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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ug 12. 2023

 자유! 내 안의 바람

자유! 내 안의 바람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무논은 하루가 다르게 파릇한 모 포기가 줄을 서고 밤이면 개구리는 엄청나게 운다. 옥수수 대는 날마다 한 치씩 키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아이를 업는다. 논밭은 가지런하게 정리정돈 되고 두둑이 지어지고 온갖 모종이 이식되어 땅내를 맡으며 뿌리를 뻗는다. 농사에 손을 놓아버린 논밭은 묵정이가 된다. 누군가가 소작을 얻어 부치기도 하지만 해마다 묵정이는 는다. 


 중부 지방에는 소나기가 온다지만 남녘은 햇살 난다. 빨래를 널고 새소리를 듣는다. 꺼병이 행렬도 지나가고 오목눈이와 딱새, 곤죽박이 새끼가 깨어나 삐악거린다. 세상은 날마다 조금씩 달라져도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고 과거만 줍는다. 나이 들수록 과거는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인간의 뇌도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로 회귀하면서도 나는 내 기억을 믿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일이거나 격지 않은 일이거나 분별심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내 이름이 있다. 내가 써서 발표한 글도 남의 글처럼 읽힐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신기해할 때도 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 그랬지. 겨우 기억을 헤집고 진실을 마주할 때도 있다. 몇 년 전, 두 형부가 두 달 간격으로 북망산으로 가셨다. 두 언니의 나이를 헤아리다 깜짝 놀랐다. 엊그제 같은데 몇 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 사람은 그냥 산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죽은 사람은 죽을 때 그 나이 대에 멈추지만 산 사람은 끝없이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던가. 


 까마귀가 운다. 까마귀가 성가시게 우는 날은 불안한 감정이 된다. 무슨 나쁜 일이 생기려나. 훠이훠이 까마귀를 쫒아 보내기도 했었다. 했었다고 하는 말은 과거형이다. 지금은 그저 까마귀가 우는구나. 짝을 찾거나 무리를 부르는 것이겠지. 어디 썩은 먹잇감을 찾은 것이겠지. 아침에 내다버린 음식물 찌꺼기를 나누어 먹자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고,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없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외롭다는 것도 내 마음의 반영이다. 외로움이 뭔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외로울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다.  


 수영장에 가니 만나는 사람마다 덥단다. 아직 더위를 못 느끼고 사는 내가 이상하다. 방바닥이 차면 몸이 시려서 어제저녁에도 군불을 땠는데. 냉방기를 돌린다는 말을 들으니 딴 세상 소식 같다. 물론 산기슭에 집이 있으니 기온이 동네와 차이는 난다. 집안에 있을 때는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게 느껴져 창문을 닫기도 한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사람도 있고 유난히 더위를 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추위도 더위도 별로 안 타는데 나이 들수록 몸이 시린 증상을 겪는다. 그러니 덥다는 말을 아직은 모르겠다. 


 나는 시원한 수영장 물이 좋아서 행복한데. 나와 달리 물이 차가워서 못 있겠다고 나가는 아낙도 있다. ‘트랙 몇 바퀴 돌아보세요. 물속에서도 땀나는 것이 느껴져요.’ 그래봤자 소용없다. ‘감기 들면 나만 손해야. 요새 감기는 붙었다하면 안 떨어져.’ 그녀는 근 이십 일을 병원 다니며 고생했단다. 냉 온욕을 즐기는 나는 겨울에도 냉탕을 들락거려야 개운하다. 더 노인이 되면 나도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게 될까. 어쩌면 생각의 차이 아닐까. 덥다 생각하면 더 덥게 느껴지고 춥다 생각하면 더 춥게 느껴지는 마음이 문제일 수도 있다. 


 수영장에 다녀오면 해가 설핏 기운다. 마당에 들어서면 벌써 서늘한 기운이 먼저 반긴다. 보리가 반긴다. 보리의 집에 햇볕이 안 든다. 개 집 앞에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오동나무 가지를 몇 개 잘라줘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햇볕이 몇 시간이라도 들어야 개집도 뽀송뽀송할 것이고 진드기 같은 물것도 덜할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습한 곳에서 살면 피부병이 생길 수 있다. 개를 풀어 키우고 싶지만 법에 저촉된다니 매어둘 수밖에 없다. 나보다 힘이 장사니 목사리를 해서 산책도 나가기 버겁다. 애들이 오면 보리를 산책 시킨다. 보리는 남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지 않을까. 보리의 대가리를 쓰다듬어주고 발길을 돌린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다. 미안하다.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자유를 갈구하지 않을까. 자유! 내 안의 바람일까. 나도 자유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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