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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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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y 03. 2023

 인연 따라온 고운 나비

인연을 따라온 고운 나비 

     

 한 여인이 마당에 들어섰다. 하얀 목수건을 맵시 있게 맨 검은 원피스 차림의 여인은 다소곳하고 고왔다. 그녀의 글에서 느꼈던 이미지와 닮았다. 가끔 카카오스토리를 오갔지만 대면하긴 처음이다. 궁금하고 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오랫동안 내 글밭을 오가고 우리 집 농산물을 주문해 주던 사람이기도 하다. 가까운 곳에 살지만 만난 적이 없었다. 지나는 길에 들러 달라했지만 막상 집을 찾아든 것이 처음이다.  


 손을 잡았다. 낯설지 않았다. 촌부의 삶이 몸에 밴 나와 달리 그녀는 도시풍의 고운 모습이지만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편하고 좋았다. 오랜만에 말 상대를 만나 수다가 늘어졌다. 주절주절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대화 속에 차 맛을 음미할 고즈넉한 분위기는 물 건너갔다. 마침 등 너머 강 처사 부부가 농사지은 햇파를 잔뜩 안고 왔다. 파김치 담그란다. 파 농사 안 지으니 이웃에서 주는 것만으로 파김치는 원 없이 먹고 있다. 덕분에 이야기보따리는 저절로 풀렸다.


 만나고 싶었지만 참 찾아오기 힘들었다는 그녀는 울컥 눈물을 보인다. 온갖 선물을 잔뜩 안고 온 그녀, 나를 만나기 위해 나처럼 설렜나 보다. 벚꽃 피는 날 편안하게 들려달라고 했었다. 등 너머 벚꽃 길을 손잡고 걷고 싶었으나 강 처사 부부가 오는 바람에 이야기꽃밭에 빠져버렸다. 그녀는 나랑 나누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준비했을까. 그 이야기를 비추지도 못하고 사소한 삶의 근황만 주고받았다. 낯설다가 낯설지 않아 지는 것도 잠깐이다. 늘 만났던 것처럼 편해지는 벗, 전생의 인연이 이어진 걸게다.  


 내 글과 만난 지 이십여 년이 넘었다는 그녀, 누군가의 글을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한 적이 없다는 그녀 말에 나는 감격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글쟁이를 알아주는 진정한 독자 한 사람만 있어도 성공한 글쟁이라고 하던가. 첫 만남이 실망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나를 꾸밀 줄도 생색내기도 할 줄 모르는 나는 이웃집 친구를 만나듯 자연스러운 게 좋다. 그녀가 그렸던 작가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나일지 모르나 글쟁이임에는 틀림없다. 글을 쓰고 있을 때 나는 나다우니까. 그녀도 책을 좋아한단다. 카카오스토리에 일상을 적은 글을 보면 글재주도 있고 진솔하다. 


 그녀는 올해 퇴직을 했단다.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단다. 그동안 정신없이 살았단다. 이제 느긋하게 그동안 못해본 것들을 하고 싶단다. 여행과 글쓰기도 그녀의 바람 중 하나 아닐까. 나는 글을 쓰라고 부추기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첫 만남이라 그럴 게다. 조용한 성격, 사색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교사 생활을 했으니 글감은 무궁무진할 것 같다. 살아온 날을 반추하고 살아갈 날을 쓰다듬을 수 있는 글쓰기는 남은 나날을 알차게 하고 생기 있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강 처사 부부네 집 구경을 가기로 했다. 만개한 동백꽃이 아름답단다. 식물로 뒤덮인 강 처사 부부의 집도 시골마을의 백미다. 에둘러 강 처사 부부 집으로 갔다. 담장을 휘감은 마삭 줄과 나무와 풀과 꽃이 어우러진 집은 외부와 차단된 채 고즈넉하다. 온갖 야생나무와 덩굴풀로 이루어졌던 귀퉁이에 텃밭이 조성되어 있다. 푸성귀를 길러 자급자족하는 강 처사 부부는 가난한 부자다. ‘꼴통인 강 처사보다 나는 부인을 더 사랑한다오.’ 농담을 해도 정이 오가는 부부다. 


 오랜 지기란 이래서 좋다. 책으로 가득 찬 좁은 방에서 모과차를 마시며 창밖 동백나무를 봤다. 흐드러지게 핀 붉은 동백꽃이 그녀를 반겼다. 해거름에 그 집을 나섰다. ‘인연은 또 이렇게 만들어지는군요.’ 그녀의 한 마디가 찡하게 다가온다. 강 처사 부부도 까칠한 편인데 처음 만난 그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뜻이다. 


 그녀와 나, 둘만의 오붓한 벚꽃 길 드라이브를 했다. 지그재그 산길이 가파르기도 하고, 내리막길이 급하기도 해서 운전대를 잡은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 같다. 내 승용차로 모실 걸. 내겐 익숙한 길인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늘 덤벙대는 나는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도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린 거다. 귀한 벗인데 귀한 대접 하는 것에 통 소질이 없는 나는 그냥 만남에 취하고 꽃에 취한다.  


 집에 오니 농부는 찻상 정리를 해 놓고 군불을 지펴 놨다. 오랜 글벗이 온다고 했더니 슬쩍 자리를 비웠던 농부다. ‘시를 안 쓰는 우리 집 시인이자 목수입니다.’ 농부를 소개했다. 저녁 먹고 가라 했지만 그녀는 서둘러 떠난다. 등 너머 호젓한 벚꽃 길을 에돌아갈 것이다. 숲이 좋아 숲이 보이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는 그녀, 전원생활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안 선다는 그녀, 대리만족이라도 하려고 숲 그늘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단다. 첫 만남이 실망스럽지 않기를.


 마당에 어둠살이 내린다. 그녀를 배웅하고 들어오다 호박벌과 노랑나비, 흰나비를 봤다. 시들어가는 호박꽃을 찾아온 고운 나비 한 마리 훌쩍 날아가버렸다. 인연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음이 없다. 나와 그녀의 인연은 몇 겁의 생을 돌아와 만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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