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May 08. 2023

 동백나무를 애도함

동백나무를 애도함   

  

 여보게 친구, 어찌 이리 허무히 가는가. 진자리 마른자리 깔아줄 때는 몰랐던 그리움이 날마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구려.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둔한 나를 만나 개고생만 시키다 보낸 것 같네. 자네의 빈자리가 참으로 넓고 허전 하이. 좀 더 편안하고 넓은 터전으로 옮겨 천년만년 살아주길 바랐건만 내 욕심이 지나쳤나 보이. 자네도 싫었던 게야.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늙고 싶었던 게야. 내 욕심이 자네를 떠나게 했네. 미안하이.


 그래도 내 마음은 전하고 싶네. 자네를 아꼈다는 것만 알아주게. 자네가 비좁은 돌담 틈에서 덩치를 키우는 것이 안쓰러웠네. 사랑방 건물에 치어 비스듬히 기댄 채 자라는 것을 볼 때마다 애가 쓰였네. 반쪽만 붉은 홑꽃을 탐스럽게 달고 서 있는 것이 더욱 애잔했네. 나란히 손잡고 있던 친구를 잃은 후 많이 외로워 보였네. 자네들이 서로 티격태격하며 자리다툼을 하는 것 같아서 한 그루를 옮겼다는 것은 알게야. 아름다운 정원으로 보냈지. 새로운 터전에서 잘 자라주길 바랐지만 그 친구도 시름시름 앓다가 그냥 명을 놓았다는 소식을 받았네. 


 자네는 참 선하고 착하이. 우리네 인생살이는 그렇지 않다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것을 예사롭게 하지 않던가. 정치판을 보게.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작태는 한심하다네. 그들에게 양심은 곧 돈이고 권력이니 박쥐처럼 밤낮이 다르다네. 자네도 인간세상의 본태를 봐서 알겠지만 이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돈과 권력도 아니고 개인의 욕심은 더욱 아니라네.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눌 줄 아는 사람과 사람사이 끈끈한 정일세. 자네와 나 사이에 있는 그런 정이 아니겠나. 자네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네. 인간의 욕심은 탐욕으로 가는 지름길이네. 내가 자네를 위한다는 것도 내 욕심에 불과했네. 자네는 강하게 거부했던 게야.


 자네, 기억하는가. 거제 산기슭 습하고 외진 그곳, 서로 보듬고 있던 어린싹들, 우람하고 덩치 큰 나무들 사이에 껴 숨도 못 쉬고 시들어가던 자네, 슬쩍 손 내밀었더니 친구 손까지 잡고 냉큼 따라오지 않았나. 햇볕을 못 봐 누렇게 뜬 얼굴, 말라깽이 몸매지만 싹수가 있어 보였네. 고이 모셔왔다네. 마침 사랑방 앞이 허전했거든. 꽃나무라도 심었으면 싶었지. 바람 찬 골짜기라 겨울나기 힘들까 봐 처마 밑 햇볕 바른 자리에 심었지. 그렇게 자네를 모셨네. 희망과 꿈을 거름으로 주면서 키웠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이 어찌 앉아서 장 천리를 보겠나. 한 치 앞도 못 본다네. 나무를 심을 때는 적어도 그 나무의 수명에 따라 몇십 년 앞은 내다보고 자리를 잡아줘야 한다는 것을 말일세. 지금 그 자리가 허전하다고 배게 심으면 금세 눈요기는 할 수 있어도 몇 년이 지나면 나무는 숨이 막힌다네. 겉으로는 서로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치열한 자리다툼이 일어나는 것 같더구먼. 나무의 심장은 뿌리에 있잖나. 심장이 튼튼해야 육신이 건강하지.


 자네가 친구랑 자리다툼을 하면서 자네가 시들어가는 것이 못내 안쓰러웠지. 마침 아랫말 정원사가 자네 친구를 탐냈지. 홑꽃이 이래 예쁜 동백나무는 구하기 힘들다면서. 파 가라 했네. 그때 알았던 게야. 자네들 심장이 돌담을 지나 축담 아래로 뻗었다는 것을. 두 그루의 뿌리가 서로 엉켜 있다는 것을. 자네 친구의 분재를 겨우 뜨고 굴착기와 트랙터를 이용해 옮겨갔지. 꽉 찼던 자리가 허전하더군. 자네는 파리한 얼굴로 떠난 친구를 그리워했지. 


 한 삼 년, 자네가 시름시름 앓아서 애가 달았네. 친구 잃은 아픔을 어찌 모르겠나 마는 자네까지 잃고 싶지 않았네. 들며 나며 보살피는 농부의 정성을 봐서라도 견디길 바랐네. 그러던 어느 날 자네 잎사귀가 기름을 칠한 듯 윤이 났네. 자네가 기운을 차렸다니. 얼마나 기뻤는지. 꽃샘추위에도 눈부시게 매혹적인 꽃송이를 피워 올렸지. 얼마나 황홀했는지 아는가. 나는 핏빛 사랑이라고 불렀다네. 내 글의 소재가 되어주는 우리 집 꽃들 중 붉디붉은 사랑의 매체가 자네라네.


 여보게 친구, 자네도 알잖은가. 우린 모두 외로운 존재라는 것, 혼자 살아내야 한다는 것, 삶은 홀로 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지. 자네가 제자리를 잡자 안심하는 나와 달리 농부는 자네를 제대로 키우고 싶어 했다네. 사방이 툭 터인 곳으로 자네 성정대로 뻗어나가 멋진 모양새를 갖추길 바란 게야. 사랑방 앞에 두면 팔도 못 뻗고 반쪽짜리로 살 것 같았던 게야. 자네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탈이 난 게야. 사랑도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집착은 탐욕이 되고, 탐욕은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던 게야.  


 농부는 몇 달 전부터 차근차근 계획하고 실행했어. 자네를 옮겨 심을 자리를 잡고 구덩이를 깊게 팠지. 자네의 뿌리를 잘라 분까지 떠서 싸매뒀더군. 잔뿌리가 내리는 사이 가뭄해갈 될 정도로 봄비 푸근하게 내린 후에 이식할 것이라고 하더군.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고대하던 비가 왔지. 농부는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한 게야. 트랙터 대신 트럭으로 자네의 뿌리를 감싼 분을 덜어내는 과정에서 그만 우지끈 밑동이 부러져버린 거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망연자실했지.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지. 자네는 그냥 그대로 있던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나? 아니면 농부의 잘못이었나? 


 여보게 친구, 잘 가게나. 이십 년이 넘도록 동고동락한 그대를 애도하네. 다시 볼 수 없는 붉디붉은 핏빛 사랑도 함께 보내네. 나를 기억해 주게. 나도 자네를 기억하리니. 그동안 내 말벗이 되어줘 고마웠고, 산새들 놀이터가 되어줘서 더 고맙다네. 새와 벌과 나비가 번갈아가며 자네랑 노닥거릴 때 나는 참 기뻤네. 떨어진 붉은 꽃을 주워 유리그릇에 물을 담아 띄워놓고 즐기기도 했네. 오랫동안 자네가 기억날 걸세. 사랑했었네. 가끔은 무심하기도 하고, 가끔은 잊기도 했지만 자네는 항상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게야. 사는 날까지 자네가 많이 그리울 것 같네. 잘 가게나. 자네의 씨앗 하나 발아되면 제대로 키워줌세.      

매거진의 이전글  인연 따라온 고운 나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