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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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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un 10. 2023

 칡 순이 핀다

 칡 순이 핀다.    


 

  슬슬 칡 순이 뻗치기 시작한다. 잿빛의 마른 줄기만 앙상하던 뒤란이 날마다 조금씩 푸른 기가 돈다. 웅크렸던 칡 줄기에서 순이 나와 하루 한 뼘 이상씩 자란다. 아침에는 이슬을 머금고 대가리를 동쪽으로 올려 끄덕거리고 낮에는 허리를 꺾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본다. 죽은 것 같았던 잿빛 줄기에서 돋아난 연한 새순들, 땅 심을 끌어올려 뻗어나가는 즐거움이 보인다. 누가 가꾸지도 누가 바라지 않아도 저 혼자 제 몫을 하는 풀들이라 백성을 민초라 부르는가.  


 푸른 숲 그늘에 앉아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고 사는 삶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느긋하게 사니 보이기 시작한다. 농촌 삶은 늘 오십 보 백 보다. 농번기라 부지런을 떨면 쉴 틈이 없지만 그러려니 하고 보면 느긋하게 관조하는 삶이다. 마을에 내려가면 길섶이 부지런하다. 옥수수도 파릇파릇하고, 고추모종도 파릇파릇하다. 씨앗 한 줌 뿌려둔 채마밭은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너거 집에 상추 없시모 상추 좀 뜯어다 무라.’ 정겨운 할머니들의 인심도 받는다. 


 주말이면 행락객들이 줄을 잇는다. ‘다 다 다 다 왱왱 부릉부릉’ 오토바이 여남 대가 등을 넘어가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어디서 와서 어디를 돌아가는 젊은이들일까. 생활이 곤궁하다 해도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사는 것 같은 풍경을 자주 접한다. 가족 중심으로 사는 젊은 부부는 강가에 텐트를 치고 어린아이들은 풀밭을 신나게 달린다. 아이들이 평생 간직하게 될 추억을 선사하고 있는 젊은 부부가 돋보인다. 집 나서면 개고생이라지만 가족소풍은 아무리 개고생을 해도 삶의 추억거리가 된다. 


 오월 첫날이다. 근로자의 날이라고 쉬는 곳이 많다. 수영장도 쉰다. 덕분에 사흘 내리 운동을 쉬었다. 몸이 무겁다. 수영장에서 풀어줘야 일상이 편한데 못 풀어줘서 그런가. 온몸이 찌뿌듯하다. 목욕탕이라도 다녀와야겠다. 농부는 감산에 가고 나는 목욕탕에 갔다. 목욕비도 천 원 이상 올랐다. 사우나라고 간판이 붙은 목욕탕은 목욕비가 7500원이다. 비싸다고 안 갈 수도 없다. 여자들은 목욕탕 나들이를 즐긴다. 젊은 측은 땀 빼고 운동하면서 몸의 균형을 다스린다. 늙은 측은 혈액순환제로 목욕탕을 찾는 것 같다. 


 나는 온탕과 냉탕 오가다 대충 씻고 나오는 순서다. 목욕탕은 공평하다. 잘생긴 몸매든 못 생긴 몸매든 거치적거릴 것 없이 발가벗은 태초의 모습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 있다. 여자는 우선 인물이 좋아야 하고 몸매가 좋아야 한다지만 중년을 넘어서면 인물이나 몸매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그 값을 정한다. 풍상을 겪은 얼굴과 그렇지 않은 얼굴이 드러난다. 발가벗은 몸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다. 내 또래의 여자들은 대부분 관절에 문제가 있다.


 어떤 아주머니가 ‘오랜만이다. 아직도 거기 사나?’ 인사를 건넨다. 안면이 있다.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했다. 농부의 동창이니 내겐 선배다. 딸과 함께 목욕탕을 온 그녀는 등이 굽고 걸음새가 불안정하다. 몇 년 사이 폭삭 늙었다고 하면 기분 나쁘겠지. 우리 집 고사리와 단감을 주문해 주던 선배다. 고사리 핑계로 와서 산나물도 뜯어가던 선배다. 몇 년 사이 그녀도 나도 할머니가 된 모습이다. 아직도 고사리 농사 하느냐고 묻는다. 고사리 농사는 임대 주고 단감 농사 자급자족할 만큼만 짓는다고 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이럴 때는 내 빼는 게 상책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건강 잘 챙기세요. 저 먼저 갈게요.’ 서둘러 목욕탕을 나섰다. 이층 계단도 난간을 잡지 않으면 오르내리기 힘들어진 늙은 몸들이 서글프다. 젊고 탱탱한 젊은 몸들을 보면 젊은 시절 나도 저랬던가. 과거를 소환하기도 한다. 그때 할머니들이 얼마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던가. 그 마음을 알게 되는 것도 내가 노인 대열에 섰다는 것을 인식하면 서다. 


 문득 칡 순을 생각한다. 사람도 칡 순처럼 순하고 부드러울 때도 있지만 잠깐이다. 금세 억세고 칙칙한 칡 줄기가 되어 볼품없이 웅크릴 때가 온다. 칡 순이 돋아나 어린 잎사귀를 키울 때는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리고 자리다툼을 하며 세력을 넓히다가 그만 전 잎이 된다. 잎사귀 다 떨어뜨리고 남은 줄기만 얼기설기 서로 보듬고 앉은 모양새가 노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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