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Aug 09. 2023

 뻐꾸기 우는 소리

뻐꾸기 우는 소리     



  이슬도 깨기 전에 뻐꾸기가 울었다. 몇 년 전까지 뻐꾸기 우는 소리를 들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계절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긴 여운을 남기는 울음소리가 애잔하게 들려 좋았다. 뻐꾸기 울음은 자잘한 텃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달랐다. 두 마리가 멀리 떨어져 서로를 부르는 전음(傳音) 같기도 하고 신록을 일깨우는 전음 같기도 해서 좋았다. 그 좋았던 뻐꾸기 우는 소리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 것은 탁란을 지켜보면 서다. 


 우리 집은 가정집이나 창고나 새들과 벌들이 집을 잘 짓는다. 특히 창고의 벽에 만들어 놓은 공구 통은 딱새나 곤줄박이의 은신처로 적당하다. 사람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천적으로부터 알이나 새끼를 보호받을 수 있어서 그럴까. 해마다 창고에 딱새 부부가 집을 짓고 알을 깠다. 새끼를 키워 분가를 하는 것을 봤다. 그 둥지에서 뻐꾸기 새끼의 탁란 과정을 지켜본 것이다. 딱새의 알을 밀어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를 봤다. 독식하며 몸을 키우는 뻐꾸기 새끼는 영악했다. 집을 완전히 부술 정도로 덩치 큰 뻐꾸기 새끼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딱새 부부의 야윈 모습을 봤다. 


 뻐꾸기 새끼가 날갯짓을 할 즈음 창고 근처에서 어미뻐꾸기가 애달프게 울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뻐꾸기 새끼는 어미 뻐꾸기를 따라 날아가고 딱새 부부는 먹이를 물고 와 텅 빈 둥지를 배외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업둥이로 집에 들어온 아이를 애지중지 키워놓으면 아이의 생부나 생모가 나타나 양부모와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뒤부터 뻐꾸기의 생존본능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뻐꾸기 우는 소리가 좋게 들리지 않았다. 입에 파란 벌레를 물고 둥지 곁을 돌던 딱새 부부의 모습만 떠올랐다.  


 오늘은 길섶이 소란스럽다. 관공서에서 나온 노무자들의 풀 베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풀숲에 집을 지은 새집 몇 개는 박살 나겠다. 덕분에 뻐꾸기 우는 소리가 뚝 그쳤다. 뻐꾸기가 울면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조용하다. 뻐꾸기 우는 소리가 그치자 덤불에 숨었던 새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저희들끼리 대화가 분분하다. 작은 새들도 덩치 큰 뻐꾸기를 겁내는 것일까. 혹 자기들 둥지를 갈취당할지 몰라서 몸을 사리는 것은 아닐까. 


 탁란인 줄도 모르고 남의 새끼를 키우는 곤줄박이나 딱새가 참 어리석고 바보 같았지만 동영상 하나를 보면서 이해하게 됐다. 오목눈이가 자기 알보다 세 배나 큰 뻐꾸기 알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밀어내기도 하고 남의 알인 줄 알면서도 품는 것을 봤다. 사람도 그렇다. 친 자식 아니라고 학대하는 양부모가 있는 반면 친 자식 이상으로 잘 키우는 양부모도 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끈끈하고 강하다는 말을 생각했다. 


 올해는 딱새 부부가 창고를 들락날락해도 일부러 둥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각자 가진 업대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법정 스님의 『영혼의 모음』을 폈다. 스님의 초기 작품 모음집이다. 수필집에서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발표한 작품도 만났다. ‘그때도 스님 글에서는 잔잔한 숲의 향기가 났구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젊은 혈기도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계 돌아가는 모습은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대통령이 바뀌고 국회의원이 바뀌었다지만 정치계 대물림 현상처럼 시국은 어수선하고 말 말 말잔치만 차고 넘친다.  


 나는 읽던 책을 엎어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예취기 소리도 멎고 뻐꾸기 울음도 멎었다. 조용하다. 오늘은 작은 형부 제삿날이다. 언니와 조카들 생각에 이어 아들을 떠올린다. 아들은 학생들을 인솔해서 제주도 탐방을 떠났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간단다. 중간 기착점인 추자도 선창이 눈에 선하다. 세월호, 가라앉는 배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 자식 같아서 함께 울었었다.


 아들이 제주도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기다리며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는다. 비록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남의 손에 새끼를 기르게 하지만 뻐꾸기는 모성을 가진 새가 아닐까. 그 새끼가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둥지 주변을 맴돌며 기다리지 않았을까. 뻐꾸기 울음소리를 자식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모성의 소리라고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밥에 대한 소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