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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짓는 여자

<단편소설 끝>

by 박래여

형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요. 형님이 나를 다 찾아주시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너 지숙이 어쩔 거니?

그 순간 재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제게 딴 여자가 있습니다. 지숙이도 알고 있고, 우리 사이는 끝난 걸로 아는데요.

뱃속에 든 아이는?

지숙이가 그 이야기까지 했어요? 참 내, 지우라고 했고, 지우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 일에 형님이 왜 나서서 이럽니까?

이 자식이........

그의 면상을 후려쳤다.

너,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줄 알았냐?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놓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았더냐? 너 내 손에 한 번 죽어볼래? 당장 지숙이한테 가 봐. 부산 시에 있는 00 병원이니까. 나는 곧 한국 떠난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돌아와서 너와 지숙이 헤어졌다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다. 너 같은 놈에게 순정을 바치는 그 애가 참 불쌍하다. 나 같은 놈 택하면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는데. 너를 택했으니 할 말은 없다. 의사가 그 애는 앞으로 애를 가지기 힘들 거라고 했다. 너, 참 나쁜 놈이다. 어떻게 그 애를, 어떻게.

그렇게 등을 돌렸었다. 나는 한국을 떠났고, 그 후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사막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며 나는 그녀를 잊기 위해 글을 썼다. 『사막에서 보내는 편지』를 유명 여성 잡지사 공모전에 보냈었다. 그 글이 당선되면서 나는 작가가 되었다. 아니, 그때부터 작가로 살기로 했다.

여러 날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녀와 통화는 어려웠다. 번번이 수화기만 들고 있다가 제자리에 놓았다.

지독히 박복한 가시나.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곤 한다. 그녀 생각을 하면 가슴부터 먹먹해진다. ‘잘 살겠지.’ 그랬다. 잘 살 것이라 믿었고, 잘 살길 바랐다. 당연히 잘 살 것이라 믿었다. 그만큼 그녀는 어려서부터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실부모하고 첫사랑 남자를 12년을 기다렸다가 결혼한 여자니까 더 악착스럽게,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히 그녀 소식을 들었다. ‘우연히’라고 했지만 필연이 아니었을까.

아유, 못 살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시로 정전이 되니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아침에 잠깐 외출을 했다 돌아오니 아내가 성질을 버럭버럭 내고 있었다. 정전이었다. 두꺼비 집을 열어봐도 별 이상이 없는데 갑자기 정전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싶어서 집 앞의 전신주에서 집으로 끌어들인 전선을 살폈다. 그럼 그렇지. 전선이 끊어져서 바람에 흔들거렸다. 한 가닥은 길 저편으로, 한 가닥은 우리 집 울타리에 떨어져 있었다.

어유! 또 그놈의 레미콘이나 덤프트럭 탓이겠지? 아예 전신주 하나를 새로 박아서 높이 달아매 달라고 하든가. 아니면 전신주를 이쪽으로 옮겨 달라하던가. 무슨 남자가 이런 것도 하나 제대로 처리해 주지 못하고 속상하게 하는 거야.

기갈 드세고 불뚝 성질이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막말을 해 대는 아내다.

성질낸다고 전기가 다시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그래, 있어봐라. 내가 해결 하마.

재 너머 길 공사 한다고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오르내리는 덤프트럭에 걸려 전선이 끊어진 것 같았다. 한전에 고장 신고를 했다. 한전 직원이 금세 달려왔다.

임 종만입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전선줄을 좀 높이 매달아 주십시오. 길 건너편 전신주에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여야 하니까 이런 문제가 수시로 생기네요.

예, 잘 알겠습니다.”

한전 직원 두 사람은 시원하게 대답하고 사다리와 새 전선을 가지고 와서 연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끊어진 전선을 제거하고 새 전선을 잇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 사람이 자꾸 나를 쳐다봤다.

왜요?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아니요.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아서요. 이름이 임 종만 씨라고요?

네, 그렇습니다만.

아하, 이제 알겠다. 글 쓰시는 분 맞죠? 맞아, 여기라고 했어. 혹 서 재화 씨 아세요?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친군데 내가 이곳으로 발령받았다니까 선생님 이야기를 했어요. 그곳에 가면 잘 아는 사람이 있다고, 잘 나가던 사업 접고 글 쓴다고 시골 들어간 형님이 있다고, 그분 맞지요? 한번 찾아뵈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네요.

서 재화, 어찌 그 이름을 잊겠는가. 내게 뺨을 맞고 멍하니 바라보던 그 얼빠진 표정을, 순간 그녀가 먼저 떠올랐다. 그녀를 내 기억에서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어찌 살까. 잘 살겠지. 내 눈과 귀는 늘 그녀를 향해 열려있었다. 행동하지 않을 뿐. 나는 재화가 아니라 그녀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 친구 잘 있죠? 나는 통 그 친구 소식을 모르고 삽니다.

조만간 선생님 뵈러 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 친구 요즘 정신이 쏙 빠졌어요. 부인 때문에요.

네? 부인 때문이라뇨?

모르시겠구나. 요새 부인 간병 한다고 힘들어요. 부인이 뇌종양이라던가. 우리 회사 인터넷 사이트에 그 친구 돕자는 기사가 올라 있어요.

나는 아연실색을 했다. 그녀가 뇌종양이라니.

언제였답니까?

몇 년 된 걸로 알아요. 처음엔 눈이 안 보였다고 하더군요. 여기저기 안과만 전전하다 병을 키웠대요. 저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시신경이 마모되어서 실명 위기에 놓였는데 백약이 무효였답니다. 서울 대학 병원까지 다녀와도 방법이 없다고 하더래요. 그런데 우연히 종양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눈 때문에 병원 갔다가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졌는데. 안과 선생이 뇌 정밀 사진을 찍어보자고 하더래요. 결국 눈이 나빠진 것이 머릿속에 든 암 덩이가 시신경을 누른 탓이었다고 하더군요. 지난핸가 뇌수술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요즘 다시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녀가 뇌종양이라니. 그렇게 되도록 자각 증상도 없었단 말인가?

그녀에게 결혼 신청을 했다가 퇴짜 맞고, 그녀가 내 곁을 떠난 후 나는 한국이 싫었다. 건축 설계 사무소를 닫고 다른 길을 찾던 중에 사우디아라비아로 갈 길이 열렸다. 건설 업체 직원으로 3년 계약을 한 뒤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5년 만이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 그녀는 재화와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며 늦깎이 결혼을 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서 그녀를 잊기고 했다.

어쨌든 그녀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통화가 되었다.

여보세요?

이십 년 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지숙아!

말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오빠구나. 오랜만이야.

우리 그동안 너무 무심하게 살았구나.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미안하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오빠는 잘 살지?

그래. 너 아프다는 소식 며칠 전에 들었다.

한참 뜸을 들인 후에 대답이 왔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나 괜찮아. 오빠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시력이 조금 나빠진 것뿐이야.

그녀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 목소리가 밝아서 좋구나. 이제야 예전의 너 같다.

사실 그동안 좀 아팠어.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아플 때 오빠 생각 많이 나더라.

우리 만날까?

말이 없었다.

만나자, 보고 싶다. 내가 너의 집으로 갈게.

거듭 재촉하자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 고마워. 하지만 싫어. 나 지금 아주 초라해. 폭삭 늙었어. 오빠에게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 있다가, 있다가 내가 연락할 게. 이 전화번호 맞지? 참, 예전에 오빠 소설 많이 읽었어. 동인지에 실린 것도 찾아가며 구해서 읽었는걸.『사우디에서 보낸 편지』가 실린 여성 집지는 지금도 갖고 있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 오빠 글은 다 재미있어. 특히 장편소설『사막에 핀 사랑』은 읽고 또 읽으며 울었어.

그랬었지. 뜨거운 모래의 나라에 가서 모래 바람을 맞으며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볼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너 때문이었다. 꿈도 꾼 적 없던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 바로 너 때문이었어. 참 아팠지. 아니 그리웠어. 『사막에서 보내는 편지』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였어. 진솔하다. 아프다. 이런 찬사를 들으며 독자층을 확보했고, 그 잡지사는 내게 소설가의 길을 열어줬지. 『사막에 핀 사랑』은 내 첫 소설이었어. 한 여자를 사랑하던 남자가 그녀와 사별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으로 가지. 아내를 못 잊어 사막을 헤매던 중 꽃 한 송이를 발견하지. 백 년 만에 핀다는 선인장 꽃에서 그녀를 발견한 그는 그 선인장 가시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었지.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나 바쁜데. 다음에 꼭 연락할 게. 오빠, 고마워. 안녕!

그래. 잘 있어. 용기 잃지 말고.

내 귀에는 오랫동안 이명이 떠돌았다. 안녕!

그리고 한 열흘 지났을 때다. 재화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형님, 접니다.

그래, 요즘 지숙이는 어떻게 지내나?

형님, 지숙이가 형님을 꼭 만났으면 합니다. 오후에라도 다녀가실 수 없는지요?

지숙이가? 어디로 가면 될까?

부산에 있는 오래된 병원 605호실입니다.

알았네.

나는 그 길로 승용차를 몰고 부산으로 향했다. 오래된 병원은 뇌 전문 병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금세 찾아 들어갔다. 그녀가 입원한 병실은 4인용 일반 병실이었지만 다른 환자는 없고 한 침대에 그녀만 누워 있었다. 핏기라곤 없는 파리한 중년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에는 배가 불룩하게 나오기 시작한 재화와 훤칠하게 잘 생긴 청년과 참한 처녀가 일곱 살쯤 된 아이의 손을 잡고 침대 곁에 서 있었다.

형님,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재화가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 손을 감정 없이 잡았다.

조금 전에 진통제 맞고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 애들입니다. 여기 좀 앉으시죠.

재화가 권하는 의자에 앉아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떠나고 있구나. 직감했다. 나는 가만히 이불 위에 얌전히 포개져 있는 두 손 중에 오른손을 잡아 내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은 이미 시력을 잃은 지 오래된 듯했다.

오빠구나. 오빠가 왔구나.

그녀의 손에 미미한 힘이 주어졌다.

여보, 애들 데리고 좀 나가 줄래? 나 오빠랑 밀린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그래, 기운 없으니까 이야기는 천천히 조금만 해라. 형님, 우리는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재화가 세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왼손이 내 손 위에 포개졌다.

오빠, 이런 꼴 보여 미안해. 우리 애들 잘 컸지? 아들은 군대 제대하고 복학했어. 딸은 대학 졸업하고 서울에서 동사무소에 근무해. 예쁘지?

그래, 애들 잘 키웠구나. 막둥이가 맹랑하던 걸. 전에 전화받을 때 보니까.

그렇지? 그 애들, 반듯하게 자라주는 것이 어찌나 예쁜지. 그 애들 제 가정 지니고 잘 사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오빠를 오라고 했어. 오빠에게 할 말이 참 많았는데. 이제 말하기조차 힘이 드네. 와 줘서 고마워.

저 애들 봐서라도 힘내야지. 재화도 아까 애들에게 하는 걸 보니 무척 가정적인 것 같더라. 너만 건강하면 참 다복한 가정인데. 빨리 건강해져야지. 약한 말 하지 말고 병을 이겨낼 생각만 해야지.

그렇지? 참 좋은 남자야. 내 속도 무지 태웠지만 우리 결혼은 오빠가 시킨 거야. 그날, 알지? 오빠가 재화의 뺨을 때렸다며? 재화가 그러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그래서 우리 결혼한 거야. 그리고 저 아이들, 가슴으로 낳아 키웠어. 나처럼 부모 없는 설움 안 받게 하려고 무척이나 공을 들였지. 덕분에 참 잘 자라준 것 같아. 다만 막내가 걱정이야. 아직 어려서. 내가 자식 욕심을 너무 부렸나 봐.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이제 말을 그만해라.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

오빠, 옛날처럼 나를 꼭 안아줄 수 있겠어? 내가 외롭고 힘들 때마다 안아줬잖아.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 품을 늘 생각하며 살았어.

그래, 한숨 더 자렴.

나는 그녀 옆에 누워 그녀를 꼭 안았다. 한 주먹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야윈 몸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나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금세 갓난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그 얼굴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천사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용히 병실을 벗어났다. 승용차에 앉아 재화에게 전화를 했다.

지숙이가 잠들었다. 들어가 봐라. 다음에 우리 술 한 잔 하자. 오늘은 그냥 갈란다.

그 시간 지숙의 영혼은 이승을 떠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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