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나도 돈벌이할까 봐. 이대로 늙어가다 할머니 되긴 억울해. 나, 아직 쓸 만한데.
그러던가. 당신이 나를 돈방석에 앉혀 놓고 호의호식시켜 주겠지. 나는 사표 내고 싶어 안달 났으니 우리 역할을 바꾸어 살아볼까?
꿈 깨세요. 당신까지 먹여 살릴 능력은 없어요. 만약 당신이 사표 내면 당신은 찬밥 되기 십상입니다요. 지금 하는 걸로 봐서는.
아내의 말은 야멸쳤다. 순간 나는 깨달아야 했다. 아니, 직시해야 했다. 순정적이고 고분고분하던 아내의 몸에 언제부터 날카로운 가시가 자라기 시작했는지. 잠자리에서 상위 체위를 하며 아내가 리드를 해 나가려고 할 때부터 감을 잡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내가 명퇴를 계획하다가 실행에 옮기자 겉으로는 ‘알아서 하라’고 허락을 했지만 아내 표정은 밝지 않았다. 적어도 한 5년 더 근무하면 노후 대책은 세울 수 있는데. 명예퇴직 수당을 얼마나 더 줄지 모르지만 매달 받는 봉급에 비하겠느냐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래전부터 판에 박힌 일상에 염증을 느끼던 차라 명퇴를 결정하자 단 하루도 교단에 서기 싫었다. 수시로 아내는 나를 회유하러 애썼다. 우려되는 점을 나열하고, 조금만 더 직장 생활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지만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는 퇴직을 감행했고, 일 년을 신나게 살았다. 돈 아쉬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댔다.
결국엔 혼자 남녘으로 도망치듯 떠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너럭바위에서 내려와 비탈을 기어올랐다. 배낭을 메고 다시 골짝으로 내려섰다. 일단 텐트 자리를 물색했다. 바윗덩이 뒤에 제법 편편한 자리가 있었다. 내 허리통만 한 때죽나무와 자귀나무가 골짝 쪽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러누운 탓에 속이 잘 보이지 않던 장소다. 허리를 구부리고 나무그늘로 들어섰다. 텐트 두 개는 칠만한 공간은 됐다. 나무의 낮은 가지를 등산용 작은 톱으로 베어내고 자잘한 나무를 베어냈다. 주변 정리를 하고 보니 그 자리가 봉의 알자리 같았다. 납작한 돌을 주워 바닥에 깔고 돌 위에는 풀과 마른 가랑잎을 긁어모아 도톰하게 펴고 텐트를 쳤다. 길에서는 내 텐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골짝에 들어와도 내 텐트를 찾기는 힘들었다. 골짝에서 너럭바위를 지나 폭포 아래를 건너 집채만 한 바윗덩이를 돌아야 내 텐트가 있었다. 바위에 덧대어지어 놓은 텐트는 비밀 아지트 같았다. 나는 만족했다. 집 한 채 건사하느라 녹초가 되어 텐트 속으로 기어 들어가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그곳은 적당히 오싹했고, 적당히 어두웠지만 혼자 사색하기엔 적격인 장소였다. 책을 보다가 심심하면 홀딱 벗고 소에 들어가 놀았고, 추워지면 나와서 밥을 지어먹었다. 라면도 끓여 먹고, 소주도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잠들기도 하고, 산타페를 끌고 나가 시장을 봐 오기도 했다.
그렇게 유유자적 즐기던 나만의 장소에 그녀가 나타난 것은 이삼일이 지난 후였던가. 그녀가 목욕을 하고 사라진 날 나는 그 소에 이름을 붙였다. ‘천사의 목욕탕.’ 천사의 목욕탕에 들어가 앉으면 내 몸을 휘감는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나는 번번이 백일몽을 꾸었고 사정을 했다. 최근 아내의 적극적인 공세에도 오그라들기만 하던 남성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솟았다. 나는 혼자 웃고 혼자 노래하고, 혼자 춤췄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물소리가 내 목소리를 받아 안아서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사람이 들릴 때도 있지만 낭떠러지를 내려 올 엄두를 못 내고 물러났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낭떠러지를 오르내릴 수 있도록 길을 냈다. 너럭바위 옆으로 비스듬히 홈을 파서 계단을 만들고 나무에 줄을 매어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길 덕분에 용기를 낸 사람들이 한 두 팀 들어와 물가에 앉아 놀곤 했지만 오래 견디지는 못했다.
여긴 이상하게 춥고 음침해. 무서워서 오래 못 있겠어. 우리 저 아래로 자리를 옮기자. 물도 너무 차다. 못 들어가겠어. 꼭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 같아.
그들은 숲 모기에게 뜯기다가 진저리를 치며 밝은 곳으로 사라졌다. 그들에게 나도 내 텐트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그녀만이라도 나를 봤으면 좋으련만 그녀조차 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진짜 내가 투명인간이 되었나? 숲 밖에 나가 산타페를 세워 둔 곳으로 가서 그 옆에 진을 친 사람들 사이로 일부러 들어가 인사를 한 적도 있다.
안녕하십니까? 피서 오셨어요?
예. 여기 물이 참 깨끗하고 차가워요.
분명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었지만 그 골짝에만 들면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좋았다. 내 부재가 길어지자 아내는 수시로 전화를 해 왔지만 내가 숲 밖에 나왔을 때만 통화가 가능했다. 숲 안에 들어서면 물소리가 자동으로 전화기를 차단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윤 선생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이곳에 온 지 달포가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이 무릉도원에 빠져 하루를 살다 나오니 십 년이 흘렀더라는 말을 이해했다. 달포가 내 기억에는 삼사일 정도 흐른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그녀를 두고 숲에서 나왔었다. 숲 밖은 단풍이 자굴산 중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산타페는 먼지를 뽀얗게 덮어쓰고 혼자 외로이 서 있었다.
나는 다시 ‘천사의 목욕탕’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편하고 좋다. 태초에 내가 태어난 안태 봉이 여기 아니었을까. 그녀는 내가 온 것을 알까.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일 년 사이 그녀의 마음이 변해버렸을 수도 있다. 신전 동네에는 그런 처녀가 없다고 했었다. 어쩌면 외지에서 잠깐 아랫마을 곡소나 행정, 상리, 하리 마을 누군가의 집에 다니러 왔던 처녀는 아니었을까. 그녀 때문에 낯선 동네 이름도 파악했다. 왜 그 많은 날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떠나는 날에야 작업을 걸어온 것일까. 내가 젊지도 않고, 유부남이란 것도 알만한 처녀가 얄궂어라.
물에 누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드러운 물결이 발가벗은 전신을 어루만졌다. 꼭 그녀가 만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전신이 얼얼할 정도로 얼어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숲은 어두웠다. 물에서 나와 너럭바위에 걸쳐 놨던 수건을 찾아 몸을 대충 훔치고 꽉 잠가놨던 텐트의 출입구를 열었다. 혹 뱀이나 지네 같은 것이 침범할까 봐 손전등과 에프킬라 한 통을 출입구 쪽에 챙겨 놨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더듬거리며 손전등을 찾았다. 불을 켰다. 텐트 안으로 불을 비추는 순간
어헉!
나도 모르게 뒤로 벌렁 넘어져 주저앉았다. 텐트 속에는 그녀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지난여름에 봤던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채 맨발의 그녀는 팔베개를 하고 곱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짓고 손전등을 텐트 밖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코펠을 꺼내 라면을 끓였다. 추울 때는 뜨거운 라면이 제격이다. 반찬도 필요 없이 먹으면 금세 속이 풀리는 라면, 누가 만들었는지 기찼다. 아니, 고마웠다.
맛있겠다. 설마 아저씨 혼자 드시려는 건 아니죠?
처녀가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남의 텐트를 침범해 잠자는 그대는 누군가?
아저씨 오기만 기다렸어요.
내가 무섭지도 않아? 더구나 밤이 됐는데. 집에 어찌 갈래?
집 나왔어요. 아저씨처럼. 나 재워주실 거죠?
침낭이 한 개뿐인데 어쩌누? 밤에는 추운데.
한 침낭 두 사람이면 더 따뜻하겠다.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이장백 나이는 59살 원숭이 띠 그대는?
나는 블루엔젤, 이백 이십 살, 무슨 띤지 몰라.
푸른 천사? 거짓말 안 하기, 진짜 이름이 필요해
진짜 블루엔젤
아무러면 어때, 이름이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라면을 먹고 손전등을 켜 놓고 만화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몸이 되어 침낭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남자가 된 이후 손에 꼽을 정도의 여자랑 자 봤고 아내랑 30년을 줄기차게 잤지만 태어난 이래 그런 경험은 처음 했다. 열락의 도가니란 말을 이해했다. 그녀의 몸이 그랬다. 밤새도록 엉켰다. 이십 대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땀을 흘린 후면 천사의 목욕탕에 뛰어들었다. 천년 비아그라를 푼물인지 거기서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숲이 환하게 열리고, 지나가는 차량 소리가 요란할 즈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코펠에 밥이 고슬고슬하게 지어져 있고 납작한 돌 위에 아내가 만들어준 반찬이 가지런히 나와 있었다. 나는 우렁이 각시를 얻었다. 날마다 행복하다. 그녀가 물 위를 걷는다. 천사의 목욕탕은 빙판이 된다. 천사는 빙글빙글 춤을 춘다. 나는 그 춤에 빨려 들어간다. 행복하다. 시간도 잊고 밤과 낮도 잊었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안녕이라고.
정희는 남편과 아버지를 부르다 지쳐 돌아온 여자와 청년에게 노트를 건넸다.
집으로 가세요. 여긴 그들만의 낙원이니까. 이대로 두고 그냥 가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