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부>
2. 추억은 아름다워
아마, 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을 게야. 푸른 들판이 누렇게 변하고, 길섶에는 분홍빛 이질풀 꽃이 도발적으로 피고, 아이들이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꿰어 뛰어다닐 때였어. 토요일이었어. 토요일은 괜히 가슴이 설레는 날이잖아. 공부는 강물 따라 흘러가는 종이배가 되고, 아이들은 수업 끝날 때만 기다리지. 어른이 더 아이들을 기다리는 날인지 몰라. 고구마도 캐 들여야 하고, 타작도 해야 하고, 이삭도 주워야 하고, 도토리도 주워야 하니까.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 너는 딱지처럼 접은 쪽지를 내게 줬어. 쪽지를 폈지. ‘저녁에 명주 골 정자나무 아래서 기다릴게. 조중구.’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너를 빤히 봤어. 너는 가만히 웃고 고개를 돌렸어. 장난하는 거야? 내가 물었어. 너 중구 좋아하잖아. 내가 다리를 놨어. 너는 눈도 깜짝 않고 말했어. 말도 안 돼. 중구가 좋아하는 애는 너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하지만 너는 한 마디 변명도 안 했잖아. 소문의 진실에 대해서. 할 필요 없어. 저거 맘대로 찧고 까불라지. 관심 없어.
너는 물었어. 올 거지?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어. 거긴 너무 머니까. 밤에 나갔다간 혼나. 아버지는 여자가 밤에 마실 나가는 것을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큰 언니가 아버지 출타한 틈을 타서 엄마에게 명주 골 친구 집에 간다고 나갔다가 아버지께 들켰다. 하필이면 우리 동네에서 밤머리재를 넘는 길옆에 있는 다랑이 짚동 새에서 아랫집 현수 오빠랑 나오다가 명주 골에 다녀오던 아버지께 딱 걸렸었다. 우리 동네에서 명주 골은 멀었다. 밤머리재 넘어가 명주 골이고, 밤머리재 아래가 우리 동네인 실골이었다. 조중구가 사는 명주 골 친구 집에 간다던 언니는 부모를 속이고 아랫집 현수 오빠랑 동네 들판의 짚동 새에서 연애질을 했던 것이다. 열여덟 살 언니의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던 머리카락이 뒤통수에서 잘려 달비 장사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언니께 조용히 말했다. 한번만 더 현수를 만났다가는 삭발을 시켜 뒷방에 유폐시키겠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어른이다. 일 년 생 산죽 대를 곱게 다듬어 시렁에 얹어 놓은 아버지다. 자식이 잘못되는 것은 집안 우사이기 전에 부모 잘못이라고 당신 다리에 피가 맺히도록 회초리질을 하는 어른이다. 아랫집은 빨갱이 집이라고 했다. 빨간 줄이 그어진 집 아들은 독립운동가 집안과 얽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도 했다.
독립운동가 집안, 맞을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께서 삼일 만세 운동 때 동네 사람들을 소집해서 태극기를 들고 저잣거리로 몰려나갔다는 것은 안다. 몽둥이를 들고 경찰서에 들어가 사물함이고 서류고 작살을 내고 유치장에 갇혔다가 풀려 난 전적이 있다. 동네 순사도 할아버지에게 벌벌 떨었다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시절이었으니 이해는 하지만 아버지가 목에 힘을 줄 정도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것은 유치하다.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국적으로 삼일 만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할아버지는 경찰 서장과 너나들이할 정도로 친분관계였단다. 껄렁패 몇 명 데리고 다니며 순경나리 앞잡이는 아니었을까. 할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깎아내린다고 무엇이라 할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그 시절엔 역적이 충신 되고, 충신이 역적으로 몰리던 시절이었으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 뿐이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지만 기갈이 세고 막가파였다. 할아버지에 얽힌 무용담은 참 많다. 지리산에 호랑이가 인근 동네에 내려와 소를 물고 간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고, 밤만 되면 문을 꼭 닫고 마실조차 못 다녔다. 경찰서 순사와 할아버지 떨거지들로 구성된 사냥꾼이 범을 잡으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사흘 만에 할아버지는 장터목 아래 통신 골에서 호랑이를 만나 씨름을 했고, 할아버지 주먹 한 방에 호랑이가 나가떨어졌다. 할아버지는 축 늘어진 호랑이를 등에 지고 금의환향했다니. 믿거나 말거나.
삼일만세 사건 덕에 할아버지는 마을 불한당에서 애국자가 되었고, 후일 삼일독립운동가로 추대되었다. 유관순 언니 덕이다. 역사가 아무리 바뀌어도 유관순 언니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평생 독립만세 부른 유관순 언니로 남아 있듯이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을 빛낸 독립운동가 선생님이다.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이승만 집권이 시작되었을 당시 아버지는 혈기 왕성한 이십 대였다. 봇짐장사를 했다. 자연히 집에 있는 시간보다 도시로 농촌으로 발품을 팔면서 돌아다니게 되면서 불온사상도 접하고, 애국지사도 만났다.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에 들었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부자간의 의를 끊자고 할 만큼 대차게 대한 청년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뺐다. 봇짐장사도 때려치우고 가솔이나 돌보면서 땅 떼기나 파라고 하더란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흔들리는 시대에는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이 상책이라 하셨단다. 작은 땅덩이를 놓고 노선이 다른 대국이 서로 먹겠다고 음모술수가 판을 칠 때였으니 아버지까지 앙급지어당할 필요가 없다 하더란다. 할아버지는 꼴뚜기가 뛰든 메뚜기가 뛰든 당하는 입장이 민초란 것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아마도 기골이 장대한 할아버지를 닮지 않고 곱상하고 작은 할머니를 닮은 아버지가 할아버지 눈에는 반도 안 찼던 것은 아닐까. ‘쯧쯧 남자가 제럽데기 맹키로 비쩍 골아서 오데 힘이나 써것나. 남자가 말이야 맷집이 좀 있어야지.’하셨다니. 삼대독자 외아들이 정치노선에 나섰다가 집안 문 닫을까 봐 못하게 말리셨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누구든 할아버지께 한 번 걸렸다 하면 곤죽이 되었다니 동네 사람들도 할아버지 말이라면 뒤탈이 무서워 설설 기었단다. 입만 열었다 하면 육도문자요. 술 한 잔 걸쳤다 하면 선술집이 난장판이 되었단다. 남의 등 잘 쳐 먹고, 동네 유지 영감 찾아가 행패 부려 돈 뜯어내고, 삼이웃 예쁘장한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며 어떻게 한 번 새끼줄을 엮어 볼까 상낸 수컷이었던 할아버지가 졸지에 독립운동가가 되고 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입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독립운동가 집안과 빨갱이 집안이 엮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니. 현수 오빠와 조중구는 같은 조 가였다. 조 가를 순 쌍것들, 축생으로 여기는 아버지였다.
내가 머슴아, 그중에 성 씨가 조가인 머슴아를 만난다는 것을 알면 난 모가지다.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연애질부터 배워? 가문의 수치다. 아버지의 노기 어린 얼굴이 코앞에 닥쳤다. 아버지 때문에 안 되겠어. 그리고 좀 있으면 기말고사잖아. 난 공부해야 해. 숙제도 많잖아. 너는 내 말을 툭 잘라버리고 말했어. 너는 좋겠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나는 그런 아버지라도 있으면 좋겠다.
너는 진짜 부러워했어. 너의 얼굴에는 아버지 없는 아이의 부러움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 나는 미안했어. 그래 갈게. 하지만 아버지 허락을 받으려면 네가 와야 해. 알았어. 학교 끝나면 집에 갔다가 너에게 갈 게. 너의 얼굴이 환해졌어. 나는 생각했지. 이게 잘하는 짓일까. 왜 조중구가 나를 만나려 할까. 너의 가슴을 저녁마다 주무른다는 그 애가 하필 나를 찍었을까. 뭔가 둘 사이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상했다. 너와 조중구 모습을 연상하면 내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얼굴에 불이 났어. 너와 조중구가 입술을 합치는 상상만 해도 다리가 떨려. 너의 가슴을 주무르는 조중구, 너의 팡파짐한 엉덩이를 만지는 조중구, 현수 오빠를 따라 도망가 버린 언니,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고 벼르는 아버지.
너는 발그레 물든 단풍잎을 달고 왔어. 단풍잎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너, 요정 같았어. 아버지는 단번에 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처니가 한남 띠 딸이야? 예, 너는 다소곳했어. 마치 선보는 처녀 같았지. 바느질하는 밤머리재 한남 띠 딸이가? 엄마가 또 물으셨지. 예, 너는 참 얌전했어. 축담에 오른 너의 앞에 엄마는 삶은 고구마를 내놓고, 아버지는 장롱 위에 고이 모신 귀한 꿀단지를 꺼내 꿀물을 타라고 했지. 곱기도 해라. 우리 영이랑 친구라고? 우리 영이는 영 얼라 티가 나는데. 옷이 참 예쁘구나. 엄마가 말했어. 엄마가 지어 주셨어요. 너는 바느질 솜씨 좋은 엄마 자랑을 했지. 나는 바느질 솜씨 없는 엄마가 얄미웠어. 나도 저렇게 나비날개같이 예쁜 옷을 입고 싶다고.
저 오늘 영이랑 같이 우리 집 가서 공부하면 안 될까요? 숙제가 많은데 영이는 공부를 잘하잖아요. 영이한테 공부 좀 배우려고요. 제가 영어와 과학이 좀 떨어져요. 우리 엄마는 허락했는데. 엄마는 영이랑 친하다니까 참 좋아해요. 영이 아버님과 어머님께도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고맙기도 하지. 지난번에 우리 영이아부지 모시적삼을 올매나 꼼꼼하게 잘 맹글었던지. 여름 내내 참 시원하게 잘 입는단다. 영이야, 저물기 전에 퍼떡 가거라. 밤머리재까지 갈라모 서둘러야겠다. 나는 속으로 우리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했어. 너랑 같이 가고 싶지 않았거든. 더구나 너의 집에서 잔다니. 나는 그때 한창 명작에 팔려 있었어. 너는 알 거야. 교과서 밑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펴 놓고 읽었던 나를,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오랑 같은 여자가 우리 엄마라고 눈물 짜던 나를 기억할까. 샬롯브론테의 『제인에어』에서 제인에어를 닮고 싶어 한 나를. 그런데도 나는 말 한마디 못했어. 왜냐면 너의 눈빛이 나를 꼼짝 못 하게 했으니까.
허락하신 거예요. 영이야 책가방 챙겨 빨리 가자.
너는 물이 흥건한 배를 한 입에 베어 문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말했어. 어쩜 말도 그렇게 잘하니? 학교에서 봤던 너와 우리 집에서 보는 너는 진짜 달랐어. 너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아주 친한 척 굴었어. 속에서 우웩! 구역질이 나려고 하더라. 너 아니, 내가 별로 너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 너와 조중구가 그렇고 그런 관계여서만은 아니야. 모범생이자 공붓벌레였던 나는 너의 넘칠 것 같은 끼를 질투했어. 모든 남자애들의 선망의 대상인 네가 싫었어.
어쨌든 나는 너를 따라갔어. 너의 집에서 먹은 저녁은 참 맛났어. 너의 엄마 음식 솜씨는 진짜 좋았어. 김치 국이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거든. 너의 아버지가 경찰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너의 아버지는 산청군 경찰서에 근무했다고 했어. 1963년 망실공비로 분류되었던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토벌 작전이 벌어졌을 때 공비가 쏜 총에 맞았다고 했어. 그때 서너 살이었던 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너, 너의 아버지 사랑은 거기서 끝나버렸지만 너의 가슴에 살아있는 아버지는 무척 자애롭고 다정다감했다고 기억하지.
저녁에 우리는 명주 골로 향했어. 달빛이 참 푸지게 좋았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를 따라오는 달빛을 나는 황홀하게 바라봤어. 어떤 인위적인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으슥한 작은 동네, 명주 골 오르는 산자락 길옆에 있는 늙은 느티나무는 그 길을 오가는 나그네의 쉼터였어. 길은 명주 골에서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실골로 향했어. 느티나무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공터를 다듬어 놨고, 띄엄띄엄 반반한 돌을 깔아놨었지. 시월 중순이면 첫눈이 온다는 지리산 자락은 밤이 되면 추웠어. 나는 너의 겨울 잠바를 걸치고 있었지. 느티나무 아래 불빛이 보였어. 그들이 촛불을 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조중구 혼자 나오는 거야?
아니, 중구 친구랑 둘일 거야.
그 친구가 누군데?
너는 몰라. 도시에 살거든. 주말이라 자주 놀러 와. 중구랑은 동갑이고 외사촌이야.
너는 그 애를 잘 아는 것 같네.
잘 알아. 사실 그 애가 널 보고 싶어 해서.
날 알아?
잘 아는 것 같던데. 아마 중구가 말했을 거야.
느티나무 아래 촛불 다섯 개를 켜 놓고 우린 빙 둘러앉았어. 중구와 너는 자연스럽게 짝이 되었고, 나는 그의 어색한 짝이 되었지. 우리는 촛불에 찬 손을 녹이며 너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수시로 깔깔 터지는 웃음보를 자제하지 못했어. 너와 중구는 참 자연스럽게 손뼉을 마주치며 가위바위보 놀이를 했고, 서로 이마에 알밤을 퉁기며 어울렸지. 학교에서 보던 너랑 거기서 본 너랑 같은 아이란 것을 믿을 수 없었어. 그와 나는 슬쩍 곁눈질만 하며 웃기만 했어. 눈치가 백 단인 네가 모를 리 없었겠지. 우리 고매 삶은 거 뚱치 올게. 중구 엄니가 고매 삶아 놨단다. 그동안 두 사람 좀 친해봐라. 영이야, 상기가 오래전부터 너를 짝사랑했단다. 상기야, 소원성취 했으니 우리 없는 사이 잘해 봐. 너는 장난 끼가 발동했는지 촛불을 후 불어 끄고 중구 손을 잡고 깔깔 거리며 동네로 멀어져 갔어. 그래, 그 머슴아가 김상기였어. 달빛이 왈칵 달려들더라. 달빛은 느티나무 그늘을 침범하지 못하고 명주 골 다랑이를 비추었어. 나락을 벤 다랑이나 아직 나락이 서 있는 다랑이나 어쩜 그리도 아름답니. 풀벌레조차 숨을 죽이더라. 두근거리는 내 가슴이 무서웠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다음으로 남자랑 같이 있었으니 얼마나 겁났겠니. 어쩌면 겁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을까. 나는 그 애가 싫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어. 여드름이 숭숭 난 얼굴에 어른스러워 보이는 머슴아, 겉늙어버린 아랫집 현수 오빠 같았거든. 사실 나는 네가 부러웠어. 중구랑 손잡고 멀어져 가며 너의 뒷모습, 그 손을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나였거든. 나는 내 옆에 앉은 머슴아의 숨소리가 거슬려서 그 애 곁에서 뚝 떨어져 앉았어. 바람이 불 때면 나뭇잎이 떨어져 어깨에 앉곤 했어. 나는 난간에 앉아 다리를 까딱이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어. 성글어진 느티나무 가지사이로 본 하늘은 청회색 바다 빛이었어.
그런데 말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참말로 조석변이가 아닌가 싶어. 조중구에게 쏟아지던 내 마음이 나도 모르는 새 그 애에게 쏟아졌거든. 계기야 물론 그날 밤이야. 너랑 중구를 기다리며 둘이 말없이 앉아 있었어. 그 애는 말이 없었어.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 애가 다가와서 내 옆에 앉았어.
나랑 있는 게 별론가 보네.
아니.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할 말이 없으니까.
지난봄이었어. 중구를 따라 너의 학교에 놀러 갔을 때야. 벚꽃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던 너를 봤어. 다른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노는데 너는 책에 푹 빠져 있더라. 중구에게 누구냐고 물었지. ‘아, 저 애? 우리 학교 범생이. 전교 일 등짜리야. 책벌레지.’라고 말했어. 내게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너는 남학생에게 관심 없는 애라고 했어.
그랬어? 잠깐, 그럼 너 나에게 편지했니?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제야 나는 그 애를 다시 봤어. 나는 가끔 편지 한 통을 받았어. 편지는 별게 없어. 첫 줄만 이랬어. 너를 생각하며. 내용은 늘 톨스토이의 인생론에서 한 줄 따다 놓은 것이거나 릴케의 시 한 수였지. 가끔 윤동주나 한용운, 조지훈, 김소월, 바이런의 시도 적혀 있었어. 그런데 보내는 사람 주소가 없었어. 편지는 내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어. 누가 이런 짓을 할까. 궁금했었지. 나 외엔 별로 책벌레가 없었거든. 그런 시인의 시를 읽을 만큼 유식한 남학생이 내 주위엔 없다고 믿었거든.
이해가 안 돼. 우표가 붙지 않고 도착한 것이었는데. 너는 아니야.
중구가 심부름을 해 줬어.
그랬구나. 그렇게도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 애는 가만히 내 어깨를 감쌌어. 그리고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외우더라.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어. 시인, 얼마나 멋지니. 어쩐지 그 애가 어느 별에서 온 어린 왕자 같았어. 황홀했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어. 감미로운 바람이 싸싸 불어왔어. 어깨를 감싸던 그, 살짝 고개를 돌리는 찰나 마주친 입술, 온몸을 꿰뚫고 가는 첫 키스의 날카로운 전율, 온몸의 기운이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지. 그때까지 난 남자와 키스해 본 적이 없었거든. 우리는 그렇게 한 덩이가 되어 가만히 있었어. 멀리서 너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 그날 밤 나는 둥근 보름달이 왜 아름다운지 알게 됐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