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쥐가 먹어버린 사과

<단편소설 끝>

by 박래여

3. 늙어가는 우리


며칠 후, 너는 다시 전화를 했어. 그 인간이랑 헤어질 거라고 했어. 너는 너희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면 절반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했어. 나는 웃었어. 무슨 그런 억지가 있니. 뜬금없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네가 30년 만에 전화해서 할 수 있는 소린지 모르겠다. 너는 내가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더군. 그런 인간과 헤어지게 해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어. 그래 고맙다. 눈물 나도록 고맙다. 그러니까 이런 전화도 하지 마라. 장난 전화라면 더더욱 사절이다. 난 너희들 둘 다 잊은 지 아주 오래됐는데. 나를 가운데 두고 싸웠다니 심히 불쾌하네. 나는 진짜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어.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새삼스럽다 야. 도대체 모르겠다. 네가 내게 전화해서 너희들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너는 잊었다고 말할 수 있니? 내 삶의 곳곳에 네가 있는데. 너 때문에 내가 당한 고통이 얼만데. 너 때문에 이혼까지 생각하는 난데. 너는 양심도 없어. 너로 인해 망가져버린 나를 어떻게 잊었다고 말하니?


너는 불 같이 화를 냈어. 너의 화난 목소리를 듣자 생각나는 것이 있더군. 조중구의 자살이었어. 네가 시집간 지 한 달 후였던가. 중구는 밤머리재 느티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어. 왜 자살했을까. 아무도 중구가 왜 자살했는지 몰랐지만 나는 알 것 같았어. 중구는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 너는 중구를 죽인 거야. 어쩌면 상기와 너, 두 사람이 중구를 죽인 셈인지 몰라. 상기와 내가 사귀는 동안, 너는 나를 질투했었지. 상기의 편지를 보여주면 너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숨을 할딱이곤 했어. 어쩜 이렇게 편지도 잘 쓰니? 진짜 너를 사랑하나 봐. 나도 이런 연애편지 받아보고 싶다. 너희 둘은 참 잘 어울려. 상기는 진짜 남자야. 그러던 네가 날 찾아왔어. 그날 밤 기억하니? 우리가 걸었던 실골 골 안의 너른 강변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며 우리는 자갈밭을 걸었어. 자갈밭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물결 위에 물수제비를 떴던 그날을, 은파로 반짝거리며 흐르는 강물 우는 소리를 기억하니? 나는 상기가 있는 T시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한껏 들떠 있었지. 상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진짜 행복했어. 너는 그 행복에 찬물을 끼얹었지.

난 못 가

왜? S여고에 합격했잖아.

결혼해야 할지 몰라.

에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너보다 두 살 많다고 했잖아.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이를 가졌어.

세상에....... 중구니?

아니, 상기야.


나는 망부석이 되었어. 네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못 했어. 나는 상기에게 절교장을 보냈어. 상기는 나를 찾아와 만나기를 요청했지만 나는 만나지 않았어.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는 읽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어. 나는 T시의 S여고로 가지 않고 2차로 Y시의 R여상을 갔지. 전액 장학생으로 가게 된 것이 기뻤어. 상기도 너도 잊기로 했던 거야. 청춘의 한 때는 아름다웠다고 나름대로 첫사랑의 이별을 미화하면서 말이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진실을 알았어. 상기는 내가 왜 마음이 변했는지 알고 싶어 너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고, 너는 상기를 품어주며 은근슬쩍 나를 나쁜 여자로 몰았어. 사랑할 가치도 없는 애라고, 내가 중구를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했더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상기를 다시 만나고 싶어 애가 탔었어. 너에게 중간에서 다리 좀 놓아달라고 어려운 부탁도 했지.


그런데 들려온 소문은 네가 상기랑 결혼한다는 거였어. 고등학교 2학년 짜리가 학교를 중퇴하고 시집을 간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 진짜 너는 상기의 아내가 된다는 거야. 그해 겨울 방학 때 너를 찾아갔었어. 기억하지? 우리가 만났던 밤머리재 느티나무를. 아직도 그 느티나무는 살아 있는 줄 알아. 허리가 더 굵어지고, 평수가 더 넓어졌지만 느티나무는 밤머리재와 명주골과 실골 사람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며 서 있어. 속울음 삼키며 돌아서던 나를 바라보던 느티나무도 어느새 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때 너와 나눈 대화는 기억나. 너는 말했어. 아주 당당하게.


내가 진짜 좋아한 남자는 김상기야.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그 애를 사랑했어. 상기가 너를 먼발치에서 보고 좋아하게 됐다고 다리를 놓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상기는 나와 중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 믿었던 거야. 하지만 난 아니었어.

우리 모두 너희 둘이 진짜 사귀는 줄 알았는데.

아니, 중구가 나를 좋아했을 뿐이야.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더군.

그런데 너는 안 좋아했다?

그래, 난 상기를 좋아했어. 아니, 사랑해.

중구도 이 사실을 알아?

내가 말했어. 우린 절대로 안 되는 사이란 거 알지 않느냐고.

왜 안 돼?

그건 비밀이야.

상기도 알아?

나는 그 애 아이를 가졌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는 겨우 열여덟 살이야. 한창 피어나는 청춘이라고.

내겐 상기와 아이와 결혼이 중요해.

너는 진짜 당당했어. 볼록하게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에 내 손을 강제로 끌어다 댔지. 상기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이젠 상기를 단념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덧붙여서 이런 말도 했었지. 상기 부모님은 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더 좋아한다고. 상기는 4대 독자라고 했어. 연세가 많은 상기 부모님은 막둥이 아들이 빨리 장가를 들어 대를 이을 손자를 낳아주길 고대한다는 거야. 상기 어머님이 두 사람의 사주를 보러 갔더니 첫 애가 틀림없이 아들이라 했다지. 너는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고. 상기는 빨리 결혼을 해야 할 처지고. 너희는 천생배필이라고 했어. 너는 이렇게 물었어.

축하해 줄 거지? 너는 꿈이 높잖아. 지금 결혼할 처지도 아니고, 대학 가서 학교 선생님 하고 싶다며? 그 꿈대로 살면 너를 상기보다 더 사랑해 주는 새로운 남자도 만날 것이고, 상기는 금세 잊어버릴 거야.

그래, 축하할게. 잘 살아.


나는 손톱으로 느티나무를 박박 긁으면서도 웃으며 말했어. 진심으로 너희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줬어. 그래서 무거운 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고향을 떠날 수 있었는지 몰라. 그리고 중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왜 그랬을까. 후일 나는 확실하게 그 이유를 알았어. 네가 비밀이라고 했던 거. 너와 중구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했던 거. 너의 엄마와 중구 엄마가 시장 바닥에서 서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대판 싸웠다더군. 명주골부터 빔머릿재, 실골까지 쫘하게 소문이 퍼졌어. 그 이유는 별 것도 아니야. 쉬쉬 하던 소문이 당사자에 의해 겉으로 드러났을 뿐이지. 두 여자가 으르렁 거리며 했다는 말은 입담 좋은 촌로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떠돌았다더군.

남의 서방 꿰찬 년이 오데서 행패고?

너거 서방 좀 빌린다고 거기 닳았더나?

그래, 달아서 심도 몬 쓴다. 니가 진을 다 빼 무서 그렇제. 요 여시겉은 년아.

웃기지 마라. 너덜너덜해서 거시기가 들락날락해도 모르고 잠만 자는 년이 소박 안 만내는 것도 다 내 덕인 줄이나 알고 살아라.

두 여자의 옷고름이 떨어져 나가고 치맛말기가 찢어져 박꽃 같은 속살이 드러나고, 출렁거리는 젖통이 불거져도 부끄러운 줄모 모르고 싸움질을 했다는 거였어. 너의 엄니가 엎어져 버둥거릴 때 치마 말기가 풀어져 고쟁이가 밖으로 드러났고, 단속곳의 벌어진 틈새로 무성한 거웃이 어찌나 탐스럽던지 구경꾼으로 섰던 남정네들 침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꼴깍 했다는 우스개도 전해지더군.


그때, 중구 아버지가 나타났어. 게거품을 물고 싸우는 두 여인을 떼어내면서 중구 아버지는 중구 어머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너의 엄마를 껴안고 시장 안으로 사라졌다더군. 중구 엄마는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꺼이꺼이 울면서 ‘중구야, 불쌍한 우리 중구야, 니가 우째 죽었는지 내 모를 줄 아나.’하면서 서럽게 울었다지.


그리고 너를 까마득하게 잊었어. 우리 집이 Y시로 이사를 했기 때문일 거야. 오래전에 부모님도 다 돌아가셔서 고향 갈 일도 없어. 고향은 이제 마음속의 그리움일 뿐이야. 너로 인해 추억 속을 걸을 수 있어 나는 반가웠네. 내게 첫사랑은 그때 쥐가 먹어버린 홍옥 같은 게 아니었나 싶어. 달콤 새콤하고 아삭아삭 했던 참 귀했던 사과, 우리 할머니께 갖다 드리고 싶었던 그 사과 같은 것이었어. 쥐가 먹어버렸기에 더 애틋할 수도 있지만. 순아, 가능하면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 두 아이가 벌써 장가를 들었다며? 그럼 부부만 남았겠네. 이혼 같은 거 하지 마라. 요즘 세상에는 자식 소용없어. 부부가 마음 맞추어 살면 그게 행복이야. 나 때문에 속 썩었다면 미안해. 툭 털어버리고 둘이 마음 합쳐 봐. 너희 부부, 쥐가 먹어버린 사과 한 개 때문에 남은 인생 종칠 수는 없잖아. 황혼, 아름답게 마무리해야지. 이 세상에 나왔다 간 흔적은 흔적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잘 살아. 친구. <끝>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쥐가 먹어버린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