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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확에 핀 꽃

<단편소설. 끝>

by 박래여

1974년 우리 집에도 흑백텔레비전이 들어왔다. 산동네 판자촌에서 흑백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몇 집 되지 않았다. 과수댁인 데다 세든 사람이 많은 우리 집 텔레비전은 우리 것이 아니라 동네 할머니들 장난감이 되었다. 밤이면 이 집 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러 우리 집 안방으로 모였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이자 동네 소문도 따라와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심심찮게 문간방 누나 방에 가서 죽쳤다. 동네 사람들은 아홉 시 뉴스가 끝나면 모두 돌아갔지만 그들이 남긴 소문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우리 집 마당에 갇혀 뱅뱅 돌았다. 주로 이런 숙덕거림이었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 강제로 내쫓는 담서? 국유지라고 나가라 칸다는데. 돈도 없는 사람들이 오데로 가노. 큰일이다. 소문에 박물관 짓는다 카기도 하고,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라 카기도 하고.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준다카기는 하더라. 단체로 독거 촌을 지어 이사 시키 줄기라고도 하고. 나라에서 하는 일 누가 막것노. 대통령이 하라쿠모 해야 한다는데. 안 그랬다간 잽히 가서 뼈도 몬 추린단다. 삼청교육 댄가 오데 갔다 오모 병신 안 되모 정신병자 된다 카더라. 말도 함부로 몬 하는 세상이라 카이.

우리는 성 밖에 산 깨네 괜찮을라나.

그러다가 이야기 끝에 꼭 후렴처럼 붙는 것이 문간방 여자와 상금이의 근황이었다.

문간방 새댁이는 와, 뗄레비 보로 안 오노?

뗄레비 보는 것보다 머스마 보고 있는 기 더 좋은 갑다. 그 머스마 땜세 상금이 아부지가 술주정뱅이를 면했다 아이가. 술 딱 끊고 일만 한다 카드라. 집에도 일찍 오고, 상금이가 낙동강 오리 알 신세 겉애가꼬 맘을 몬 부치는 것이 안 됐제.

아가 듣고 있다. 말 좀 단디 해라.

여섯 살이 된 상금이는 안방구석에 앉아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다. 누가 자기 이야기를 하든 말든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무심한 자세였다. 상금이는 아예 우리 집 안방을 차지하고 살다시피 했다. 밥도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먹을 때가 많았고, 잠도 어머니 옆에서 자는 횟수가 많았다. 상금이는 눈썰미가 있었다. 한번 본 춤은 금세 익혔다. 텔레비전에서 가수들이 춤을 추면 신기하게도 금세 배워서 할머니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했다. 할머니들이 아무리 귀여워하고 어머니가 친 손녀처럼 챙겨도 상금이 얼굴에 피는 마른버짐은 갈수록 많아졌고, 보조개 들어간 볼은 호박 샘보다 더 깊어졌다. 어머니는 혼자 독차지하던 사랑을 동생과 나누려니 힘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문제는 문간방 여자가 아들을 낳고 나서 기세가 등등해졌다는 거다. 상금이를 바리데기처럼 부렸다. 참 조신하고 인정스럽고 얌전하다고 소문났던 여자가 어쩌면 그렇게 돌변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여자의 마음 같았다. 상금이는 제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수시로 여자에게 맞았다. 밥을 굶기고 집 밖으로 쫓아내는 것도 예사고, 설거지를 하고 걸레질을 하는 것도, 호박 샘에 가서 양동이에 물을 떠다 독을 채우는 것도 상금이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여자에게 조곤조곤 이르기도 했다. 어린애를 그리 모질게 부리면 안 된다고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고, 처음 먹은 마음이 끝까지 가야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무라도 여자의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상금이 꼴이 딱 보기 싫다는 거였다. 여자도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해 괴롭다고 했다. 반면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함박꽃이 피었다. 아들이 벌써 뿔뿔 기어 다닌다고 겨우 다섯 달 됐는데 올되는 것 같다고 입이 귀에 걸렸다.

대신 상금이는 오뉴월 땡볕에 보릿대 말라가듯 말라갔다. 쌍꺼풀 진 큰 눈은 더 움푹 들어가고, 보조개 진 볼 역시 더 깊어졌다. 웃기도 잘하고, 울기도 잘하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상금은 어린애답지 않게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상금이는 수시로 아이를 등에 업었다. 여자가 푼돈을 벌기 위해 남의 집 빨래를 해 주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예 부엌데기에 애보기 하녀로 전략했다. 상금이는 겉늙어버린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였다. 여자는 주로 오전에 한두 시간 성안에 들어가 일을 한다고 했다. 부잣집 청소를 해 주고, 이불 같은 큰 빨랫감을 맡아 빨아 주는 허드렛일이라 했다.

진주성을 감싸고 흐르는 남강천변은 천혜의 놀이터였다. 삼복더위를 피해 몰려온 점잖은 어른들은 시원한 촉석루에서 더위를 식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빨래를 한다는 명목으로 물가에서 더위를 식혔다. 진주성에는 누각이 여럿 있었다. 누각 아래에서 남강천변으로 내려가는 샛길은 어디에나 있었다. 샛길을 따라 강에 다다르면 어디든지 앉아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이 주로 빨래터로 이용하는 곳은 진주 촉석루 아래였다. 의암 바위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서면 온통 너럭바위였다.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 바위는 의기 논개의 전설이 서린 바위다. 진주 사람이면 누구나 익히 알듯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현감이었던 최경회 장군의 부실이었던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내려 죽은 자리에 있는 바위다. 최경회 장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자 논개는 기생으로 변장해서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장의 승전잔치에 잠입한다. 왜장 게야무라 노구스케의 환심을 산 논개는 그를 유인해 열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끼고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한다. 의암 바위 밑에는 지금도 왜장의 넋인 구렁이와 논개의 넋인 거북이가 싸우고 있기 때문에 깊은 물속에 있던 의암 바위가 조금씩 움직여 촉석루 아래 강가에까지 다다랐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장골이 훌쩍 뛰어 건너기만 하면 의암 바위에 올라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의암바위와 촉석루 사이에는 푸른 강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렀고, 그 사이로 작은 배가 다녔다는 설이 있다.

그곳은 너럭바위가 물밑까지 너르게 깔려 있어 빨래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굳이 빨래 돌을 구할 필요가 없는 천연의 빨래터라 성안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수시로 그곳에 모여 빨래도 하고, 멱도 감았다. 그곳은 여름이면 온통 물 놀이터가 되곤 했다. 가끔 수영 사고가 나곤 했지만 늘 여자와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문간방 여자는 그녀의 남편이 출근한 후면 아이를 상금이 등에 업혀주었다. 아이가 잠들면 방에 뉘어 놓고 기저귀랑 옷가지를 빨아 널라고 했다. 아이를 울리기만 하면 점심도 저녁밥도 없다고 윽박지르며 총총히 사라졌다. 상금이는 칭얼대는 어린 동생을 업고 여자가 사라진 성 쪽을 바라보며 골목을 오르내리다가 아이가 잠이 들면 집에 들어왔다. 아이를 방안에 뉘어 놓고 빨랫감을 가지고 호박 샘 아래 빨래터로 갔다. 눈물 콧물 찍어내며 조막손으로 빨래를 했다. 마음씨 좋은 동네 아주머니라도 만나면 빨래가 환하게 웃었다. 상금이 대신 아주머니가 빨래를 빨아 대야에 담아주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한여름이었다. 나는 방학을 했고, 방학은 무료했다. 무료를 달래기 위해 출근하고 없는 누나의 방을 애용했다. 내 방이 덥다는 이유로, 호박 샘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도랑물 소리가 들리는,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그 방을 아지트 삼아 무료를 달랬다. 주로 누나의 냄새가 밴 베개를 껴안거나 누나의 옷장을 열어 냄새 맡기였다. 한 번은 누나의 속옷을 뒤적였다가 출입금지 딱지를 받았었다. 문에 자물통을 걸어 잠가버린 것이다. 누나에게 싹싹 빌었다. ‘어디 갈 때는 꼭 문 잠글 것. 책 외에 내 물건에 손대지 말 것.’ 다시는 누나 물건에 손대지 않겠다고 각서를 쓴 후에야 누나에게서 자물통의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방학을 하면 선행학습을 하느라 몇 개의 학원을 몰아치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쁘지만 그때만 해도 방학은 신나게 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성 밖에 있는 중안초등학교에 가서 선배후배 뒤섞여 공을 차거나 만화방에 가서 죽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만화책을 한 보따리 빌려 와 누나 방에서 시시덕거렸다. 만화책을 다 보고 심심하면 누나의 서재에 꽂힌 삼성문고판 소설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명작이란 것이 어찌나 까다롭고 어려운지 몇 장 읽다가 팽개치기 일쑤였지만 그때 읽은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제인 에어, 테스, 유리알 유희, 부활, 대지, 왕비열전, 등등 꽤 화려한 독서량을 자랑했다.

그날, 어머니는 서장대나 북장대로 바람을 쐬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동네조차 텅 빈 듯 개 짖는 소리조차 없는 날이었다. 나는 누나 방에서 창문이랑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엎드려서 책에 푹 빠져 있던 중이었다. 내가 읽던 책은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주인공 네홀류도프가 카츄사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는 대목이 아니었나 싶다. 절정에 이르는 소설 속에 푹 빠져 있는데 문 밖에서 상금이의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야, 책 보나? 내 좀 보래이. 우리 상옥이 깨는지 좀 봐 조라. 기저귀 빨로 가야 되는데.

나는 고개를 들고 축담에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상금이의 눈과 마주쳤다. 상금이의 눈이 금세 축축하게 젖을 것 같았다. 어린애 같지 않은 눈, 처연한 눈, 노천명 시인의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의 눈, 그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았어. 상옥이 깨모 니 부를 게.

다시 고개를 책에 박았다.

상금이가 빨래를 하러 호박 샘 빨래터로 가고, 나는 책에 빠져 있는데 옆방 아이는 금세 깼다. 방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나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호박 샘 쪽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상금아, 상옥이 깼다아.

상금이는 힐끗 내 쪽을 돌아봤지만 다시 빨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이는 더 까칠하게 울고 나는 화가 났다. ‘저 가시나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해? 칵 쥑이 삐끼다.’ 성질이 버럭 난 나는 방에서 나와 옆방으로 갔다. 마침 눈물콧물 범벅이 된 아이가 방바닥을 발발 기어 문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이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아채 옆구리에 끼고 그 길로 대문 밖으로 나갔다. 호박 샘 아래 빨래터로 갔던 것이다. 러닝에 기저귀만 낀 5개월짜리 아이는 자지러졌다.

상금이는 하얀 기저귀를 물에 헹구다 말고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나를 봤다. 나는 상금이의 가슴에 상옥이를 콱 안겼다. 상금이는 상옥이를 두 팔로 안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빨래 터에 주저앉았다.

가시나 이기, 니 내 말이 말 같잖나? 니 동생이 깼다 안 캤나? 퍼떡 와야지 머 하는 기고? 니 동생인께 니가 알아서 해라 임마, 가시나가 째려보모 니가 우짜낀데?

다 빨았는데. 쪼맨만 봐 주모되는데. 오빠가 쪼맨만 봐 주모되는데.

내가 니 동생을 와 봐 주노? 내가 니 맹키로 애 보는 가시나가?

엉덩방아를 찧고 퍼질러 앉은 제 누나의 품에 안긴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나와 제 누나를 요모조모 살피다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울지 마, 인자 누야가 있응께 울지 마, 착하지 우리 상옥이’ 하면서 상금이는 엄마처럼 아이를 달랬다. 나는 돌아섰다. 집으로 오다가 돌아보니 상금이는 아이가 차고 있던 기저귀를 뽑아내 씻고 있었다. 상금이 옆에서 아이는 대야에 들어앉아 물장구를 치며 까르르까르르 웃고 있었다. 상금이는 빨래를 하면서 물을 아이에게 끼얹었고, 두 아이는 마주 보며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집으로 온 나는 다시 누나 방에 엎드려 책을 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창밖이 너무 조용했다. 꼭 태풍 오기 전의 착 가라앉은 하늘처럼 세상이 갑자기 고요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자지러지게 울던 매미조차 숨을 죽인 듯 매미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호박 샘 아래 빨래터를 봤다. 상금이가 도랑에 들어가 서 있었다. 옷이 흠뻑 젖은 채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아랫도리가 벗겨진 아이는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아이가 앉아 놀던 대야가 저만치 떠내려가 있었다. 상금이는 아이를 물가에 눕혔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금이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이 옆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가지 않았다. 내가 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해가 바짝 하늘 중앙에 붙었다. 눈을 감고 누웠지만 등에는 줄줄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비몽사몽간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상옥아!’

갑자기 귀청을 찢는 문간방 여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년이 우리 아들을 죽였어. 이년아, 우리 아들 살려 내.’ 나는 살그머니 누나의 방을 빠져나와 내 방으로 들어가 잠든 척했다. 한동안 골목이 시끌시끌하더니 호루라기 소리도 나고,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 1974년 8월 15일, 텔레비전에서는 광복절 행사가 진행 중이었고, 중간에 문세광이 쏜 총탄에 한 나라의 국모였던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온통 흑백텔레비전이 빨아들였던 날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5개월 된 한 남자애의 죽음은 별것도 아닌 사건이 되었다. 다만 여섯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는 그날, 표정도 말도 잃어버렸다. 다음 날, 죽음이란 것도, 살인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상금이는 제 아버지의 손에 끌려 고아원으로 갔을 뿐이었다.


진주성은 정비 사업에 들어갔다. 1976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성안(안골)과 성 밖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처럼 집과 땅을 가진 사람은 보상금을 받았지만 문간방 여자처럼 세 들어 살던 사람은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떠나야 했다. 한꺼번에 딸과 아들을 잃어버린 문간방 남자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문간방 여자는 집을 나갔다. 우리도 신안면의 한 농촌 마을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나는 늘 그녀를 생각한다. 돌확에 핀 꽃 같았던 어린 상금이, 호박 샘 같았던 보조개를 지녔던 여자아이,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것 때문에 오십 평생을 행복과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면 거짓이 아니다. 어머니께도 말하지 못한 사실, 상금이 동생의 죽음에는 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끝내 말할 수 없었던. 그때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남강 천에 빨래를 가는 어머니를 따라나서려고 하면 어머니는 회초리를 들고 나를 못 따라오게 닦달하곤 했었다. 어린애는 절대로 물가에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던 어머니 말씀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어린 상금이, 표정도 말도 잃어버리고 두려움만 가득한 눈망울로 제 아버지 손에 끌려 나가던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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