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끝>
영규는 일어나서 다시 배낭을 멨다. 해가 서쪽으로 설핏 기우는 중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한 골짜기라도 더듬어 봐야 할 것 같았다. 골짝에는 분명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흔적을 찾으면 집채만큼 큰 너럭바위도 만날 것이다. 우선 재 밑의 가장 깊은 골짝을 짚어 올라가기로 하고 도로에 나섰다. 부렁부렁 뿌아앙!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영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길옆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아재요. 잠깐 내 좀 보이소.”
오토바이가 영규의 앞에 와 멎었다. 동네 주차장에서 만났던 산불감시원 아저씨였다.
“그 할배가요. 아재를 꼭 다시 봤시모 싶다고 지한테 가서 일러주고 오라쿠데요.”
“그 할아버지가요? 그나저나 작은 못이란 것이 저 큰 저수지를 말하는 건가요?”
“아입니더. 저 우에 가모 작은 못이 하나 더 있습니더. 그 못을 작은 못이라 캅니데. 옛날에 그 우에 동네가 있었답니더. 지금은 숲이 짙어서 흔적이 없을 끼람서 지보고 그 골짝을 갈차주고 오라카네예. 산에 갔다 내리오모 꼭 할배를 만내고 가라 쿠디예. 뒤에 타이소. 그 골짝 올라가는 데까지 모시다 디리께예. 이 동네도 처음 같은데. 산에는 빨리 해가 떨어집니더. 서둘러야 할 낍니더.”
영규는 염치 불고하고 오토바이 뒤에 탔다.
큰 저수지에서 한 십 분쯤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왔을까. 길옆에 진짜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 위의 산자락에는 아름드리 적송 두 그루가 못 쪽으로 가지를 뻗은 채 기울어져 있는데 활짝 퍼진 녹색의 낙하산 같았다.
“엽니더. 저기 골짝 옆으로 좁은 산길이 있지예? 등산객들이 댕긴 흔적이 남아 있네예. 그 산길을 따라 올라 가모 돌담이 보일 기랍니더. 무너지기는 했겠지만 거를 작은 못골이라 캤답니더. 서둘러 올라 가모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올 수 있을 깁니더. 난중에 그 할배 아드님이 퇴근하고 오모 같이 올깅게 천천히 걸어 오이소. 퍼떡 올라가 보이소. 산은 해만 떨어지모 금세 어두버집니더. 서둘러야 할 낍니더.”
“그 할아버님이 저를 모르실 텐데. 왜 이런 친절을 베푸시는 걸까요?”
“지야 압니꺼. 그 할배가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막내 아드님이 참 효자랍니더. 농협에 댕기는데. 할배가 연락을 한 모양입니더. 본정신이 돌아올 때는 말짱하거든예. 자 그럼 지는 갑니더. 빨리 올라가 보이소.”
“알겠습니다.”
영규는 산불감시원의 오토바이가 비탈길을 신나게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은 골짝 옆을 따라 나 있기도 하고, 골짝을 건너뛰어 이어지기도 했다. 산길은 갈수록 가풀막지고, 산속으로 접어들수록 아늑했다. 숲의 아래쪽은 상수리나무와 오리나무, 돌배나무, 등 잡목의 군락지였고, 위쪽으로는 붉은 소나무 군락이었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나뭇잎은 예뻤다. 갈색이면서 갈색이 아닌 듯, 연둣빛이면서 연둣빛이 아닌 듯 오묘했다. 여린 나뭇잎은 나무 각자의 색감으로 숲을 치장하고 있었다. 땅은 폭신했고, 가랑잎은 바삭거렸다. 파릇파릇 솟아나기 시작한 풀 위로 하얀 잔설이 곱게 뿌려져 있었다.
영규는 왠지 그 골짜기가 마음에 들었다. 포근하고 아늑했다. 마치 오랜 세월 난달에서 바람을 맞다가 찾아든 방안처럼 안온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는 산속, 바람이 지나가고, 산새가 지저귀고 이름도 모르는 곤충의 속삭거림이 그를 따라다녔다. 가풀막을 오르자니 숨이 찼다.
산과 길의 중턱쯤 올라섰을까. 앞이 확 터이면서 가풀막이 끝나고 느슨한 구릉지대가 나왔다. 폭신하던 흙길이 돌길로 바뀌었다. 박석을 깐 것처럼 매끈했다. 골짝도 산비탈도 돌이 많았다. 길옆을 자세히 보니 돌담이 있었다. 오랜 풍상에도 무너진 흔적이 없는 온전한 돌담이었다. 돌담 위는 반듯했다. 으름넝쿨과 칡넝쿨이 무성하고 굵은 산 복숭아나무와 초피나무, 돌배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었지만 틀림없이 집터 같았다. 영규는 주변을 찬찬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돌담 흔적은 아래위로 서너 군데 더 있었다. 영규는 물길을 따라 산마루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하늘이 가까이 다가오는 자리에 긴 돌너덜이 나왔다. 골짝이 끝난 것이다. 돌 너들 아래에서 물이 솟아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다시 돌아내려 오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았다.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조릿대가 무성한 장소도 보이고, 파릇파릇 솟아난 머위 밭도 있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계곡 건너편의 아래위로 숯 굴이 서너 개 있었다. 숯 굴을 헤아리던 영규는 ‘아, 저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숯 굴에서 안쪽으로 푹 꺼진 자리에 진짜 사람 서른 명은 앉을 수 있을 만큼 편편한 바위가 턱 버티고 있었다.
영규는 골짝으로 내려가는 돌계단도 찾았다. 골짝에 내려섰다. 물이 흐르는 계곡 바닥은 자연스럽게 생긴 작은 소가 있었다. 겨울 가뭄이 길었던 탓인지 물은 많지 않았다. 골짝은 온통 굵직굵직한 바위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바닥은 온통 너른 반석이었다.
영규는 물가에 퍼질러 앉았다.
“여기구나. 여기가 작은 못골이구나.”
영규는 배낭을 벗어 품에 안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찾았어요. 아버지, 찾았다고요.”
갑자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지게에 얹혀 내려가던 길, 바로 그가 걸어올라 온 그 길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뭔가 가슴속에서 펑 터지는 것 같았다. 벌물이 둥글둥글 굴러 내려오듯이 눈물이 펑펑 솟아났다.
“어머니, 소자가 이제야 왔어요.”
영규는 바닥에 엎드린 채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어머니였다. 다만 입 밖에 낼 수 없었지만 늘 그립고 보고 싶었던 어머니였다. 사진 한 장도 없는 어머니, 그를 세상에 있게 해 준 어머니지만 실감할 수 없었던 어머니였다.
영규는 한참을 울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골짝 아래에서 천천히 산그늘이 올라오고 있었다. 영규는 그 바위를 향해 갔다. 영규는 배낭에서 등산용 괭이와 삽을 꺼냈다. 남쪽 바위 밑을 파기 시작했다. 겨울인데도 바위 밑의 땅은 파슬파슬했다.
“아버지, 없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못 찾겠어요. 내일 다시 올게요. 꼭 어머니의 유품을 찾아 함께 묻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영규는 일어나 너럭바위를 향해 절을 했다.
산그늘은 이제 산마루까지 삼켜버렸다. 숲은 금세 어둑어둑 해졌다.
영규는 일어나 배낭을 멨다. 서둘러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길 쪽에서 경적소리가 난 듯했다. 아니, 누군가 ‘보이소? 산에 올라간 아재요. 오데 있습니꺼? 퍼떡 내려 오이소.’ 산불감시원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영규가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을 따라 들어선 집은 아담한 양옥이었다. 몇 년 전에 재래식 집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지었다고 했다. 살집이 풍성한 아낙이 나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아이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살고 그 집에는 할아버지와 막내아들 부부만 산다고 했다. 거실에 마련된 저녁상은 푸성귀지만 정갈했다. 낮에 본 노인은 두레상의 상석에 앉아 있는데 전혀 정신없는 노인 같지 않았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앉게. 자네 오기를 학수고대했네. 차린 거는 없지만 많이 들게. 우리 집에 남은 방이 있으니 오늘은 여게서 자도 되네.”
“예, 고맙습니다만 읍내 나가서 여관에서 자면 됩니다.”
“아니네, 불편하겠지만 여게서 자게. 아까 길에서 잠깐 자네를 봤는데. 누군가 생각나서 말이야. 평생 지달리던 사람 같지는 않지만 모색이 닮았어. 그래, 작은 못골은 찾았는가?”
“예, 산불 감시원 아저씨가 알려준 대로 가 봤더니 연못만 한 작은 못이 있더군요.”
“그래, 그래, 거기도 변해서 몰라볼 기라. 옛날에 내가 살던 동네 흔적은 있던가?”
“돌담이 있더군요. 너럭바위도 있고.”
“자네 성 씨가 우찌 되는가?”
“밭 전자 전가입니다.”
“우리 성씨가 맞구만. 나도 밭 전자라네. 작은 못골은 전 씨들 집성촌이었어. 자네가 정녕 우리 혈족이 맞나 보네. 자네 어르신 함자가 어찌 되는가?”
“문 자 호 자라고 합니다.”
“문호?”
갑자기 노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숟가락을 잡은 손이 떨떨 떨렸다. 숟가락이 뚝 떨어져 국그릇에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졌다. 노인의 아들은 조용히 일어나 숟가락을 주워 싱크대에 가서 씻어다 다시 노인 앞에 놓았다. 영규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분명 노인은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누구도 숟가락질도 하지 않았고, 젓가락질도 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먼 과거 속으로 들어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하게 총기가 사라진 눈은 영규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두 사람의 표정을 지켜보던 노인의 아들이 침묵을 깼다.
“아부지, 진지 드세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노인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쉰 후 숟가락을 다시 잡았다.
“그래, 묵자. 자네도 어서 들게.”
“어르신, 아버지를 아십니까?”
노인은 다시 말이 없었다. 천천히 밥을 먹었다. 세 사람 중에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냥 기계처럼 조용히 밥을 먹었다. 영규는 그 침묵이 견딜 수 없었지만 입을 뗄 수 없었다. 비로소 아버지의 과거를 아는 어른을 만났고, 어머니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아버지가 야반도주를 했으며 평생 고향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죄인이었는지. 노인은 알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렸다. 노인의 며느리가 메밀 차라면서 차와 과일을 깎아 내 왔다.
“자네, 아버지는 건강하신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그래서 자네가 왔구먼. 자네, 순이 아지매 이약 들은 적 있는가?”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평생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순이 아지매, 예쁜 순이 아지매, 사랑스런 순이 아지매.
“예, 생전에 아버님이 술만 걸쳤다 하면 순이 아지매 타령을 하셨습니다.”
“그랬겠지. 그랬을 게야. 야야, 내 방에 가서 벽에 걸린 사진첩 좀 떼어오너라. 돋뵈기도 챙겨 오이라.”
노인의 아들은 조용히 일어나 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의 아들이 가지고 온 사진첩은 네모 반듯 한 액자였다. 테두리가 누렇게 변색하고 칠이 벗겨진 낡은 사진 곽이었다. 그 속에는 누렇게 색깔이 변한 크고 작은 흑백 사진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맨바닥에는 전통 결혼식 사진이 깔려 있었다.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랑과 신부가 가운데 서고 양쪽으로 양가의 가족이 앉거나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갓을 쓴 남자들이 여럿 있었다. 사진 곽을 노인 앞에 놓자 노인은 커다란 둥근 돋보기를 눈에 대고 결혼사진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느릿느릿 사진 속의 신랑 신부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이 사람이 내고, 이 사람이 자네가 말하는 순이 아지매일세.”
나는 사진을 봤다. 아버지의 말처럼 젊은 순이 아지매는 참으로 고왔다. 달걀형의 얼굴에 겁에 질린 것 같지만 상큼하고 큰 눈, 아담한 키, 옆에 선 젊은 남자는 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버지는 그 여자를 평생 가슴에서 지우지 못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품에 안고 계셨다. 그렇다면 짝사랑이었을까. 불륜 관계였을까. 노인은 왜 아버지를 기다렸을까.
노인은 꿈을 꾸는지 어두운 창밖만 오래오래 응시했다. 그리곤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아내는 참으로 예쁜 여자였지. 사진으로 봐도 표가 나겠지만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어. 내 아내는 바닷가 출신이야. 남해 어촌이 고향이지. 열여섯 살 때 들논 서마지기를 주고 사 왔어. 시집온 이래 죽을 때까지 친정을 한 번도 못 갔지. 작은 못골을 떠날 수 없었으니까. 인물도 예뻤고, 성격도 좋고, 음식 솜씨도 좋고, 바느질 솜씨도 좋았어. 아내가 짠 삼베나 모시는 비싼 값에 보부상이 사 가곤 했어. 내 아내가 나서면 환하게 불이 켜지는 것 같았어. 왈가닥이고 선머슴아 같았지만 마음 씀씀이가 비단결같이 고왔어. 나는 아내만 보면 정신없는 놈처럼 싱글벙글했어. 세상에 남자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 여자는 없었을 거야.”
“돌아가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그런 셈이지. 한 오십 년은 됐을 걸. 저 애가 대여섯 살이고, 저 애 밑에 막내가 있었어. 아내는 내가 숯을 구워 팔려고 나간 사이에 못에 뛰어들었어. 앞치마에 돌덩이를 가득 담아서 묶은 채, 망깨다지기를 했던 그 못에, 우리가 합심해서 망깨 다지기 할 때 일꾼들 밥을 해 주던 그 못에. 야속한 사람. 그때 막내가 너덧 살이었을 게야. 막내는 우리 옆집에 살던 형수가 봐줬어. 갑술이 어마이지. 아내 초상을 치고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살았어. 아내가 왜 자살을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거든. 그즈음 갑술이도 작은 못골에서 사라진 거야. 내 막내아들도 사라졌지. 설마 갑술이가 내 아들을 데리고 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노인의 아들은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가더니 낡은 나무상자를 안고 들어왔다.
“받게. 내 죽기 전에 갑술이한테 직접 전하고 싶었지만 세상에 없다니 우짜것노. 너럭바위 밑에 묻힌 걸 파왔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옆집 형수가 갈차 주더마. 자네도 역사 공부를 했으면 알것제.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겪다가 해방이 되고 남북이 갈라졌지. 삼팔선이 그어지고 육이오 동란도 겪었지. 세상이 참으로 어수선할 때였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라 캤제. 작은 못골에 살던 친척들도 모다 객지로 떠나거나 아랫동네로 내리 왔제. 형수는 아들을 지달린다고 작은 못골에 그대로 살았어. 형님은 전쟁 통에 죽고 형수는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았제. 그라고 몇 년이 흘렀을 기라. 그 형수가 병이 들어 죽게 됐어. 나를 보자더마. 형수가 그러데. ‘데름, 내 죽고 나모 너럭바위 밑을 파 보이소. 데름 막둥이, 그 아가 내 손자라요. 내 아들의 자식이라 카디요.’ 카더마. ‘우리 아를 용서해 주이소. 그 아가 온젠가는 고향에 돌아올 깁니더. 내캉 약조 했어예.’그래서 지달린 기라. 내가 죽지도 몬하고. 우리 막둥이를 봐야 죽을 것 같았어. 자네가 문호 아들 맞는가?”
영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술이는 자네 부친의 아명일세. 어디 한 분 보세. 우리 막둥이 모색이 있는지.”
노인은 앙상한 두 손으로 영규를 바짝 끌어당겼다. 영규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고 손을 쓰다듬었다. 희미한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영규는 이 모든 것이 한 바탕 꿈이었으면 싶었다.
“이제 됐어.”
노인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억양으로 단조롭게 말했다.
영규는 일어나 노인에게 큰 절을 올렸다.
세월은 모난 것들을 깎아 둥글게 만들어주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밤 내내 자굴산에는 소리 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노인의 집은 밤새도록 불빛이 환했다. 지나온 길은 돌아갈 수 없기에 애달프고 지나갈 길은 길이 보이지 않아 애달프다. 용서할 것도 용서를 바랄 것도 세월 앞에서 희석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