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시작>
고요한 귀로
아내가 울고 있다. 식어가는 내 몸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시키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앙상한 팔을 주무르고, 어깨를 주무르고 다리를 주무른다. 아내의 손은 갈퀴다. 갈퀴는 바짝 마른 갈비를 긁는다. 아무리 긁어도 갈비는 모이지 않는다. 아내의 갈퀴질은 시원찮다. 아무것도 긁어 모울 수도 다독일 수도 없다. 힘이 빠져나간 손가락은 내 굳은 뼈에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한다.
그만두게, 아내여, 제발 그만두게나
나는 아내의 볼을 쓰다듬는다. 아내는 내 손길을 의식하는지 두 손으로 내 손을 포갠다. 얼굴을 감싸는 아내의 두 볼에 깊은 홈이 파였다. 그 홈으로 흐르는 맑은 물줄기조차 이제 바짝 말랐다.
나는 어찌 살아요. 영감이 데려가야지요. 나 혼자 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아내의 넋두리는 바람을 타고 문풍지를 흔든다.
왜 못 살아. 살아 봐. 사실 당신 젊어서 나 버리고 갈까 봐 전전긍긍했던 거 아는지 모르겠네. 당신에게 버림받을까 봐 마음 졸이며 산 남자가 나란 걸 당신은 알까. 당신이 나 없이 어찌 사냐니까 왜 이리 기분이 좋은가. 이제야 말이지만 언젠가 당신이 그랬지. ‘당신 없어도 나 잘 살아. 걱정 붙들어 매슈. 당신이 내게 해 준 게 뭔데. 눈물보따리 밖에 더 준 게 있어? 입이 있으면 말해 봐. 세상 사람들 다 불러놓고 물어봐. 누구 말이 옳은지. 아내 잘 만나 호강한 사람이 누군데.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세상을 확 뒤집을 수 있다면 제 자리에 돌려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겠네.’라고 했던 그때, 나 참 무서웠소. 당신이 날 버리고 갈까 봐.
아내도 일흔이 넘은 할망구다. 진이 따 빠진 살가죽에 검버섯이 피었지만 여전히 곱다. 참 곱게 늙어가는 아내다. 고운 아내를 두고 떠난다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새삼스럽게 혼자 남을 아내가 안쓰럽다.
울지 말게. 그동안 내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네. 이제 편하게 좀 더 살다 오게. 십 년을 하루같이 병수발 했잖은가. 그 곱던 얼굴이 이렇게 삭았는데. 다시 곱게 치장이라도 해 주고 싶네. 이럴 때 자네 손 잡아줄 핏줄이라도 한 명 있다면 좋으련만. 자네가 싫다고 했지. 이미 내 자식이 셋인데 자네까지 보탤 필요 있겠느냐면서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었지. 자네, 그 마음 아직 인가. 후회해 본 적은 없는가.
내 몸을 쓰다듬던 아내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당신의 식어가는 몸, 온전히 다 식기 전에 하고 싶은 말 다 해야겠어요. 그래요. 영감, 나 울지 않으리다. 당신 말대로 나 당신 찾아가는 날까지 잘 살다 갈게요. 그때 봅시다. 너무 늙은 할망구라 못 알아볼지 모르니까 당신이 끼워 준 이 금반지 꼭 끼고 가리다. 금반지에 새겨진 당신 이름 보면 나란 걸 알겠지요.
아내는 손가락에 낀 한 돈 짜리 금반지를 만지작거린다. 언제였든가.
까마득한 날을 거슬러 올라간다.
충주 달천 근처 운두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숨어 살 때다. 행운이라는 땡초 스님과 죽이 맞아서 한 계절을 그 암자에서 났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기른 기인 행색으로 사군자를 치고 한 시를 적어 절을 찾는 관광객에게 팔아 밥벌이를 했었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그 해 봄, 미술반 학생을 인솔하여 그녀가 왔다. 청바지에 개나리 색 점퍼를 입었던 그녀, 아카시 꽃처럼 청초한 그녀, 내 가슴에 꽂힌 흰 제비꽃이었다. 보라색 제비꽃은 많아도 하얀 제비꽃은 귀하다. 나는 그 제비꽃의 꿀을 빨고 싶어 벌이 되었다. 벌이 되어 그녀에게 날아갔다. 현란한 춤을 추며 그녀 주위를 맴돌다가 결정적인 순간 손등에 독침을 꽂았다. 아야,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화구가 화르르 쏟아졌다.
아이쿠, 저런 벌에 쏘였군요. 이리 오세요. 독기부터 빼야 하니까.
나는 화구와 그림물감, 팔레트 등을 주섬주섬 주워 가슴에 안으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하얗고 여린 손등이 금세 붉게 변하더니 두툼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생 한 명을 불러 각자 좋은 곳을 찾아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한 후 순수하게 나를 따라왔다.
여기 잠깐만 앉아 계세요. 약 가져올 테니까.
내가 거쳐하는 요사채 마루에 그녀를 앉게 하고 공양할멈을 찾아 부엌으로 내달았다.
할매, 할매, 퍼떡 된장 한 보시 주소. 일 났소 일. 큰 일 났단 말이오.
경상도 사투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공양 간 할머니가 웃으며 물었다.
먼 일 났소? 불 난 건 아니겠지요?
불? 하모, 불이 나긴 났소. 여기에. 여기 말이오.
내 가슴을 툭툭 치자 공양 간 할머니는 바람 든 무에 칼자국 내듯 퍽퍽하게 웃으며 장독간에 가더니 된장 한 보시를 떠서 내밀었다.
나는 된장에 내 달콤한 사랑의 침을 적당히 섞었다. 그녀는 벌겋게 열이 오른 손등을 쓰다듬으며 눈은 먼 산자락을 맴돌고 있었다.
여기 약이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사랑의 침을 섞은 된장을 펴 발랐다.
된장이잖아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벌에 쏘였을 때 된장이 최고랍니다. 된장에는 독성을 뽑아내는 약효가 아주 강해요. 암 같은 독종도 고친다는 말 못 들으셨어요? 제가 이래 봬도 중국 화타의 후손쯤 됩니다. 색깔과 냄새가 좀 거시기하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세요. 당장 아린 기운이 빠질 테니.
그녀가 웃었다. 복사꽃보다 더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언제였든가.
이건 진짜 약이니까 끼면 심장에 꽂혀 반품이 안 됩니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손가락에 내 이름이 새겨진 한 돈 짜리 금반지를 끼워 주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을 하던 아내, 긴 생머리에 쌍꺼풀진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내, 당신 따라갈래요. 나 만난 걸 후회할 거요. 난 쫓기는 몸이거든. 평생 쫓겨 다니거나 잡혀서 감옥살이할 건데. 그래도 날 따라가겠소? 갈래요. 내게 이미 자식이 있고, 아내가 있는데 그래도 가겠소? 갈래요. 부모님은 어떻게 하고? 자식이라곤 혈혈단신 당신뿐인데. 그래도 가겠소? 갈래요. 아버지께는 작은 어머니 소생의 아들이 있어요. 그래도 당신은 두 분의 고명딸인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하시는 어른인데. 그 어른을 배반할 수 있겠소? 그래도 할 수 없어요. 갈래요. 당신은 작은 가방을 챙겨 나를 따라나섰지. 그렇게 하나가 된 우리, 인생의 반을 함께 했구먼. 당신 지금도 참 곱소. 내 눈에는 아직 이십 대 처녀 모습 그대론 걸.
아내가 웃는다. 아내는 내 말을 듣는다. 내 볼을 만진 아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만진다. 광대뼈 밑에 움푹 들어간 볼에 눈물 한 점 뚝 떨어진다.
당신 만난 걸 후회 안 해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당신 얼굴, 참 편안해요. 먼저 가 계세요. 살만큼 살다 명이 다 되면 당신 따라갈게요. 어쩌면 나 때문에 평생 독수공방하고 산 당신 아내가 먼저 갈지 모르겠군요. 형님이 먼저 가면 반겨 맞이하고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아낌없이 쏟아 주시구려. 행이한테 연락을 하려고 해요. 당신 자식들 아무도 안 와도 행이는 오겠지요. 할아버지라고 찾아온 아이는 그 아이가 유일하니. 얼마나 귀하고 늠름한지. 꼭 당신 젊었을 때 모습 같았어요.
착한 사람, 나는 아내의 눈물을 내 손바닥으로 닦아준다.
아내는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다 내 머리맡에 놓았다. 장롱에서 네 모 반듯한 제법 두툼한 보퉁이를 꺼내더니 보퉁이 벌어진 틈으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헝겊 한 장을 꺼냈다. 헝겊을 물에 담근 후 나의 몸에 걸친 옷을 벗긴다. 속옷을 벗겨 내고 젖은 헝겊으로 정성스럽게 내 몸을 닦는다. 뼈와 거죽만 남은 내 몸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닦아 낸 후 반듯하게 눕혔다.
아내는 보퉁이를 풀었다. 보퉁이 안에는 속옷과 명주로 만든 바지저고리가 얌전하게 놓여있다. 아내가 손수 만든 수의다. 내 마지막 가는 길에 입고 갈 옷을 바느질하면서 그녀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아내의 눈물에는 간기가 없다. 간이 스며들 틈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눈물을 흘리면서도 늘 담담하게 처신했던 아내, 스스로 택한 운명에 순종하며 산 여인, 아내는 지금 나를 마주하고 참선 중이다.
나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살았고, 육이오 동란을 겪었다. 대동아 전쟁이 터졌을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도망자가 되었고, 도망자가 되어 지리산으로 피신했다가 빨치산이 되었다. 좌익사상에 물들어 그 그룹에서 꽤 이름을 날렸다. 내 목에 현상금이 붙었다. 육이오 동란이 터졌을 때 나는 붉은 완장을 차고 부하들을 이끌고 자랑스럽게 우리 동네를 접수했다. 덕분에 아내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장인영감 하종호는 우리 면내 지주였다. 방앗간 주인이자 천석지기였다. 아내는 그 장인의 셋째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셋째 딸, 여자는 신식 교육은 물론 학교 문턱도 못 넘을 때 아내는 초등학교를 다닌 인텔리였다. 아내는 나의 초등학교 한 해 선배였다. 어쩌다 잡혔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일 때 그녀의 눈에 걸려든 것이 내가 아니었나 싶다. 가난한 자작농이지만 한문 공부를 많이 한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은 양반 집안이었고 한학자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다.
끌어 내!
나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네 이노옴! 내가 너의 장인이다 이노옴!
장인동무, 양반상놈은 물론 빈부격차가 없는 세상이 왔소. 장인동무가 가진 재산은 모두 당의 것이오. 그러니 몰수하겠소. 당신 딸 덕에 목숨 부지 했다는 것만 명심하소. 오늘부터 이 집은 당의 재산이오. 우리가 기거할 것이니 당신 가족은 저 동네 빈 집으로 옮기도록 하시오.
장인 하종호는 부들부들 떨다가 기절하더니 게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죽었다. 나는 잘 죽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살았더라면 온갖 고초를 다 겪었을 것이고 막판에는 대창에 찔려 죽거나 강변에서 총살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했다. 경찰과 군인 역시 보복을 했고 우리 역시 그렇게 했다. 경찰과 군인이 빨치산 가족을 죽이면 우리도 똑 같이 그렇게 야음을 타서 동네로 잠입해 그들의 가족을 죽였다. 조국 통일이니 만민 평등 세상이니 하는 것은 구호일 뿐이고 인간 대 인간의 살육전이고 보복전이었다. 적이냐 동지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김일성이냐, 이승만이냐, 완전 조폭들 세력 싸움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나도 미쳤지. 온통 미친놈의 세상에서 정상이라면 오히려 정상이 더 미친 사람이 아닐까. 미쳐야 미치는 거다. 나는 미쳤다. 마르크스, 레닌을 신봉하고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광신도가 되어 날뛰었다.
당신 미쳤어? 우리 아버지야. 우리 아버지란 말이야. 장인을 자아비판 대에 세우는 것이 공산주의라면 나는 절대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 당신은 내 아버지를 죽였어. 당신과 끝이야.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간다. 내 아버지를 죽인 빨갱이를 나도 죽이고 싶어.
아내 하정남은 떠났다. 두 아이를 앞세우고 세 번째 아이를 뱃속에 넣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남편일 수 없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일 수 없었다. 쫓겨 다니느라 용서를 빌 수도 없었고,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들의 울이 될 수도 없었다. 왜냐면 나의 자랑스러운 귀향은 백일몽 같이 잠깐 피다 만 꽃이었고, 끝내는 잠수를 타야 했다. 수배자의 운명은 안정이 없다는 거다. 쫓고 쫓기는 급박한 상황이 닥쳐도 절대 침착성을 잃지 말 것, 어떤 자리, 어떤 마을에 살아도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 것, 보통사람처럼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할 것, 간혹 밤중에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아내 옆으로 스며들었다가 밖에서 무슨 인기척만 나도 뒷문 봉창을 열고 월담을 할 수 있을 만큼 민첩할 것, 내가 즐겨 한 운동은 역시 달리기와 복싱이었다. 그 덕에 감옥소 안 가고 살아냈다.
딱 한 번 용서를 빌기 위해, 아니,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정남을 찾은 적이 있었다. 아내는 고대광실이었던 친정으로 돌아가 장모와 같이 살고 있었다. 월담을 했다. 아내의 방은 사전에 염탐을 했던 터라 간단하게 방문을 열었다. 방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임자, 나 왔소. 문 좀 따 주오. 잠깐 할 이야기도 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조용하지만 차가운 아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순사로 있는 삼촌 부르기 전에 가소. 우리 인연을 끝났소. 두 번 다시 나나 아이들을 찾지 마시오. 또 찾아오면 아이들과 자결하겠소. 내 말 허투루 듣지 마시오. 당신이 찾지 않으면 내 아이 셋을 온전한 하 씨 집안 아이로 키우겠소.
그때, 나는 알았지. 아내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났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녀가 나를 택했고 그녀가 나를 내쳤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아무 권한도 행세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마음에 두었다고 했다. 나보다 세 살 위였던 그녀, 나 아니면 절대로 시집 안 가겠다고 목을 매는 바람에 매파를 우리 집에 보냈다는 것도 후에 안 사실이었다. 그녀 덕에 나는 부잣집 셋째 사위가 되었고,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일본 유학도 갈 수 있었다. 그 사이 두 아이가 태어났고, 해방이 되었고, 나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지하 운동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떠났다. 아니, 고향을 떠나 도시로 잠입했다. 경찰과 숨바꼭질은 질겼다. 숨고 또 숨어 다니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의식주 해결이 급선무가 되었고, 나는 적당히 사기꾼이 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조국일보 신문기자를 자칭했고, 어떤 단체에서는 한국 대학 교수를 자칭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적을 두고 사회주의 물이 들었던 나는 머릿속에 든 게 많았다. 성격상 학구파이기도 했다. 허우대 멀쩡하고 인물 잘 생겼겠다. 언변 좋겠다. 일본어만 아니라 문학적 소양까지 고루 갖춘 나는 세상이란 바다를 거치적거릴 것 없이 흘러 다녔다. 그렇게 흘러 다니던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몸이 병든 것이다. 몸이 쉬라고 경고를 하는데 마음 편하게 쉴 자리는 도시가 아니라 깊고 깊은 산사에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땡초 행운 스님이었다.
그를 부산자갈치 시장 옆에 있던 홍등가에서 만났다. 월화라는 술집 작부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건달로 지내던 때였다. 역시 하룻밤 풋정이 그리웠던 스님이 승복 대신 변복을 하고 빡빡 깎은 머리에 베레모를 삐딱하게 쓰고 홍등가에 나타났다. 그와 나는 첫 대면부터 죽이 맞았다.
보아하니 산승이 하산을 하셨구랴.
도 닦는데 걸림돌 하나가 박혀서 뽑아버리려 왔소이다.
어떻게 뽑을 생각이슈?
뿌리째 몽땅 뽑아내 던지고 가야 싹이 안 돋지요. 섣불리 뽑으려 들다간 가시덩굴에 갇히는 꼴이 되겠소만. 어디 예리한 칼 없소?
있긴 있소만 그 칼은 칼집에 들어서 뽑기가 수월치 않을 게요.
어디 봅시다. 한 번 뽑아봐야 맛을 알지요.
찔리면 치명타를 입을 건데.
목숨이 대순가. 이 풍진 세상 길게 살 필요 있겠소.
그럼 한 번 뽑아 보오.
불러 보소.
월화야, 요석공주 찾아온 설총이니 극락으로 모셔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