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가 먹어버린 사과

(단편소설 1부)

by 박래여

<단편소설>


쥐가 먹어버린 사과


1. 전화를 받다


너는 전화를 했다.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어. 누군데? 명순이, 나 명순이야. 명순이? 나는 머릿속을 굴린다. 이명순, 박명순, 강명순....... 내가 아는 명순이가 대여섯 명은 된다. 어떤 명순이지? 강명순. 어디 사는? 너 참 똑똑했는데. 왜 그렇게 멍청이가 됐어? 완전 시비조다. 전화 잘못하신 것 같네요. 나는 전화를 끊는다. 다시 전화벨이 바리바리 울린다. 나는 전화를 받는다. 밤머리재 명순이 몰라? 그제야 머릿속이 환하게 열린다. 빔머릿재,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그럼 너, 강명순? 그래, 강명순이다. 오랜만이다 야.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 니는 내 사는 걸 몰라도 나는 니 사는 걸 손바닥 안처럼 훤히 안다. 어떻게?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으니까. 말도 안 돼.


너는 삼십 년 만에 옛 친구에게 전화를 해 놓고 대뜸 염장부터 지른다. 왜 내가 너의 인생을 망친 것일까. 오십 고개를 겨우 넘겼는데. 남은 오십 고개가 있는데 벌써 인생을 망쳤다니 나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중에도 없다. 너의 말만 쏟아낸다. 그 인간 때문이다. 그 인간을 왜 나한테 넘겼어? 니가 꿰차야지. 왜 나냔 말이야. 누굴 말하는 거니? 나는 정중하게 묻는다. 그 인간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알게 말 좀 해라. 김상기 몰라? 김상기? 모르겠는데. 너 참 한심하다. 너는 기억도 못하는데 그 인간은 평생 너를 품에 안고 살더라. 그렇다 치고 김상기가 어쨌는데. 너는 목소리가 갈라진다. 악을 쓴다. 그 인간이랑 결혼해서 30년을 산다. 허깨비를 안고 삼십 년을 살았다. 너는 침을 튀긴다. 내 얼굴에 허연 침이 막 달라붙는 것 같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왜 상관이 없어? 너를 못 잊겠다는데. 무어? 말도 안 돼. 말 안 되는 줄은 나도 안다. 알면서 왜 전화를 했어? 너도 알아야 하니까. 나만 고통받을 수 없잖아. 그건 더 말이 안 되네. 전화 끊자. 끊지 마. 너는 악을 쓴다.


나는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다 말고 다시 귀에 댄다. 참, 순아! 나는 너를 다정하게 부른다. 너는 멍하다. 기억나니? 너의 아버지 제사 파지 날이라고 했었지. 너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잔 날 말이야. 너의 엄마가 주신 새빨간 사과 두 개, 한 개는 너랑 나누어 먹고 한 개는 우리 할머니 주고 싶다고 머리맡에 놔뒀다가 밤새 쥐가 먹어버린 사과 말이야. 기억나? 너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지금 사과가 문제니?라고 너는 말한다. 너라는 것을 안 순간 내겐 그 사과만 떠오르는 걸. 그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이었어. 너는 피식 웃는다. 흰소리 그만해라. 너의 목소리에 살기가 빠진다. 미안하다. 내가 돌았나 봐. 늘 궁금했어. 그제야 너 같다. 까맣게 잊고 산 세월이 눈앞에 선다. 어린 9년을 알고 지냈던 친구 명순이, 또 전화할 게. 너는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나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백일몽인가. 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뱅뱅 돈다. 이제 생각난다. 어릴 적 너의 모습이 떠오른다. 너는 겉으로 보기엔 새침하고 얌전한 아이였어. 친구들 속에 묻히면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또래보다 성숙했지. 혼자 있으면 돋보이는 아이였어. 가슴이 풍만하고 엉덩이가 빵빵했어. 선생님들도 너의 앞에서는 눈 둘 곳을 몰라했어.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 신체검사 날이었어. 그때는 풀데 죽만 먹는 아이들이 수두룩해서 여자애라도 가슴이 나온 애가 없었어. 얼굴에 허옇게 마른버짐이 피고, 팔다리에 온통 부스럼딱지가 앉은 아이들이 태반이었어. 남자애는 원형 탈모증에 걸린 애도 많았어. 바리깡(손으로 작동하는 이발기) 머리를 깎아서 기계독이 올라서 그렇다고도 했지. 너는 우리들 속에서 독보적이었지. 활짝 핀 달리아꽃 같았어. 밋밋한 가슴을 가진 우리는 부끄러움을 몰랐지만 가슴이 볼록하게 솟은 너는 부끄러움을 알았어. 남자선생님이 웃통을 벗으라고 해도 너는 끝내 거부했어. 덕분에 우리는 운동장에서 땅에 머리 박고 뒷짐 지는 벌을 섰지만 너는 혼자 교실에 들어가 신체검사를 했어. 신체검사를 하고 나오는 너의 볼이 잘 익은 사과 같았지.


너는 외톨이는 아니었어. 여자 친구는 없었지만 남자친구는 많았어. 너는 또래보다 두 살이 많았어. 중학교 들어가 한 반이 됐을 때 공교롭게도 한 책상을 썼었지. 너는 살그머니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날 언니라고 불러. 너보다 두 살이 많아. 비밀이다. 소문내면 너 나한테 죽어. 나는 너의 눈을 봤어. 눈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것이 독종 같았어. 어쩐지 또래보다 키가 크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하다 싶더라. 공부는 중간 정도 했을까. 너는 겉보기엔 참 얌전했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에 딱 맞는 아이였어. 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가 있다고 소문났었어. 키가 훤칠하게 크고 여드름이 숭숭 났던 남자애, 또래보다 성숙했던 남자애, 그 애 이름이 김상기였나? 아니었어. 그 애는 조중구 아니었나. 조중구를 나는 기억한다. 은근히 짝사랑했던 남자애니까. 1960년 대, 그 시절 깡촌의 면소재지에서 남녀 공학인 초등학교를 거쳐 같은 중학교를 간 세대는 이해할 것이다. 조중구는 초등학교 때도 전교 회장이었다. 또래보다 목 하나는 더 컸던 애, 공부는 전교생 중 중간이었지만 약간 껄렁하고, 주먹깨나 치고, 말주변이 좋아 인기를 끌었던 애, 그 애가 공공연하게 너랑 키스했다고 나발을 불고 다녔지. 그때마다 너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깡패 같은 새끼라며 새침해져서 고개를 돌렸었지.


아, 그래, 생각난다. 너는 뒤로 호박씨 까는 아이였어. 너의 어머니가 바느질 수선을 한다고 했지. 감색 교복치마를 반이나 접어 올려 짧게 입고 다녔었지. 윗도리도 허리가 잘록하게 만들어 가슴이 풍만하게 보이게 입었지. 남자애들은 너만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었어. 너는 빈대 겨우 면한 내 가슴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여자애들은 너를 볼 때마다 뒤에서 수군거렸지. 저 애 가슴 큰 것 좀 봐. 남자가 만지면 젖이 자란대. 중구는 저 애 젖을 저녁마다 주무른대. 학교도 같이 다니잖아. 중구가 밤마다 저 애네 집 담벼락에 붙어 휘파람을 분대. 둘이 강가에서 껴안고 있는 걸 본 애들이 있대. 너는 친구가 없었어. 외톨이었지. 나는 그런 너를 적당히 흠모했어. 뭔가 있는 애 같았거든. 뭔가 속이 꽉 찬 것 같은 느낌말이야. 어쩌다 우리가 단짝이 되었지? 아, 그 사건 때문이었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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