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끝>
클 날 뿐 했구나. 니 땜에 살았다.
아버지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나를 새삼스럽게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은. 그랬지만 나는 똑똑해질 수 없었다. 모양부터가 정상적인 아이들과 달랐다. 머리는 기형으로 툭 튀어나왔고, 말은 어눌했고,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다. 나는 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어머니만은 정확하게 내 말을 알아들었다. 비록 내 의사를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책을 좋아했다. 남들은 바보가 책장만 뒤적인다고 하지만 내용에 대한 해석은 정확했다. 누나가 읽는 『차탈리 부인의 사랑』 같은 연애 소설도 신나게 읽었고, 소걀 린포체의 『티베트의 지혜』도 읽는다. 『불교성전』도 읽고 『성경』도 읽는다. 나는 건강하고 예의바르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나를 붙잡고 이런 말을 했다.
다 지 운대로 사는 기다. 자슥이 안 똑똑하다고 내 자슥 아닌 거 아니다. 이가 성을 갖고 태어났으니 니는 우리 집 4대 독자다. 이준철, 니는 마 내 살과 피를 받아 태어난 거룩한 존잰 기라. 니가 내 은인이제. 그때 생각하모 니한테 할 말이 없다. 가서 술 한 병 더 사 온나. 너거 옴마한테 돈 조라 캐라. 안 주모 저 아래 점방에 가서 외상으로 달아놓고 오이라. 우리 아부지가 봉급 타모 준다쿠드라 하모 줄기다. 내가 이래 뵈도 이 동네에서는 나는 양반이다. 저거 놈들이 감히 나를 홀대할 수 없는 기라. 상놈들 주제에.
아버지가 상놈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른다. 부모란 자식 앞에서 조상에 대해서만은 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왕손이란다. 고려를 뒤엎고 이 씨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핏줄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유명한 절은 대부분 원효대사나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말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까. 양반의 후예라는 것이 무슨 큰 영화라고 술에 꼭지가 돌면 아버지는 사천 읍에서 초시를 했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며, 문장이 뛰어났다는 고종 할아버지를 들먹이며 양반 가문이라고 자랑을 한다. 후렴으로 오르는 것은 반상이 무너지면서 찢어지게 가난해서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다는 것, 사천초등학교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때 교장 선생 덕에 심부름꾼으로 학교에 남게 됐다는 것이다. 학교 소사였지만 젊어서는 잘 나갔단다. 선생이 없을 때는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젊은 날의 영화를 떠올린다. 아버지의 눈이 젖는다. 조상님께 면목 없다고 고개를 숙일 때면 나는 가만히 아버지 귀에 대고 딱 한 마디 한다.
아부지는 바부다. 우리 아부지 바부다.
아버지는 술병을 입에 물고 허허 웃는다. 진짜 바보다. 아버지도 나도.
늦가을 새벽바람은 차다. 나는 잔뜩 웅크리고 골목을 내려가며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바다를 본다. 사천 앞바다는 잔잔하다. 그루터기만 가득 찬 회색의 들을 지나 찰랑거리는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내 귀에는 게가 옆걸음 치는 소리까지 들린다. 바다 옆 어느 집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 소리도 들린다. 귀를 감싸고 골목이 끝나는 자리에 우뚝 선다. 양쪽으로 게딱지처럼 붙어 있던 집도 끝난 자리, 골목과 도로의 축대가 나란히 선 자리에서 바다를 본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들을 지나 목장 집 마구간을 연기처럼 감싼다. 목장 집 아래채에서 연기가 오른다. 내가 들어가 앉아도 넉넉한 가마솥 아궁이에 장작이 이글이글 타고 있을 것이다. 가마솥 안에는 젖소의 젖통을 씻을 따뜻한 물이 끓고 있을 것이다.
아찌, 나 왔어.
목장 집 아저씨는 벌써 젖소를 작은 우리 앞에 줄을 세웠다. 소들은 머리가 좋다. 주인아저씨가 나와 젖 짤 준비를 하는 동안 느릿느릿 운동장을 거닐다가 내가 마구간에 들어서면 좋아서 뒷발로 땅바닥에 깔아준 짚을 차올리며 펄쩍펄쩍 뛰어 작은 우리 앞에 선다. 음머어! 입천장을 뒤집고 울기도 한다. 주인아저씨는 소들이 박수를 친다고 한다. 나는 젖소의 환영인사를 받고 등장하는 선수다. 젖 짜는 선수, 안녕, 소들과 다정한 인사를 나눈다. 아저씨는 내가 젖을 짜면서부터 소젖이 많이 나온다고 좋아한다. 소들이 얌전하게 젖을 짜주길 기다리는 것이 신기하다는 말도 한다.
너는 청상 다음에 크면 젖소 목장 해라. 우리 집에 있다가 우리 목장 니가 사서 해라.
진짜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아버지의 방에 소주병을 천장까지 채워 드릴 것이다. 어머니의 구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소주병 가득 찬 방에 가만히 있게 해 드릴 것이다.
젖을 짠다. 먼저 가마솥에 데워 놓은 뜨거운 물에 찬물을 적당히 부어 따뜻한 물을 만든다. 양동이에 따뜻한 물과 깨끗한 수건을 담아 들고 작은 우리에 들어간다. 젖이 풍선처럼 부푼 얼룩이는 서로 먼저 젖을 짜겠다고 대들지만 소들 사이에도 순서가 있었다. 뿔을 한 번 휘 두르면 서열대로 한 마리씩 작은 우리에 들어왔다. 소 한 마리가 들어서면 딱 맞는 작은 우리다. 소의 배 밑에 들어가 소의 젖을 깨끗하게 닦았다. 소는 꼬리를 탁탁 치며 기분 좋게 되새김질을 했다. 아저씨가 깨끗이 소독된 우유 통을 가져 온다. 우유 통을 젖꼭지 밑에 놓고 발그레한 젖꼭지를 요리조리 돌리며 만져준다. 젖통에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진다. 젖꼭지가 탱탱해진다. 두 손으로 살살 젖통을 문지른다. 찔끔찔끔 하얀 우유가 떨어진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두 손으로 젖꼭지 위를 쓰다듬어 아래로 쭉 밀어내면 하얀 우유가 좍좍 쏟아진다. 젖통의 속이 다 비어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아래로 젖을 짠다.
젖을 짜는 동안 소는 기분 좋아서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으로 자꾸 내 머리와 등을 핥아주려고 고개 짓을 한다. 그러지 마, 내도 너거들 좋다. 는 뜻으로 고개를 뒤로 젖혀 소의 입술에 맞춘다. 소는 입술을 뒤집으며 헤, 웃는다. 열다섯 마리 젖소 중에 열 마리쯤 짰을까. 내 손에 마사지를 받으며 느긋하던 소가 갑자기 뒷발을 들어 땅을 툭툭 친다. 내 귀에 미세한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젖 짜던 손을 멈추고 우유 통을 소 옆에서 멀찍이 덜어내 놓고 얼룩이의 목을 살살 문질렀다. 소의 두 귀가 빳빳하게 선다. 뒤에 남은 소들도 긴장이 되는지 꼬리를 내린 채 가만히 있다. 날마다 듣는 비행기소린데도 소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청각에 예민한 소의 젖을 짤 때 들리는 비행기 소리는 젖의 양을 확 줄어들게 한다.
또 비행기가 나는 모양이구나. 젖 짤 때는 소들의 신경이 예민한데. 새벽에 무슨 비행기가 나는 연습을 하는지 원, 아직 첫 비행기 뜨려면 멀었는데. 저 비행기 소리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질레 여기서 목장은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옆에서 우유 통이 차면 덜어내고 새 우유 통을 갖다 주며 심부름을 하던 주인아저씨가 한숨을 쉬며 툴툴 댄다. 아저씨는 이제 안다. 소와 내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하면 비행기 소리가 들릴 것이란 것을. 사천 공항인지 공군부대인지 알 수 없지만 비행기의 굉음이 마구간을 뒤흔들고 지나갈 것이란 사실을.
철아, 니 오봉산 전설 아나? 니를 보모 그 전설이 생각난다. 저기 진주와 함안 쪽을 보모 산 다섯 개가 어렴풋이 보이제? 저기 오봉산이다. 옛날에 말이다. 저 산이 우찌 생깄냐 하모 말이다.
아버지랑 친구 사이라는 주인아저씨는 이야기라면 신바람이 난다.
조선시대였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서 백정이 살았는데. 그 백정은 양반되기가 소원이었다. 늘 양반에게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사는 백정인지라 양반에 대한 한이 맺혀 밤이면 양반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다. 백정이 양반행세를 하고 다녔으니 양반집 하인들이 가만 두었겠는가. 그를 잡아서 동헌에 끌고 갔지만 그는 잘못했다고 빌지를 않았다. 양반놀이 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되레 큰 소리를 친 것이었다. 고을 원은 화가 나서 곤장을 치게 했고, 그는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고을 원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쌍놈이 양반행세를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뜻으로 백정의 시신을 동구 밖 소나무에 매달아 두었다.
그 뒤 마을에는 백정의 귀신이 나타나 마을의 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굿을 하고 고사를 지냈지만 백정은 원한을 풀지 않아 마을의 소가 다 죽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마을은 가난해지고 마을 주민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백정을 죽인 고을 원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덕망 있는 새 원이 부임을 해 왔다. 새 원은 어떻게 하면 마을이 재앙을 막고, 원귀를 달랠 수 있을까 고심하며 밤잠을 설쳤는데. 어느 날 밤 백정의 귀신이 나타나 해결책을 일러 주더란다. 마을에 다섯 개의 산을 만들고 그 산마다 못을 파고 수양버들을 심어 자신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면 다시는 소를 죽이지 않겠다고 하더란다. 고을 원은 즉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산을 만들고 못을 파서 정성을 다해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단다. 그때 만든 산이 오봉산이란다.
니 알제? 소를 잡는 사람을 백정이라 카는 거. 그 때는 사람대접도 못 받았제. 그라이 올매나 양반이 되고 싶었것노. 그 아는 어릴 때부터 배운 기 소 때려잡는 거 뿌잉께네 마을의 소를 다 때리 잡을 수밖에 없었지만 쇠한테 미안했던 기라. 저 오봉산을 만들어 지가 쥑인 쇠한테 미안하다 쿤기라. 니 생각은 우떻노? 니 맹키로 쇠 좋아하는 아는 담에 큰 목장주가 되모 딱 좋것다. 우유 짜는 것도 신기 아이가. 우리 집 얼룩이는 몽땅 니 손만 기다린다 말이다. 그라이 니는 담에 꼭 젖소를 키아라.
목장 집 아저씨는 내가 듣는지 안 듣는지 관심도 없이 혼자 떠들고, 나는 명아 누나와 딴 딴 딴따 신랑각시 꿈을 꾼다. 얼룩이들이 손뼉을 친다. 얼룩무늬 옷을 입고 나는 의젓하게 인사를 한다. 비행기가 포물선을 거리며 뺨 뺘랴 뺨 나팔을 분다. 하얀 구름이 장미꽃다발을 뿌려 댄다. 니, 명아가 여기서 잤다고 꼭 말해라. 누나의 눈이 샐쭉해져 쳐다본다.
아찌, 명아, 울 집에 잔다.
어, 그래, 고녀러 가시나는 툭 하모 외박이다. 준서랑 짝쿵이 돼 가지고 해 대는 꼴 보모 다리 몽디를 뿔라 삐야 하는데. 그라지도 몬하고, 참 속 탄다. 가시나가 조신해야제. 우떤 놈을 만날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아저씨는 비행기가 지나간 하늘에 먼 눈 바라기를 한다.
고명 딸 하나 있는 기 저래 속을 썩인다. 오냐오냐 키운 저거 에미 잘못인지. 너거 누야는 축협에 취직해서 돈이라도 벌지만 우리 집 그것은 만포장으로 놀면서 밥만 축낸다. 괜찮은 군바리라도 물고 오모 딱 좋것거마.
아저씨는 혼자 사설이 길다. 아저씨가 사설을 널어놓던 말든 나는 비행기가 지나간 뒤에 서둘러 젖을 짜기 시작했다. 남은 소의 젖을 다 짜내고 소에게 여물을 듬뿍 주고 나오자 주인아저씨는 주전자에 가득 우유를 부어 주셨다. 그 우유가 아침 품삯이다. 나는 어깨를 우쭐우쭐하며 집으로 달려온다. 출렁출렁 주전자의 우유가 주전자 주둥이로 찔끔찔끔 오줌을 싸도 좋았다. 어머니가 기다리는 우유, 누나가 얼굴을 씻는 우유, 징그러운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려면 우유로 목욕을 해야 한다는 누나보다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우유를 좋아한다. 뜨거운 우유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아버지, 우유 해장술은 효과 만점인 모양이다. 아버지는 술 먹은 티를 싹 감추고 빨간 딸기코를 달고 출근을 한다.
너거 아부지도 몇 년 안 남았다. 학교에서 잔뼈가 굵었으니 나가라 소리는 몬 하지만 교감 선생이 은근히 나가줬으면 하는 눈치란다. 술을 엔간히 무야제. 내 겉애도 술고래를 놔두고 싶것나. 저레 술을 무도 너거 아부지는 일 하나는 착실히 잘 한단다. 옛날부터 그랬제. 저래 얀다무친 사람이 우짜다 술 귀신이 됐는고.
나 때문일지 모른다. 내가 똘똘한 아들이면 아버지가 술병을 달고 살까. 누나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아버지를 저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 누나는 누굴 닮아서 예쁠까. 키도 늘씬하고 몸매도 죽인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외탁을 했다나 어쨌다나. 친탁을 한 나보다 외탁을 해서 다행이라는 어머니, 은근히 칠푼이 아들이 부끄러운 것 같다.
파란 대문을 당당하게 밀어제쳤다. 밥상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어머니는 밥상을 마루에 놓고 뛰어 와 내 손에 들린 주전자부터 받아 든다. 우유 주전자는 곧바로 석유곤로에 오른다. 어머니는 우유 주전자를 석유곤로에 올려놓고 밥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출근 준비가 끝난 누나와 아버지가 밥상 앞에 좌정한다. 우유는 주전자에서 부글부글 끓기 전에 어머니의 손에 의해 방안으로 모셔진다. 어머니는 아버지 국그릇에 우유를 콸콸 쏟고, 어머니는 내게 손짓한다.
니도 얼렁 옷 벗어 걸고 낯 씻고 온나.
며엥아 누우야는?
나는 옷 벗을 생각도 않고 명아 누나부터 찾았다.
저거 집에 갔지. 밥까지 우리 집에서 먹을 줄 알았어? 좀 일찍 오지.
우유로 세수를 못한 누나의 눈이 새치름해진다. 나는 금세 풀이 죽는다. 재미없다.
엄마, 철이가 사춘긴가 봐. 명아를 좋아하는 눈치야.
아이가, 가시나가 별 희한한 소릴 다 한다. 저거 누야 칭군께 그렇제.
어머니가 내 역성을 든다. 나는 어머니의 역성이 듣기 싫다.
갑자기 또 우우우웅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밥상이 떨떨 떨린다. 숟가락을 잡은 아버지 손이 떨떨떨 떨린다. 누나의 젓가락이 쿵 쿵 쿵더쿵 쿵따 쿵따 쿵더쿵 박자를 맞춘다.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우유를 휘휘 젖는다. 우유 속에서 얼룩이가 눈물을 떨어뜨린다. 얼룩송아지는 엄마젖꼭지도 못 빨고 목장 아저씨는 우유병에 초유를 담아 송아지 입에 끼운다. 송아지는 찐득한 초유 몇 번 받아먹고 싸구려 분유를 물에 타 마신다. 아이는 소젖을 먹고 앙 앙 앙 울고 송아지는 풀을 먹고 음매 음매하고 아버지는 우유에 소주를 섞어 마신다.
길을 널칼 모양이더라. 길 아래웃동네를 싹 뿌사삘 모양이더라. 보상이 올매나 나올지 모르것지만 목장 집이 떼돈 벌게 생겼다.
아버지는 빨간 딸기코를 쓱쓱 문지르며 말한다.
우리 집도 보상이 나오겠네요.
국가에서 주는 보상금 치고 제대로 나오는 거 못 봤다.
아버지는 다시 우유에 소주를 부어 마신다.
이참에 보상금 톡톡히 받아 곤양 다솔사 밑으로 이사 갑시다. 목장 집에서 젖소를 다 처분해야겠담서 우리보고 사라쿠던데. 그 집 쇠들이 우리 철이 말을 참 잘 듣는 담서요. 당신도 핵교 그만 둬야 한당께 잘 됐네요. 준서가 축협에 있으니 축산자금도 좀 받고 그라마 그럭저럭 살 터전 마련은 안 되것소.
꿈 보다 해몽이 좋다. 동네 사람들이 단합을 해서 사천공항에 민원 제기도 한다 쿠더라. 소음 공해 피해 보상도 해 조야 나가겠다고. 비행기 소리 땜에 피해보고 살았다고.
명아 누야도 데리고 가자. 내 색시 할 끼다.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어머니와 아버지 표정이 가관이다. 우유에 술을 탄 국그릇을 입에 대다 말고 석상이 된 아버지, 젓가락으로 오징어볶음을 집다가 석상이 된 누나, 밥그릇에 숟가락을 꽂다가 석상이 된 어머니, 석상이 된 세 사람을 감상하며 나는 질겅질겅 오징어 볶음을 씹었다.
세월이 오봉산 다섯 구비만큼 흘렀다. 구암리 사천공항과 공군부대 옆에는 도로가 사천 앞바다만큼 넓어지고, 하얀 줄, 노란 줄 줄줄이 사탕이 되어 우리 집 흔적은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는 술에 우유를 타 마시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가고, 어머니는 얼룩이의 우유에 빠져 바다로 갔다. 누나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간 자리에서 알을 까고, 명아 누나는 얼룩이 둥지에서 알을 깠다. 나는 얼룩이들 속에서 안전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