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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굴산의 눈

<단편소설> 처음

by 박래여

자굴산의 눈



오후 2시경, 자굴산 자락에 들어서자 눈발이 휘날렸다. 사월도 중순으로 치닫는 시점인데 꽃샘추위라고 하기도 뭣하다. 날씨가 변죽을 울리는 것은 사람살이가 강퍅하다는 뜻은 아닐까. 잎보다 꽃이 먼저 나왔던 벚꽃, 참꽃, 목련, 개나리, 조팝나무 꽃, 이런 꽃들이 바람 따라 떠나버린 자리에 연둣빛 잎눈이 솟자 눈은 시샘하듯 초록을 검푸르게 얼려버렸다. 나뭇잎으로 환생한 영혼들 위에 눈은 한 바탕 칼춤을 추고 있었다.

영규는 앞 유리를 때리고 가는 눈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산에 누운 황소가 되새김질을 하다 선하품을 하시나. 어째 이리 살벌한가. 못 올 곳을 오는 것도 아닌데. 꽃바람으로 환영은 못할망정 뼈에 사무치게 냉기를 뿜어대다니 참으로 고약하군.’

갑자기 냉기가 쓱 하고 목울대를 넘었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뼈에 거죽만 입고 누웠던 아버지의 얼굴이 눈발 속에 스쳐갔다. ‘아버지, 왔어요.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고향에 왔다고요. 그냥 이렇게 오면 되는데. 왜 그렇게 그리워하면서도 못 왔어요? 뭐가 걸려서 못 온 겁니까? 그곳에 가고 싶다고, 그곳이 어딘지 내게 한 마디만 했어도 모시고 왔을 텐데.’ 영규는 볼에 흐르는 눈물 자국을 닦을 생각도 않고 운전대만 꽉 쥐었다. 차창에 부딪힌 눈은 금세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또르르 미끄러졌다.

영규는 내조 동네 앞에 있는 넓은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해 놓고 뒷좌석에 놓아두었던 배낭을 꺼내 어깨에 멨다. 주차장 입구에서 동네 지킴이로 있는 산불 감시원 아저씨께 작은 못골이 어디쯤 되는지 물었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참 선량하게 생겼다. 순간, 영규는 집안 형님을 만난 듯 선뜻 손이라고 잡고 싶다. 덥석 그 사람 손을 잡고, 내가 누구라고, 날 모르겠느냐고 묻고 싶다.

영규는 오랫동안 선명한 꿈 한 자락을 잡고 자랐다. 선잠에서 깬 아이를 어떤 사람이 누비옷을 입히고 버선을 신겼다. 솜을 푹신하게 넣은 누비옷은 따뜻했지만 잠신은 자꾸 아이를 끌어당겼다. ‘이 아이 데꼬 날 새기 전에 퍼떡 가거라. 인자 니캉 내캉 의절이다. 다시 내 눈에 띠모 칼 맞는다.’ 소름이 쪽 끼치는 목소리가 말했다. 잠신이 들린 아이는 남자 품에 안겨 마당으로 나섰다. 왈칵 달려드는 어둠이 무서워 아이는 울었다. 머리를 산발한 처녀 귀신이 달려들었다. 칼바람이 볼을 때렸다. ‘엄마, 가, 엄마 가.’ 아이는 자꾸 엄마를 찾았다. ‘뚝 그치지 못해?’ 억센 손바닥이 아이의 등을 탁 쳤다. ‘딸꾹!’ 아이는 눈물을 뚝 그치고 딸꾹질을 해댔다. 억센 손은 아이를 봇짐 위에 달랑 들어앉히고 휘적휘적 삽짝을 나섰다. 아련한 기억 속의 삽화 한 줄이다. 영규에게 그것은 볼때기를 사정없이 때리고 간 바람 냄새였다. 아버지가 늘 그리워했던 고향의 냄새가 이런 것이었을까. 칼바람이 실어다 주는 냄새, 그때도 이런 냄새가 났지 싶다. 풋내 같기도 하고, 그을음 냄새 같기도 한 바람 냄새, 고향이란 말속에 든 참 뜻이 이런 것일까. 이해타산 없이 고향이란 그 낱말에 몰입되는 감정이입이 참으로 맹랑했다.

“작은 못골요? 나는 이 동네 안 살아서 잘 모르겠는데. 저기 있는 전 씨 할배한테 물어보소.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산 어른입니더. 올해 아흔여덟인가 되니 가끔 정신이 왔다 갔다 하지만 옛날에 대한 총기 하나만은 아무도 못 따라간답니다요. 이 동네 살아있는 역사책이랍니다요. 이 추운 날에도 누굴 기다리는지. 춥다고 집에 들어가라 캐도 말도 안 듣고. 온종일 저 자리에 말뚝을 박고 있다우. 좀 들어가시라고 해 보세요. 낯선 사람들 말은 잘 들어요.”

산불 감시원은 애가 타는지 혀를 쯧쯧 찼다. 그 말속에는 노인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소박한 이웃사촌의 정이 저런 것은 아닐까.

“고맙습니다. 제가 한 번 여쭤 보겠습니다.”

영규는 초등학교 때나 앉았음직한 낡은 나무의자에 무심히 기대앉은 노인의 작은 몸피를 바라봤다. 영규와 산불감시원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어도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먼 곳, 기억 속의 어떤 길을 더듬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규는 산불감시원과 헤어져 주차장을 나왔다. 도로를 건너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뉘요? 뉘 집 자젠가?”

노인은 하얀 테가 낀 눈을 들어 영규를 바라봤다. 백내장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눈으로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닮았어. 가만, 누굴 닮았더라.”

노인은 영규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영규는 노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의자를 잡았다. 노인에게 바짝 다가앉자 노인의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이 동네의 역사가 살아 꿈틀거린다는 말이 진실 같았다. 노인이 총기 잃기 전에 누군가 구술이라도 받아 적어 놓는다면 한 동네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아~ 예, 길 좀 물어보려고요. 옛날에 여기 어디에 작은 못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하던데. 어르신, 작은 못골이라고 아시나 해서 여쭤 봅니다.”

“어디라고? 내가 보청기를 끼었어. 그래도 잘 안 들려.”

“작은 못골이라고 아세요?”

“응, 작은 못골? 그래, 알지. 알고말고. 갑술이, 내가 지다리는 줄 알기야. 아암 알고말고.”

할아버지는 영규가 알아듣지 못할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이 어디쯤 있었는지 아세요?”

“알지. 저 우에 있었어. 이 길 따라 쭉 올라 가모 있어. 근데 작은 못골은 왜?”

“예, 좀 찾아볼 일이 있어서요. 고맙습니다. 어르신.”

“가만, 갑술이 자넨가? 인자 온 기라? 맞나? 응 맞나?”

갑자기 노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영규의 손을 잡았다. 노인의 손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억센 손길이었다.

“갑술이 자네, 이 무심한 사람아. 우찌 그리 소식 한 장 없었노. 내가 이레 지다린 보람이 있구마. 반갑데이. 참말로 반갑데이. 우리 집에 가자. 니 지달린다고 죽지도 몬하고 산기라.”

영규는 갑작스레 변한 노인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산불 감시원이 쫓아왔다.

“할배, 와 이라능교? 칩은데 고마 집에 가소. 아재 부를까요?”

영규는 산불감시원에게 노인을 맡기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노인은 떨떨 떨리는 팔을 흔들며 자꾸만 ‘갑술이, 갑술이 가지 말게, 이리 오라쿵께 와, 가노? 니 지달린 지가 온젠데.’ 하면서 부르고 있었다.

영규는 노인이 가르쳐 준 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술만 한 잔 들어갔다 하면 넋두리를 하던 아버지 말씀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규야, 니는 기억에도 없제? 니가 태어난 곳 말이다. 작은 못이 있었제. 그 못이 우찌 생깃는 줄 아나? 옛날에 말이다. 재 너머에서 황토를 퍼다 날랐다 아이가. 바지게 몇 개가 삭아 내리도록 등짐 져다 망깨다지기로 만든 못이란다. 못 가운데 우리 구멍이 있었니라. 쑥쑥 빠지는 물길을 막을 라고 동네 아재 다섯이서 생병을 했니라.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황토를 들이부어 망깨를 대고 쇠망치로 탕탕 두디리고 한 아름이나 되는 청 돌로 심을 박고 그 우에 또 황토를 부어 망깨다지기를 했는데도 다음 날 가 보모 물이 쑥 빠지고 없는 기라. 못 바닥이 바짝 몰라서 맨숭맨숭한 기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은 있지만 참말로 환장 하것더마. 성규 아재는 쪼매라도 심을 쓸만한 머스마는 다 불러 일을 시켰제. 그때, 내 나이가 수무 남 살이었을 끼라. 어깨가 딱 벌어진 기 힘깨나 쓴다고 올매나 부리 묵던지.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지게를 졌는데 다음 날 가 보모 도로아미타불이니 딱 미치것더마. 내 맘이 그런데 어른들 맘은 오죽 했것나. 못 하나 맹글어서 그 아래 다랑논이라도 부쳐 무야 산판 사람들이 살제, 무슨 수로 살 것노. 숯 구다 팔아 봤자 보리쌀 한 됫박도 몬 사는데. 진 날 갠 날 없이 괭이로 파서 논 맹글어 놔도 천수답이라 하늘만 바라보고 살자니 참 애가 탔던 기라. 우리 동네 다섯 집이 어울라서 못을 파자 안 캤나. 어른들이 꾀를 내서 맹근 기 그 못인기라. 그 아래 큰 동네가 있었제. 거기 사람들이 우리 다섯 집이 사는 골짝에 못이 생기자 못 골이라 캤제. 못 맹글어 물 잡은 덕에 보리밥이라도 물 수 있었제. 면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동네 어른들 손으로 맹글어야 했제. 못 골에 살던 사람은 타성바지는 없고 다섯 집이 모다 친척이었제. 성규 아재, 순이 아지매, 철이 아재, 성이 아지매, 상이 누야, 재순이 동상, 재호, 성호, 철호 등, 아재와 아지매, 형과 누야, 동생들, 그 중에 순이 아지매, 참말로 예뿐 아지매. 사랑스런 순이 아지매.’

딱 그 대목에서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순이 아지매가 어쨌다는 것인지. 그러다가 또 며칠이 훌쩍 지나고 술 한 잔을 걸치고 집에 온 날이면 또 시작되었다.

‘그라니 그렇게라도 못을 맹글자는 의논도 했던 기라. 요새 겉으모 굴착기 불러 금세 뚝딱 해 버리겠지만 그때는 그리 존 기계가 있기를 하나. 오로지 믿을 구석이라고는 장골 심인기라. 괭이와 곡괭이로 땅을 파내고, 돌과 흙을 실어내 둑을 막았제. 못 바닥은 망깨 다지기로 처리했제. 망깨 다지기가 뭔가 하모 말이다. 못이 될 만큼 넓게 파 낸 못 바닥을 고르는 작업인기라.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황토를 퍼다 붓고 장골 한 아름도 더 되는 소나무를 베서 둥그리를 깎고 다듬어 떡메 겉은 망치를 맹그는 기라. 둥그리에 줄을 대서 서너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들었다 놨다 함서 땅을 다지는 기 망깨다지기 인기라. 큰 동네 옆의 큰 못도, 우리 동네 못도 그렇게 사람 손으로 맹근 기라. 후에 시멘트로 다시 보수를 했다쿠더라마는. 장골들 밥 수발 해 주던 순이 아지매, 내만 보모 얼굴이 빨개졌제. 갈치 토막이라도 찌지 온 날은 내 접시에 젤 큰 갈치 토막을 살짝 싱가 주곤 했제. 참말로 예쁜 순이 아지매.’

아버지의 사설은 또 거기서 뚝 그쳤다. 순이 아지매가 어쨌다는 것인지. 영규는 갑갑했다. 아니, 속이 터졌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으면서도 어째서 순이 아지매만 찾고 있는지. 순이 아지매가 어쨌다는 것인지. 어려서는 참으로 어머니가 그리웠다.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있는데 나는 왜 없을까. 아버지가 아무리 잘해 줘도 어머니의 자리는 크고 넓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가끔 그는 왜 엄마가 없냐고 아버지께 묻곤 했다. 아버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거 옴마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 알고 다시는 묻지 마라. 후제 아부지가 다 말해 주꾸마.’ 그 후제가 수십 년이 되었다.

한 달 전인가.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간 사이 영규는 아버지와 둘이 대작을 했다. 부자가 오랜만에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거였다. 여든셋이신 아버지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고 계셨다. 평소 말이 없던 어른이지만 요즘 들어 더 말씀이 없었다. 자꾸 과거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아 불안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아버님이 요즘 이상해지셨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아이들과 잘 어울렸지만 아이들이 없는 시간이면 당신의 방에 칩거를 하는 경우가 자꾸 늘어난다는 것이다.

“아버지, 순이 아지매가 누구십니까? 어려서 술을 드시면 늘 순이 아지매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누군데 그렇게도 못 잊으셔요? 제가 태어난 곳이나 어머니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아련히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칼바람이 불던 그 밤이요. 아버지 봇짐에 얹혀 걸었던 그 길이요. 아버지가 꿈에도 못 잊는 그 고향 저도 이제 알았으면 싶습니다. 무슨 큰 죄를 지어 야반도주를 하셨는지 모르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요. 이제 아버지 고향에서도 아버지를 기억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고향에 가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모시고 갈 테니 말씀해 주세요. 어딘지.”

“아니다. 가 모 머하노. 반길 사람도 없는데. 평생 잊고 사는 기 신상에 좋은 기라.”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아내는 결혼하기 전까지 제가 서울 태생인 줄 알았답니다. 말씨도 행동거지도 서울 사람이었으니까요. 서울 놈보다 더 서울 놈이 되라고 하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저는 뼛 속까지 서울 놈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은 모두 저를 서울 태생이라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실은 저 자신은 압니다. 경상도 억양에 익숙한 저를요. 경상도 억양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고,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은 그 마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가 아무리 부정하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뿌리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 이제 말씀해 주세요.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면 날짜라도 알려주세요. 제사라도 지냈으면 싶고, 산소라도 있으면 찾아뵙고 자식 된 도리를 하고 싶습니다.”

“니가 벌써 두 애 아비라니, 세월 참 빠르데이.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구나. 순이 아지매 이약은 와 이리 풀기가 에로울꼬. 참 심들구나. 이것만 알거라. 순이 아지매는 내가 평생 가심에 품고 산 사람이다. 그라이깨내 너거 옴마 이약은 담에 하자.”

다음이란 없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회사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는 동네 병원 응급실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시더니 머리가 아프다며 긴 의자에 누워 그 길로 의식을 잃었다. 병원에서는 뇌졸중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사흘 만에 의식이 온전히 돌아왔다. 의사는 아버지를 저승으로 모실 준비를 하라고 했다. 불꽃은 꺼지기 전에 가장 환하다. 영규는 병원에서 마지막 밤을 아버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가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당신의 마지막을 부탁했다.

“내 죽거들랑 화장해라. 작은 못골, 거길 찾아가거라. 거기서 그걸 찾거들랑 태워서 내 뼛가리 하고 같이 그 산에 뿌리주모 원도 한도 없것다. 내 고향은 경남 의령군 칠곡면 내조리 자골티 밑이다. 먼저 간 너거 옴마 넋이 거서 지다린다........아들아, 미안쿠나.”

영규는 휘청거렸다. 등에 진 배낭이 무슨 쇳덩이를 넣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평평하던 산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눈발은 그쳐 있었다. 아스팔트를 깐 지 오래된 것 같지 않은 길에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 촉촉했다. 어디까지 가야 작은 못골 일까. 작은 못이 있는 곳이겠지. 영규는 작은 못을 찾아 비탈길을 걸어 올랐다. 한 20분 걸었을까. 길은 다시 평평해지고 왼손 편으로 길옆에 커다란 못이 나타났다. 오른손 편을 보니 동네와 뚝 떨어진 골짝에 아담한 전원주택 한 채가 있었다. 여길까. 일단 다리 쉼을 하고 싶어서 못 둑 쪽으로 길을 잡아 들어갔다. 못 아랫녘은 제법 너른 들판이 자리하고 들판 옆에는 고만고만한 동네가 줄줄이 사탕처럼 산기슭을 배경으로 앉기도 하고, 들녘을 배경으로 앉기도 했다.

영규는 배낭을 내려놓고 못 둑에 퍼질러 앉았다. 아래위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볼을 얼얼하게 했다. 파카 깃을 세우고 모자를 썼다. 그 사이 휘날리던 눈발은 그쳤지만 날은 흐렸다. 그는 동네 쪽이 아닌 못을 넘어 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멀리 하늘과 맞닿은 재가 보였다. 그곳에는 눈이 하얗게 산을 덮었다. 줄을 친 것처럼 눈발은 중간에서 뚝 끊어져 있었다. 산 위는 하얗고, 산 아래는 희끗희끗했다. ‘이렇게 멀 줄 알았으면 차를 가지고 오는 건데. 저기가 자골 티라면 이 못이 맞는 것 같은데. 못이 작을 줄 알았더니 엄청 크잖아. 못을 키운 것일까.’ 영규는 손에 잡히는 자갈돌 하나를 주워 못에 던졌다. 돌이 떨어지는 순간 ‘퐁당’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처럼 맑은 음이다. 푸른 수면이 동요한다. 아주 작은 동그라미에서 물의 파동은 점점 커져 간다. 둥근 물무늬는 영규가 앉은 못 가장자리까지 밀려와 부딪힌다. 영규는 쭉 뻗었던 다리를 오므렸다. 그 작은 파문이 금세 그를 삼켜버릴 것처럼 거대해져 다가온다. 아버지에게 고향은 어떤 존재였을까. 나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

영규에게 고향은 1960년 대 서울 변두리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겨울이면 연탄재를 깐 가풀막진 골목과 겨우 비 가림만 면한 낡은 판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산동네, 밤낮없이 여자의 욕지기와 남자의 주먹다짐이 오가던 동네, 코를 줄줄 흘리며 넝마를 줍던 아이들, 막일 판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그 동네의 손바닥만 판자 집에 살면서 배고픔을 알아버린 동네였지만 영규는 행복했었다고 되새긴다. 건축 현장에서 목수로 일했던 아버지, 저녁 무렵이면 풀빵이나 군고구마를 사서 호주머니에 넣고 오던 아버지, 봉급날이면 갈치나 고등어를 사 들고 오던 아버지.

“심심했제. 아부지가 퍼떡 밥 맛나게 지어 오꾸마.”

곤로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밥을 하던 아버지, 밥이 끓으면 연탄아궁이에 얹어놓고 작은 냄비에 갈치나 고등어를 자작하게 졸여 밥상을 차려오던 아버지, 알루미늄으로 만든 상다리에 동그란 베니어판으로 된 밥상, 아버지와 둘이 먹는 밥상은 생선조림이 오를 때도, 김치 한 가지뿐일 때도, 간장 한 종지뿐일 때도 언제나 진수성찬이었다. 그가 몇 살이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예닐곱 살은 아니었을까. 아침에 아버지가 씻어놓고 간 쌀로 밥을 한 적이 있다. 저녁에 녹초가 되어 들어오신 아버지 앞에 짜잔 하면서 내놓았던 밥상, 아버지의 붉어지던 눈시울은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작업복도 벗지 못하고 선 채로 밥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버지, 영규가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끌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꽉 안던 아버지.

“아들 키운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밥 할 줄은 우찌 알았시꼬.”

“아부지 밥 하는 거 유심히 봤습니더.”

“니는 경상도 말씨 이자삐고 서울 말씨 퍼떡 배우거라. 경상도 문디 자석이라꼬 놀림 안 받을라모 말본새부터 서울내기가 돼야 하는 기라. 니는 여게 아~들캉 어울리지 말고 얌전히 책 보고 공부해라. 아부지가 열심히 돈 모아서 니가 핵교 가게 되모 저 아래 부자 동네로 이사 가는 기라. 니는 공부하는 기 아부지한테 효도하는 기다. 넝마 겉은 거 주로 갈 생각 말고 책 봐라. 무슨 책이든지 내 구해다 주꾸마. 아부지가 돈 많이 벌어서 꼭 그리 할 끼다. 자, 밥 묵자. 우리 아들이 처음 맹근 밥이 우떤 지 무 보자. 눈에 티가 들어갔나. 와 이리 몰뚝잖노.”

아버지는 웃통을 벗어 벽에 걸고 밥상 앞에 앉아 밥을 푹푹 퍼 드셨다.

“아부지 눈이 빨개예.”

“니도 퍼떡 밥 무라. 참 맛나다.”

부엌을 통해야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집, 난달이었던 부엌을 아버지는 건축현장에서 버려지는 벽돌과 목재, 판자나 베니어판 같은 누더기를 주워 와 비 가림집을 지었다. 땅 주인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매달 일정 금액을 거두어 간다고 했다. 전국에서 어중이떠중이가 기어들어와 움막을 지어도 땅 주인은 모르쇠 했다. 빈 터를 다져 움막을 짓는데 막을 재간도 없었겠지만 산주는 코도 안 빠트리고 팥죽을 먹는 입장이니 권장 사항이기도 했다. 무허가지만 엄연한 내 집 마련을 한 사람은 사고 팔 권리도 있었다. 판자촌을 떠날 때는 건물을 팔았다. 그때만 해도 문맹자가 많았으니 계약서란 것도 없고, 주먹구구식이었다. 얼마 줄 거냐. 얼마다. 됐나. 됐다. 형편 따라서 현금이 오갔다. 이웃 간의 인정도 살아 있었다. 제삿날이나 어른들 생일이면 이웃 간에 서로 오라 가라 하며 나누어 먹었다. 콩 한 조각으로 열두 명이 요기를 한다는 말을 실감할 때도 있었다.

영규는 그날, 그때의 서울 변두리를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향수가 바로 고향이 아닐까. 그리움이란 언제나 마음속에 있다. 항상 추억은 실제보다 멋스럽고 아련하다. 절대로 떠올리기 싫은 지독한 고통도 상기시키고 보면 그 속에 숨은 그리움이 있다. 추억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마모된 기억조차 소중한 것은 아닐까. 영규는 못 둑에 벌렁 드러누웠다. 금세 등을 파고드는 자갈의 냉기가 뼛 속으로 몰려든다. 여기가 작은 못골 맞는 것일까. 그럼 너럭바위는 어디 있지? 골짝은? 어느 골짝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못 주변을 살폈다. 산줄기 사이로 난 골짝은 한 곳이 아니라 세 곳이었다. 두 곳의 골짝은 다랑이 흔적만 남았을 뿐 산으로 변해 있었고, 못 위쪽은 골짜기라고 하기엔 넓었다. 양쪽 산비탈 쪽으로 크고 작은 다랑이가 층층이 있고 못으로 들어오는 개울은 좁았다. 아직 농사를 짓는지 다랑이의 논두렁이 반듯했다.

‘지금은 우찌 변했을지 모르나 작은 못골에 가모 집채만 한 큰 바구를 찾아라. 빨래터 건너편에 있던 큰 너럭바구니라. 남쪽 바구 밑을 파 봐라. 상자가 하나 나올 기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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