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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로망

<단편 소설 - 끝>

by 박래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아들 같아서 그랬을까. 외로울 때면 사무치게 아들이 보고 싶다. 멀리 태평양 건너 가 있는 아들, 피붙이라고는 그놈 한 명인데. 아들은 유학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돌아올 생각이 없단다. 미국에서 자리 잡을 생각이라니까 무자식 상팔자려니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지만 비선은 해가 바뀔수록 아들이 그립다. 허전하다. 사는 맛이 없다.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남편은 첫마디에 뚝 끊었다.

일 없다. 내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 밖에 내 보내 좋은 것도 없더라. 그냥 당신은 집에 있어. 내 시중만 잘 들면 돼. 심심하면 학원에나 다니든지.

학원 좋지. 비선은 여러 학원을 전전했다. 서예니, 그림이니, 글쓰기니, 사물놀이니, 댄스니, 수영이니, 요리니 해서 배우러 다녔지만 한 달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모두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나온 여자들 같았다. 중년 여자들 틈에 끼어 봐도 별 재미를 못 느꼈다. 차라리 집안 구석구석 깔끔하게 쓸고 닦은 뒤에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시간, 일기를 쓰거나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좋았다.

비선은 그날따라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여태 견고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성이 일시에 풀썩 주저앉아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마법의 성에 갇혀 살다 깨어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들이었다. 아들, 보고 싶은 아들.

비선은 옆에 앉은 젊은이를 아들로 착각했다. 술주정을 했다.

아들, 엄니는 인생 잘 못 산 것 같아. 마법이 풀려 버렸어.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꼈던 내 성을 바닷물이 쓸어버렸어. 진짤까? 내가 꿈을 꾼 거지? 그 남자는 아닐 거야. 내가 착각한 거야. 그렇지 아들? 너도 아빠 닮았지? 이 엄니 맘 이해할 수 있어? 얌마, 사람이 말이야. 늙는다는 건 한 순간이더라. 너는 늙어가는 엄니 마음을 몰라. 아직 젊으니까. 한창 좋을 때니까. 나도 너만 할 때가 있었는데. 목을 매는 남자들을 엮으면 굴비 한 줄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이 인간이 나를 비참하게 하네. 이래 봬도 이 엄니, 예전에는 꽤 매력적인 여자였어.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아들, 보고 싶다.

어머니, 아들 여기 있잖아요.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사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인마, 너 누구야? 누군데 우리 아들이라고 해? 나쁜 자식. 술이나 부어.

비선은 옆에 앉은 젊은이에게 빈 술잔을 내밀었다. 혀가 꼬부라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진짜 미쳤나 봐. 이성이 소리쳤다. 정신 차렷, 래드 볼이 날개를 달았다. 비선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젊은이를 빤히 바라봤다. 참 잘 생긴 얼굴이다. 생판 본 적 없는 남자지만 싱싱했다. 갑자기 그 싱그러움에 질투가 난다.

통성명하지. 나, 스칼렛.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스칼렛 오하라가 아니라 스칼렛 비선

난 레트버틀러 수범이요.

비선과 수범은 마주 보며 진지하게 통성명을 하고 박장대소를 했다.

자네 애인 있어? 예쁘겠지. 요즘은 처녀들이 왜들 그렇게 다 예뻐? 근데 말이야. 개성이 없어 개성이. 개성이 매력인데. 자넨 어때? 내가 말이야. 조금 전에 못 볼꼴을 본 거야. 이상하게 발길이 거기로 가데. 여자나 남자나 도대체 정조 관념이 없어요. 정조대를 채우든지 해야지. 이건 다 늙은 것들이 어디서 쪽쪽 이야 쪽쪽은. 근데 말이야. 그 작자 목소리가 익더라고. 초등학교 동창회 간다던 우리 영감이랑 비슷하잖우. 혹 영감이면 어쩌나 싶어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나왔지. 내참,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러다가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든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를 막 흔들어 깨웠다.

아줌마, 장사 끝났어요. 일어나요. 총각, 이 아줌마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 모시고 나가서 바람 좀 쐬지.

결국 포장마차 아줌마의 개입으로 비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옆에 앉았던 수범이 비선을 잡았다. 수범에게 반쯤 기댄 채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찬바람을 쐬자 속에서 구토가 일었다. 비선은 비틀거리며 포장마차 옆으로 달려가서 토하기 시작했다. 수범이 비선을 등 뒤에서 꽉 잡았다. 두 팔을 비선의 배 쪽으로 돌려 안고 비선의 상체를 구부린 채 볏단 털듯이 했다. 비선은 속에 것을 몽땅 토했다. 토하고 나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여전히 속은 매스꺼웠지만. 수범은 비실거리는 비선을 부축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비선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수범에게 반쯤 안긴 모양새로 비칠거리며 걸었다.

저기 강둑에 나가 좀 앉았다 가세요.

비선이 끄덕거리자 수범은 비선을 안다시피 하고 강변 둑 쪽으로 걸었다. 강변 둑으로 오르는 계단에 퍼질러 앉았다. 비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수범도 비선의 옆에 퍼질러 앉았다.

미안해요. 주책을 부렸네요.

기분 나쁠 때 술 먹으면 다 그런 걸요.

무슨 젊은이가 하는 말마다 늙은이 같을까. 비선은 어지러운 눈으로 수범을 쳐다봤다. 수범이 빙그레 웃었다. 참 순하고 너그러운 미소였다.

어지러울 텐데 제게 좀 기대세요.

수범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 기댔다. 비선은 수범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질어질하던 머리를 그의 가슴께에 눕히니 편안했다. 아들과 함께 할 때 자주 하던 자세였다. 아들은 비선을 잘 안아주고 업어주곤 했었다. 아들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하나도 없이 행복하기만 했었다. 남편은 그런 비선과 아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질투를 하곤 했다.

야, 사내자식이 제 어미 치마폭에 쌓여서 뭐 하는 짓이야. 엄마 너무 좋아하면 마마보이 된다. 당신도 그래, 아들만 끼고 살아라. 하늘 같은 남편을 발가락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기고. 애비가 뼈 빠지게 벌어다 주는 돈이나 축내는 것들이.

결국 아들은 유학을 떠났다. 엄마와 아버지의 틈바구니에 끼어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며.

비선은 눈을 감았다. 단단하고 너른 아들의 가슴에 안겨 오래오래 그렇게 있고 싶었다. 찰나, 따뜻한 손이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으로 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우리 엄마는요. 늘 저에게 뽀뽀를 해 달라고 졸랐어요.

수범이 말했다.

나도 울 아들에게 그랬는데.

그러니까 제가 뽀뽀해 드릴 게요. 속상한 마음 풀어지라고.

수범은 그녀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이마에 닿는 따뜻한 입술이 가슴을 찌릿하게 쓸고 내려갔다. 비선의 고개는 자꾸 뒤로 젖혀지고, 수범의 입술은 코를 지나 입술에 닿았다. 입술을 포갠 그들은 숨을 죽였다. 이 일을 어찌 하나. 비선은 떨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감촉이 다시 돌아와 떨었고, 달콤해서 떨었고, 누군가 지켜보는 눈이 무서워 떨었고, 아들을 생각하며 떨었다. 비선은 슬쩍 수범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

젊은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비선은 강변 둑이 아니라 도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선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백 미터 달리기를 11초에 끊었던 중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달려라 토끼, 달려라 여우, 달려라, 주책바가지. 중얼거리며 어두운 골목을 향해 정신없이 냅다 뛰었다. 뒤에서 수범이 뭐라고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정신없이 달렸다. 수범이 달려와 뒷덜미를 확 낚아챌 것 같았다. 비선은 달리면서도 생각했다. 주책이야, 주책, 아차, 술값은 누가 계산했지? 오 마이 갓! 내 지갑. 그제야 포장마차에 놓고 온 지갑 생각이 났다. 걸음을 딱 멈췄다. 돌아보니 비선을 쫓아오던 수범의 그림자도 없었다. 아직 문 닫고 가지는 않았겠지? 비선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렸다. 포장마차가 보일 때까지. 비선과 수범이 마지막 손님이었던 포장마차는 등불을 내렸다. 마지막 문단속을 하고 있는 포장마차의 주인을 만났다.

아주머니, 잠깐만요. 제가 지갑을 식탁 위에 두고 나왔는데.

아하, 그거요? 같이 술 마신 총각이 들고 갔는데.

저 술값은?

총각이 계산했어요.

포장마차 주인의 목소리에 힐난하는 기가 당연히 섞였다. 젊은 총각과 술을 마셨으면 늙은 아줌마가 술값을 치러야지. 젊은이에게 덤터기를 씌워? 하는 투다. 기가 막혔다. 어디 사는 누군지 알아야 면장을 하지. 비선은 체념을 하고 돌아섰다. 지갑 안에 주민등록증이 있으니 연락이 오겠지.

비선은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 집에 왔다. 지갑 때문에 술이 확 깨어버렸는지 취기도 없었다. 그토록 몽롱하게 하던 술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내가 꿈을 꿨나? 한여름 밤의 꿈도 아니고, 나 참, 어이가 없네. 자정이 지났는데도 동창회 간 남편은 여전히 동창회 중인가 보다. 비선은 따뜻한 집안에 들어가자 깼던 술이 다시 확 올라와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속에 것을 다 게워냈다. 화장실 안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꿈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비틀거리며 나와 거실 의자에 푹 엎어졌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북어 국을 끓여 놓고 비선을 깨웠다.

북어 국이 웬 거냐고?

당신이 나 기다리다 지쳐 술을 마신 것 같기에.

당신 언제 들어왔는데?

새벽에.

참, 아까 수범이라는 총각이 전화를 했던데. 당신 친구 혜숙이 아들이라면 안다던데. 당신 친구가 전화 좀 해 달라고 하더라. 전화번호는 저기 적어 놨어. 난 출근해야 하니까 당신은 더 자도 돼.

살갑고 알뜰살뜰한 남편이지만 남편의 옷은 어제 입고 나갔던 그대로였다. 아침에 들어온 것 같았다. 들어오자마자 웃옷만 벗어놓고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비선은 아무것도 모른 척 ‘당신 참 고마워. 멋진 내 신랑’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남편은 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했다. 립스틱 자국 같은 것은 묻혀 들어올 인간이 아니지. 얼마나 용의주도한데. 아내에 대한 배려가 지극하지. 황혼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 이거니까. 비선도 마찬가지지만. 요새, 우리 집 밥순이가 통 맛이 없어. 맛있게 요리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어디서 흰소리야. 그래, 알았다. 여왕처럼 받들어 모시기나 해라. 전기가 통해야 감전사라도 하지. 순간, 비선의 사타구니에 짜릿한 전율이 지나갔다. 수범이라고? 그 녀석 제비 아냐?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지갑에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을 리 만무한데. 그나저나 한여름 밤의 꿈은 아니었나 본데. 이 일을 우야노.

그렇게 비선과 수범은 만났다. 수범은 강변 헬스클럽 강사였다. 비선은 헬스클럽에 수강신청을 했다. 비선은 좋았다. 수범에게 온몸을 맡기고 헬스의 기본 동작을 배웠다. 헬스클럽 회원들 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주로 이삼십 대 젊은 여자들이 많았다. 비선처럼 오십 대의 여자는 서너 명이 고작이었지만 모두 수범을 흠모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수범이 노총각이란 사실이 더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것은 아닐까. 처녀들은 은근히 수범의 데이트 신청을 고대하는 눈치였다. 수범은 대범했다. 오랫동안 헬스클럽 강사를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여자들 다루는 것에 도가 튄 것 같았다. 수범은 비선처럼 연상의 회원에게는 무조건 누나라고 불렀다.

다른 회원과 달리 수범은 비선을 자주 불러냈다. 친구들 모임자리에도 불러내 누나라고 소개했다. 술친구 하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누나라면서 수범은 당당하게 전화하고, 당당하게 만나자고 했다. 남의 눈치 안 보고 비선의 손을 잡기도 하고, 자기 옆에 끌어당겨 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비선은 기겁을 했다. ‘애가 뭐 잘 못 먹었어? 남이 이상하게 보면 어쩌려고 그래?’ 비선이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면 수범도 따라 나왔다. 비선과 수범은 자연스럽게 둘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물이 말라 시들 거리던 꽃나무에 물기가 올라 세상이 온통 불꽃놀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선은 다시 착잡해졌다. 젊은 여자에게 둘러 싸여 사는 수범에게 질투를 느꼈다. 비선은 조금씩 자신의 나이를 의식했다. 그만 두자. 그러면서도 헬스클럽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속도 모르는 남편은 헬스를 하기 시작한 비선에게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그녀의 몸이 몰라보게 단단해졌다느니, 잠자리에서 괄약근의 조임이 기막히게 좋아졌다느니 하면서. 운동이 좋긴 좋구나. 우리 선이가 꼭 처녀 때 같네. 하면서 너스레를 풀었다.

비선은 수범과 만날 시간이 다가오자 안절부절못했다.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이것 입었다 저것 입었다 하다가 퍼질러 앉았다. 나이 값 좀 하자. 내가 왜 이러나. 몸은 마음과 반대로 놀았다. 비선은 결국 바지와 간편한 티 차림으로 아름다운 카페를 향해 차를 몰았다. 아름다운 카페는 시내에서 한참을 벗어난 산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저녁에는 맥주와 양주도 팔았다.

비선이 카페에 들어서자 수범은 달려 나와 비선을 덥석 안았다. 수범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났다. 벌써 일차를 진하게 한 모양이다.

모두 인사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누나야.

수범과 같이 앉았던 다섯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환영합니다.’ 인사를 했다. 비선이 한눈에 처녀와 총각이 짝을 맞춘 모임이란 것을 알았다. 수범의 짝이었던 여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비선은 당황했다. 수범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자리에 자신을 불러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올 자리가 아니네.

비선이 수범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누나를 위한 자린데. 우리 같이 살 거다. 너희들 알지? 밤마다 어딜 다녀오냐고. 누나의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돌아와야 잠을 잘 수 있어 나는.

수범은 비선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진한 키스였다. 비선은 당황했고, 수범의 친구들은 멍했다. 순간 비선은 수범을 확 밀치고 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얘가, 무슨 짓이냐. 버르장머리 없이 친구들 앞에서. 장난이 지나쳐. 여러 분, 미안합니다. 갑자기 늙은 여자가 나타나 분위기 깼네요. 수범이가 저렇게 짓궂은 줄 처음 알았어요. 자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미안합니다.

비선은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아름다운 카페를 나섰다. 카페를 나섰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젊은이들 앞에 발가벗겨진 채 널브러졌다니. 비선은 승용차를 몰고 강변을 달렸다. 포장마차 촌에 닿았다. 승용차를 강변 주차장에 대 놓고 포장마차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슬픔을 마셨다. 단맛이 진해 쓴맛이 된 소주를 비우고 또 비웠다. 술잔을 아무리 비워도 술은 찰랑찰랑 차올랐다. 취기조차 오르지 않는 밤이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씁니다. 같이 마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우린 자연스럽게 술친구가 되겠네요.

어떤 남자가 옆에 와 앉아 비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비선은 말없이 술잔을 받았다.

너, 임마, 늙은 여자 놀리면 벌 받아.

벌써 혀가 꼬부라지셨군.

그래, 나, 취했다. 어쩔래?

지금 누나 모습 얼마나 매혹적인지 알아?

ㅋ 짜식, 웃기지 마.

편견을 버려 누나, 누나의 그런 편견이 사람 잡는 거야. 늙지도 않았으면서 늙은이 흉내를 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야.

네가 뭘 안다고.

우리 나가자.

수범과 비선은 포장마차를 나와 둑을 올랐다. 둑 아래로 찰랑거리며 흐르는 물결소리가 듣기 좋았다. 수범은 비선의 손을 잡았다. 비선도 그 손을 빼지 않았다. 냇가로 내려갔다. 흐르는 물결 위에 은파가 드리웠다. 반짝거리는 물결을 바라보며 그들은 제법 너른 반석을 발견하고 거기 올라앉았다. 수범은 비선에게 잠깐, 하면서 둑을 넘어 사라졌다. 잠시 후, 수범의 손에는 소주와 오징어를 담은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다시 병나발을 불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냇가는 정적이 흘렀다.

알아? 누나를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잠을 설친다는 거. 이건 운명이야. 내 힘으로 어쩔 수가 없더라. 나도 수없이 나 자신에게 물어봤어. 이런 끌림과 꼴림이 진짠지 가짠지. 여자 친구도 있지. 집에서는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 믿고 있는 마당인데. 그녀는 착하고 순한 여자야. 그런데 말이야. 그냥 착해, 누나에게 향하는 이런 꼴림이나 끌림이 없어. 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랬지만 이제 알아. 그녀에게 말했어. 내겐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여자가 있다고, 그 여자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지만 그녀는 안 된다고 했어. 잠깐 한눈 판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했어. 날 사랑한다고 단념할 수 없대. 그래서 오늘 같은 자리를 마련한 거야. 누나에겐 지나쳤지만.

바보, 그런 여자 만나야 남자는 평생 행복한 거야. 남자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던 착한 여자는 집안에서 애들 낳아 키우며 남편 수발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거든. 그게 행복한 거지.

누나처럼 자신의 속에 든 불덩어리를 바위로 꾹 눌러놓고?

피, 불덩어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어. 나는 그냥 평범한 여자야.

그런 말 들어봤어? 세상 모든 남자에게 평범한 여자로 보여도 단 한 사람에게는 아주 특별한 여자로 보인다는 것, 평생에 단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는 그런 운명이 있다는 것. 나는 누나를 만난 순간 그 말이 사실이란 것을 깨달았어.

유치하다.

비선은 수범에게 들릴 듯 말 듯 유치하다고 말했지만 비선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열정과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수범을 생각하면서 날밤을 꼬박 새워도 전혀 피곤을 느낀 적이 없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보고 싶고, 생각만으로 온몸이 불덩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살 떨림, 살 떨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수범이란 청년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수 있고, 감전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미묘한 감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리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은 더 심했다.

우리 그냥 이 밤 떠날까? 어디든 네가 날 데리고 가면 그냥 따라가련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스카알렛 비선, 갑시다.

그들은 손을 꼭 잡고 달을 따라 떠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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