든. 여자는 복잡해. 자네 부인이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을 텐데. 자네가 워낙 강해 잘 잡고 사는 줄 알았더니 자네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구먼. 이번 기회에 자네 부인이 진짜 원하는 남자가 어떤 남잔지 알아내 보게. 자네 부인이 수수께끼를 던졌으니 답을 풀어 와야 할 게야.
그런 소리 말게. 여자들은 우리가 뼈 빠지게 벌어다 준 덕에 여태 잘 살았잖은가. 백수가 된 우리에게 더 잘해 줘야지. 우리는 백수지만 연금 꼬박꼬박 나오겠다. 왜 기가 꺾여? 더 팔팔 살아나야지.
자네 아직 정신 못 차렸군. 그 연금 덕에 그나마 참아준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그 연금 없어봐라. 마누라 등살에 지레 죽었거나 갈라섰을 걸.
그랬을까. 나도 사실 요즘 아내 눈치가 보이네. 아내 눈치 보는 내가 더 싫지만.
그럴 때가 됐지.
집에 있는 게 자꾸 힘들어지네. 이번에는 남녘으로 가 볼 요량인데 나랑 같이 갈 생각 없나?
없지. 기운이 딸려 여행도 술도 자제하는 중이네.
벌써 기운 딸린다고 주저앉으면 진짜 우리 뒷방 늙은이 밖에 안 될 것 같아. 아직 죽을 날이 까마득한데 말이야.
어쩜 이미 죽었는지 모르지. 요즘 내가 주부 아닌가.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린다네.
자네가 밥을?
그렇게 됐어. 아내가 옷 가게를 시작 했다네. 제법 솔솔 한가 봐. 반찬값에 용돈이라고 내 놓는 돈이 생각보다 두둑해. 허참, 아내가 벌어다주는 돈을 받으니까 기분이 묘하데. 우리가 돈 벌 때 생각나서 눈물 나기도 했어. 봉급봉투 내밀면 아내는 사르르 녹는 눈꽃 아이스크림 같잖아. 참 고분고분하지. 자네도 그랬을 거야. 우쭐해서 아내에게 이거 집어 달라, 저거 갖다 달라 보채기도 했겠지. 아내는 너그럽게 다 받아주고, 며칠은 식탁도 푸짐하지 않던가. 지금 내가 그래, 아내에게 참 살갑게 굴어준다네. 불만이라면 가끔 외박을 한다는 거지. 바빠서 가게 쪽방에서 잔다는데 할 말 있겠나. 자네는 나처럼 살지 말게. 제 2의 인생을 펼쳐 보라고. 호방한 성질 그대로 호기롭게.
윤 선생의 말에 자괴지심이 묻어났다. ‘자네는 나처럼 살지 말게.’ 그 말이 명치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윤 선생은 스스로를 아내의 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속내까지 흔쾌히 적응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윤 선생 아내는 뭔가 해야지. 이대로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다며 그동안 살던 넓고 쾌적한 한강 변의 고급 아파트를 팔아 서울 변두리 아파트로 옮겼다. 남은 돈으로 아파트 상가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옷 가게를 열었단다. 윤 선생이 사는 곳은 서민 아파트가 밀집한 곳이라 중저가 상품이 먹혔다. 특히 눈썰미나 말주변이 좋은 윤 선생 아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싸고 편한 허드레옷을 도매로 사 와서 진열을 했는데 벌이가 솔솔 하다는 것이다. 윤 선생이 싱겁게 웃으며 ‘나, 괜찮지?’라고 하는데. 나는 ‘그래, 잘 사는 거야.’라고 맞장구 칠 수가 없었다. 윤 선생이나 나나 펜대만 굴리고 선생질 하던 사내 아닌가. 남을 부릴지언정 부림을 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존재다. 윤 선생이 바로 나다. 슬그머니 퇴직한 것이 후회가 된다. 끝까지 버텨 볼 걸. 정년이 길어진다고도 하는데.
언젠가 농담처럼 웃으며 했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