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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로망

<단편소설 처음>

by 박래여

<단편소설>

중년의 로망


비선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들고 슬리퍼를 찔찔 끌며 현관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혼자 놀던 엘리베이터도 신이 났는지 금세 출발이다. 손님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이용만 해 주면 좋단다. 비선은 엘리베이터 속에 있는 거울에 전신을 비춰본다. 얼굴이 푸석하다. 요즘 통 잠을 못 잔다. 뒤통수에 걸렸던 머리핀을 뽑았다. 출렁 내려오는 머릿결은 아직 싱싱하다. 비선은 머리핀을 입에 물고 긴 머리를 뚤뚤 말아 다시 뒤통수에 붙였다. 희끗한 잔머리가 이마를 덮었다. 잔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니 유난히 돋보이는 눈가의 잔주름과 눈 밑의 거뭇한 부분이 거슬린다. 다크 서클이라 하던가. 왜 한국 사람은 한국말 보다 외국말에 현혹될까. 비선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눈 주위를 자극해 본다. 머리를 확 잘라버려? 순간 이목구비가 뚜렷한 수범이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왜?

긴 머리가 어울려요.

늙어 보이잖아.

소녀 같아요.

보고 싶다. 비선이 중얼거렸다. 만나고 돌아서면 더 보고 싶은 사람, 도마 위에 오이를 놓고 썰다가도 멍청이가 되게 만드는 사람,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그립고, 바람 불면 바람이 불어서 그립다. 커피를 마시면 커피 잔 속에 들어와 앉고, 책을 읽으면 책갈피에 걸려 웃고, 잠자리에 들면 가슴을 포개며 웃는 사람.

치매 중증이야.

비선은 주먹을 쥐고 머리를 콩콩 때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보라색 아반떼 승용차에 올라 아파트촌을 벗어난다. 일부러 번화가를 벗어나 후미진 도시의 외곽지대로 향한다. 낡고 때 묻은 건물이 즐비하고, 오래되어 허름한 간판이 줄지어 있고, 예전에는 번창했지만 지금은 한산한 재래시장이 있는 곳, 반짝반짝 빛나지 않아 좋다. 어수룩해 보여 좋다. 싸구려 냄새가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곳, 비디오점이 눈에 띈다. 비선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비디오점에 들렸다. 최신 시디플레이어가 진열된 곳을 지나 역시 후미지고 먼지 냄새나는 곳으로 들어선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가 먼지를 덮어쓴 채 빼곡하게 꽂혀 있다.

비선은 롤리타를 찾았다. 하필이면 롤리타인가. 그녀는 젖소 부인도 뽑았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도 뽑았다. 비디오테이프의 겉면에 쓰인 요약된 짧은 내용을 눈으로 좇으며 눅눅한 먼지 냄새를 맡았다. 다시 비디오테이프를 제 자리에 꽂고 하나만 챙겨 카운터로 갔다. 다행히 비디오점에는 손님이 없었다.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비디오테이프를 카운터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봤다. 거리는 한산했다. 재래시장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좌판의 할머니도 하품을 한다. 먼지가 뽀얀 화장품 코너에도 아가씨 혼자 앉아 손전화만 쳐다본다. 손가락만 열심히 놀린다. 게임을 하는 것일까. 채팅을 하는 것일까. 시시각각 변하는 아가씨의 표정이 재미있다. 비선도 호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그것은 있으나마나 한 귀찮은 물건이었다. 남편이 걸어준 개목걸이에 불과했다. 수범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건 오래된 것이라 천 원입니다. 3일 후에 반납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연체료가 붙습니다.”

비선이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불쑥 나타난 남자가 말했다. 반쯤 머리가 벗어진 초로의 남자는 목소리도 권태가 잔뜩 끼어 단조로웠다. 울림이 없는 목소리였다. 비선은 지갑을 열어 천 원짜리를 꺼내 건네고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받았다. CD플레이어가 대세인 요즘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는 것이 수상한 듯 남자는 자꾸 그녀를 흘끔거렸다.

비선은 집으로 오며 줄곧 생각했다. 롤리타 콤플렉스에 대해서.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거세해야 돼. 사형시켜야 돼,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 등등, 한여름 땡볕에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지열처럼 군중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는 사건,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납치 및 성폭행 사건들, 그 가해자가 바로 롤리타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사람이란다. 어린 소녀에게 품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가리켜 롤리타 콤플렉스라고 한다는데. 비선은 집으로 들어와 비디오테이프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컴퓨터를 켜 인터넷을 뒤졌다. 롤리타, 19금, 성인인증 절차가 필요함. 다시 영화제목 롤리타를 쳤다. 위키백과에 있었다. 상세하게 내용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알고자 하는 만큼 알 수 있었다. 롤리타, 현재는 아동 성애 자를 이르는 대명사가 되어버렸지만 작가는 이 말이 자신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롤리타는 1955년 블라디미르 나보코보가 쓴 소설이 원작이다.

비선은 비디오테이프를 비디오에 넣고 재생을 눌렀다. 내레이션이 쭉 이어지고, 분수 아래 잔디밭에서 온몸을 적시며 책을 보는 어린 소녀 롤리타의 엉덩이가 둥글게 다가온다. 속이 아련하게 비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원피스 아래 요염한 유혹이 꿈틀거린다. 도화 살을 타고 난 여자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뭔가를 지닌다고 했다. 향기로운 꽃은 가만히 피어 있기만 해도 벌과 나비를 빨아들인다. 비선은 그를 그렇게 빨아들이고 싶다.

비선의 시선은 다시 창밖에 가서 머문다. 비디오테이프는 저 혼자 돈다. 창밖은 양쪽으로 벚나무 길이다. 벚나무 사이로 꼼지락꼼지락 날아가는 하얀 깃털이 보였다. 깃털은 살짝 아스팔트 위에 앉았다가 화들짝 놀란 듯 엉덩이를 뗐다가 다시 가라앉으며 점핑을 계속한다. 때로는 좌로 우로 굴렸다가 제 자리에 가만히 있기도 하는데 털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누가 저 깃털을 흔들리게 하는가. 가만히 보니 바람이다. 바람이 깃털을 희롱하고, 깃털은 바람을 희롱한다. 바람의 손길은 때론 부드럽고 때론 거칠다. ‘아아, 저것, 저 바람에 흔들리는 깃털이고 싶어.’ 비선은 속에서 열이 후끈 오른다. 끈적끈적 온몸에 진땀이 솟는다. 갱년기란 참 몹쓸 놈의 병이다. 중년 여자를 가지고 논다. 깃털은 비선을 조롱하듯 뒹굴뒹굴 굴러가다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날아간다. 비선은 망연자실 넋을 놓는다. 나도 저렇게 그의 품에 안겨 날고 싶다. 그녀의 시선은 깃털이 앉았던 자리를 떠나 건너편 들판으로 향한다. 거기 누르스름하게 변해가는 들녘의 소로를 따라 소년 소녀가 팔짱을 끼고 걷는다. 소녀의 단발머리와 소년의 짧은 머리가 꼭꼭 점을 찍는다. 우린 사랑해.

‘그래, 사랑해라. 참 좋을 때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 나지?’

비선은 중얼거리며 다시 비디오 화면에 눈을 맞춘다. 중년의 사내가 어린 소녀와 발가벗고 뒤엉켜 있다. 롤리타의 채 성숙되지 않은 육체에서 뿜어내는 정염이 뜨겁다. 소녀는 귀여운 생쥐다. 생쥐가 고양이를 가지고 논다. 아니, 쥐 나 개구리까지 곤충을 유혹해 잡아먹는 육식성 네펜시스 꽃이다. 정신차렷! 레드 볼이 날개를 달았다. 툭 튀어나온 광고 문장 하나가 비선을 몽환에서 깨어나게 한다.

딩동! 문자가 왔다. 비선이 진땀을 닦으며 손 전화를 찾아 문자를 연다.

‘저녁에 아름다운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수범’

비선은 뚫어지게 문자를 본다. 문자는 블랙홀이다. 무엇이든지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이다. 숨도 쉬지 않고 문자를 흡입한다.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적이 있던가. 가족 외에 아무도 모르는 전화번호, 개나 소나 다 가지고 다닌다는 손 전화를 비선은 한사코 거부했었다. 전화요금이 이유였다. 우리 형편에 식구마다 손 전화 가지고 있으면 매달 나오는 몇십만 원의 전화요금을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기실 전화 할 사람도 없고, 전화를 해 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비선은 안다. 전화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니는 거리의 사람들,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무뇌아 같아서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 전화가 효력을 발휘했다. 진공청소기처럼 비선을 흡입한다. 가야겠다. 만나야겠다. 8초의 짜릿함이 살아나 파들거린다. 시들어가던 풀포기에 소낙비 한 줄기 쏟아졌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다. 축축 늘어져 비실거리던 화초가 파들파들 살아 오르는 느낌, 이런 느낌, 언제 적 느낌일까. 비디오는 저 혼자 돌고 있다. 어린 롤리타는 똑같은 아동성애자지만 더 자극적이고, 더 매력적인 중년남자를 따라 떠나버렸다.

가슴이 싸하니 아파온다. 축축하게 젖었던 아랫도리에 찬바람이 분다. 비디오 속의 남자를 수범으로 대체한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근질근질하다. 삶의 활력이 느껴진다. 여고시절 수학선생님을 짝사랑했던 그때처럼. ‘얄궂기도 해라. 미쳤어. 진짜 미쳤어.’ 비선은 몸을 꼬았다. 달콤함이 목울대를 넘어간다. 꿀꺽, 손은 버릇없이 사타구니를 파고든다. 짝사랑일까. 그 눈빛이 강렬하다. 빨려 들고 싶지만 번번이 이성이 가로막는다. ‘탁 털어버려. 마음 가는 대로 행해.’ 말이야 쉽지. 상대방은 전혀 관심도 없는데 혼자 얼굴 붉히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 짝사랑도 괜찮다. 괜찮지 않다. 남녀 간의 애정은 주고받아야 가치가 있다. 착각은 짝사랑의 전유물이다. 착각하지 마라. 비선은 애써 수범의 얼굴을 지운다.

아무래도 롤리타에 집중할 수가 없다. 비디오를 끄고 창가에 앉아 자신을 반추했다. 결혼 생활 30년 동안 낡아 너덜거리는 걸레 같아진 섹스, 샅에서 흰 거웃을 발견한 순간 비선은 가능하면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려 했다. 혹여 남편이 불이라도 켜고 달려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 끄라고 성질을 버럭 내 남편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한다. 물이 말랐다. 생각 없다. 등등 이런저런 핑계로 잠자리를 피하자 남편도 처음에는 뜨악해하더니 시나브로 섹스 행사를 접기에 이르렀다. 진짜 흥건하게 고이던 샘물이 바짝 말라버렸다. 물길을 틔우겠다고 아무리 용을 써도 물길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비선은 황량한 사막 가운데 선 것 같았다.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이래 살아 뭐 하나. 그만 살았으면 딱 좋겠어. 영화를 봐도, 일을 해도, 책을 봐도, 어떤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타국에 있는 아들에게 쏟던 열정조차 줄어서 ‘이제 네가 알아서 살아라.’ 무관심이 증폭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우울증이 깊이 자리 잡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위기의식을 느낄 때면 본능적으로 삶에 대한 애착 쪽으로 기운다. 비선의 가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살다 진짜 말래? 팔십 대 노인처럼 허덕이다 말래? 제2의 청춘이란 말도 있잖아. 뭔가 찾아야 해.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봐. 너는 진짜 사랑이란 것도 모르잖아. 선 본 지 일주일 만에 식 올리고 여태 살았잖아. 남편을 사랑한다고 너 자신을 세뇌시키며 산 것이 억울하지 않니? 반백이 되도록 너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있니? 이젠 살아 봐. 마음 가는 대로 행해 봐.’ 그런다고 달라지는 일상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저지할 힘조차 없다.

그러던 차,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할딱거렸다. 수범을 생각하면 소주 몇 잔 들이 킨 것처럼 갈증이 일고 얼굴에 화기가 올랐다. 바짝 말랐던 우물에 자작하게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주책이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 국부터 마시고 지랄이야.’ 비선은 자신을 향해 막 성질을 부렸다. 성질을 부려도 머릿속에 자리 잡은 짜릿한 광선은 좀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낭패감이라니. 마음은 안 갈래. 결정했지만 몸은 벌써 무슨 옷을 입을까. 장롱 속을 뒤적거린다. 조금이라도 젊게 보이고 싶어서 거울 앞에 서서 먼지 풀풀 나는 화장품을 고른다. 눈 화장이라도 해 봐? 눈을 빤히 바라봤다. 눈을 반짝반짝 닦아 본다. 거울 속의 여자는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다. 축축 늘어진 턱 밑의 살덩이가 짝 올라붙어 뽀송뽀송 해진다.

딩동! 다시 문자가 왔다. 비선은 핸드폰의 뚜껑을 열었다.

‘저녁 일곱 시부터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수범’

안달이 난 표정이 보인다. 진짜 안달이 났을까. 비선은 <아름다운 청춘>이란 영화를 떠올린다. 어리지만 조숙한 남학생과 미모의 유부녀인 선생과 진한 사랑행위를 하는 영화였다. 교탁 앞에 앉은 여선생의 에로틱한 표정이 비선의 표정이다. 어린 제자와 성관계를 맺는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사랑일까. 동물적 욕망일까. 동물의 세계에서 섹스란 2세의 배출의무만이 존재하지만 인간의 섹스는 쾌락의 도구다. 인간의 섹스는 배란기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든 서로 마음만 맞으면 가능하다.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덫에 불과하다. 친밀감의 표현이요 끌림이고 꼴림이다. 본능적인 관계다. 이성과 이성끼리, 동성과 동성끼리, 각자의 취향에 따른 변이를 인정하고 보면 인정 못 할 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옥녀봉의 전설처럼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 선생과 제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존재하는 곳이 인간살이다. 가끔 윤리도덕에 빗나간 성 문제가 신문을 도배하거나 언론의 도마 위에 올라 뉴스의 초점이 되는 것을 보면 이 지구상에 사는 인간이란 종 자체가 모순덩이 아닌가 싶다.

비선은 손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전화 속의 세상은 요지경이다. 손 전화가 인간을 완벽하게 소유한 세상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완벽하게 소유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비선은 가능하면 수범을 유혹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싶다. 어디든 둘만 있을 수 있다면 사흘 밤낮을 발가벗고 뒹굴어도 싫증 나지 않을 것 같다. 비선은 다시 수범을 생각하며 샅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를 깊이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언제였든가. 그를 처음 만난 날이. 아니, 그녀가 그의 입술을 훔치고 그녀의 가슴을 그가 훔친 날이.

그날, 비선은 억 병으로 취했었다. 왜 취했냐고? 물론 남편 때문이었다. 아니, 비참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초등학교 총동창회에 간 남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비선은 심심했다. 책을 보다가 컴퓨터를 하다가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거리에 나갔다. 학교 행사는 1차로 끝났을 것이고 2차는 각자 동기회끼리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을 것이고, 3차는 보나 마나 단란주점 행일 것이다. 남편의 행동반경이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었다. 비선은 술집이 즐비한 골목을 일부러 외면하고 24시 편의점을 향해 가는 중인데 편의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온몸이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의 간판만 따라갔다.

오래 걸었다. 등에 땀이 배었다. 갑자기 피로가 확 몰렸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한 시간은 족히 걸었나 보다. 하루에 만보를 걸으면 육체와 정신 건강에도 좋다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시내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갈까 하다가 어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금병매 단란주점>, 어디선가 본 이름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그래, 남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명함이었지.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단란주점으로 오르는 계단, 흐릿한 조명이 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비선은 살그머니 붉은 카펫을 밟고 한 계단 두 계단을 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적막했다. 떡방아 찧듯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때, 바로 머리 위에서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선은 급히 두 계단을 뛰어내려 계단 아래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지혜야, 우리 위로 갈까?’ 언뜻 술 취한 남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뒤이어 속닥거리는 말이 이랬다. ‘위에 가면?’ ‘방 있어.’ ‘얘가 참, 나 옛날 지혜 아니야.’ ‘아니긴, 우리 회포 좀 풀자.’ ‘너거 마누라는 어쩌구.’ ‘요새 우리 집 밥순이가 통 맛이 없어. 나 아직 변강쇠야. 만져 봐.’ 낄낄거리는 남녀의 다음 행위는 쪽쪽, 할딱거리는 숨소리에 이어 위쪽으로 멀어지는 구둣발 소리였다.

비선은 멍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착각이야. 세상 모든 남자가 바람을 피워도 내 남자만은 절대로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이라 믿는 단순한 여자들, 비선도 그런 여자 중 한 명이었다. 다시 거리에 나와 건물을 올려다봤다. 단란주점 위로 00모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기분이 지랄 같았다. 비선은 거리를 걸었다. 중앙도로를 걸어 나와 외진 강변길로 들어섰다. 강변길 옆에는 포장마차 촌이었다. 늦은 시간이면 취객이 취객을 상대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우범지대이기도 했고, 연인들 놀이터이기도 한 강변로였다. 비선은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포장마차의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포장마차라고 하지만 있는 것은 다 있다. 냉장고도 있고, 싱크대도 있고, 메뉴도 여러 가지다. 희미한 형광등 아래 메뉴판이 붙어 있다. 뼈 없는 닭다리 볶음, 제육볶음, 멍게. 해삼, 국수, 우동 등, 니은 자로 놓인 의자의 세로 쪽에 젊은 남자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비선은 가로 쪽의 의자에 앉았다. 뚱뚱한 포장마차 주인여자는 무심하게 물었다.

뭘 드릴까요?

소주 한 병 주세요.

안주는?

닭발 불이 활활 나게 해 주세요.

여자는 깍두기 한 접시에 소주 한 병과 술잔 하나를 내놓고 진열장에 들었던 닭발을 덜어내 갖은 채소에 버무려 볶기 시작했다. 비선은 우선 술을 한 잔 따라 쫙 마셨다. 속이 후련했다. 또 한 잔 쫙 마셨다. 후끈 달았다. 석 잔을 채워놓고 깍두기 하나를 집어 먹었다. 주사위 하나가 식도를 꽉 막아버렸다. 컥, 비선은 식탁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해댔다. 누군가 목덜미 뒤쪽 등을 탁 쳤다. 순간 목울대에 걸렸던 주사위가 탁 튀어나와 비선의 발아래 굴렀다.

천천히 드십시오. 급체하면 가는 수가 있습니다.

하얀 휴지가 눈앞에 나풀거렸다. 비선은 염치를 차릴 참도 없이 휴지를 받아 눈물 콧물을 닦았다. 갑자기 취기가 확 올랐다. 소주 석 잔에 눈앞이 흐려지다니.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잡았다.

미안합니다. 술맛 떨어지셨죠?

비선이 젊은이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아닙니다.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어 왔는데. 잘 됐군요. 술은 자고로 주고받아야 맛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영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럽시다. 나도 혼자 술 마시기가 좀 멋쩍었는데.

넵.

술친구 합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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