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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ug 28. 2023

 시어머님과 영화

시어머님과 영화     


 딸이 할머니를 뵙겠다고 온단다. 병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미음을 끓였다. 녹두를 뭉근하게 삶고 찹쌀을 불렸다. 녹두와 찹쌀을 믹스기에 곱게 갈아 체에 걸렀다. 작은 쌀 알갱이도 목에 걸리면 재채기를 할 수 있다. 미음은 시간을 두고 뭉긋하게 끓여야 한다. 불 조절을 하면서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계속 저어줘야 한다. 마지막에 굵은소금으로 간을 한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감산에 다녀온 그에게 미음 한 그릇을 내밀었다. 


 “잘 끓였네. 엄마 덕에 녹두 미음도 먹어보네.”

 “미음 몇 통 따로 담아 가 볼까요? 간병인이 데워서 떠 먹여 드릴까?”

 “일단은 오늘 드실 것 두 통만 가져가지. 엄마가 드시는 것 봐서.”


 그렇게 또 병원에 갔다. 딸과 함께 어머님을 뵈었다. 어머님은 녹두 미음 한 그릇을 다 드셨다. 어머님의 눈에 생기도 돌아오고 의사표현도 하신다. 내 농담에 웃기도 하신다. 손녀를 보는 눈빛이 정답다. 편안한 어머님의 표정을 보니 좋다. 틀니를 뺀 합죽한 입이지만 웃는 모습이 배밀이하는 갓난쟁이 같다. 

 

 “우리 오메 이제 살아나셨네. 미음이 맛있어요?”

 고개를 끄덕끄덕 하신다. 간병인이 죽 남았으면 놔두고 가란다. 저녁에 데워서 드리겠단다. 그 말이 고마워서 간병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부탁해요. 울 엄니 잘 부탁해요.’ 간절함을 전했다. 노인의 폐렴은 약해도 치료하려면 3주 정도 걸린단다. 3주간 병원에 계신다고 건강을 회복하실 수 있을까. 여전히 간병인의 손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의식주 모두를 간병인 손에 맡겨야 한다. 돌아가실 때까지 편안하게 계시다가 자는 잠에 가셨으면 좋겠다. 지금 상태로는 요양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다. 집으로 모실 수는 있는데. 솔직히 중증환자를 간병할 자신이 없다. 편안하게 자는 잠에 돌아가시길 비는 수밖에.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타심도 내가 건강하고 살기가 편할 때 생기는 것은 아닐까. 내가 죽을 것 같을 때 이타심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도인이다. 노인이 되면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 진리다. 내가 아프니 내 몸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남편도 자식도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대신 아플 수도 없고, 나 대신 죽을 수도 없다. 어찌 이타심을 행하겠는가.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먼저다. 어머님을 집으로 모시고 내가 보살피는 것이 이타심이라면 내가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생각하는 이기심이 먼저다.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이 수년 동안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자식과 며느리도 막상 자신이 노인이 되면 요양원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집에서 죽고 싶다고 죽어지나. 스스로 의식주 해결 못하고 스스로 죽을 의지도 없다면 죽음이 거두어갈 때까지 남의 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은 아닐까. 배밀이하는 어린애로 변한 어머님을 바라보며 편안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편안해지지 않을까. 

 

 딸은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뵐 수 있어 좋단다. 할머니가 딸을 알아보셔서 좋았단다. 우리 집 남매는 두 어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도 같이 살아온 정이다. 딸은 할머니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미음도 먹여 드린다. 휴지로 입가도 닦아 드린다. 어머님의 표정이 한순간 흐뭇해진다. 눈동자에도 기운이 돌아왔다. 어머님께 면회시간이 끝났다고 가야 한다니까 고개를 끄덕이신다. 앉음새였던 침대를 편안하게 내려드렸다. 어머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셨다.  

 

 병원을 나왔다. 점심을 먹으러 시외로 빠져나갔다. 그 집은 채식 전문점이다. 생선 한 토막도 없는 비빔밥이지만 맛있다. 동동주 한 잔 나누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는 딸과 만나니 대화가 푸짐하다. 부녀간에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옆에 앉은 나는 말할 틈이 없다.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사는 그는 참 자상한 아버지다. 그림이야기에서 사회 전반에 관한 시사 토론이 이어진다. 

 

 셋이서 수영장에 갔다가 저녁 찬거리 사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대화는 저녁밥상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 그는 군불을 지피고 숯불에 고기구이용으로 쓰는 돌을 씻어 달군다. 돌 구이삼겹살은 입에서 살살 녹는다. 푸짐한 저녁 밥상에 소주가 빠질 소냐. 건배를 외치는 재미 또한 딸 덕이다. 쌈에 돼지고기를 쌌다. 먹기도 전에 침이 고인다. 그가 슬쩍 농을 친다. 

 

 “당신은 새 어금니 생겼으니 돼지고기 꼭꼭 씹어봐라. 씹는 맛이 있는지.” 

 “고기가 잘게 부서져 맛이 안 나네. 맷돌에 불린 콩을 가는 것 같다.”

 “처음엔 둔하고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다.”

 “겨우 이빨 한 개 박고?”

 밤은 깊어가고 딸과 그의 대화는 깊어만 간다. 

 

 마지막엔 영화 감상이다. 두 시간 반짜리 영화다. <슬픔의 삼각형>, 요즘 뜨는 영화란다.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서 유료영화다. 관람료를 냈다. 슬픈 영환데 아주 코믹하게 만들었다. 관객이 돈과 거래와 평등을 어떻게 보는가에 초점을 맞춘 영화, 모델과 모델 지망생의 관계, 부자 남자와 본처와 애첩 관계, 부자들을 위한 종사자들 사이에 평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평등은 어떻게 다른가.

 

 호화요트에 오른 부자와 종사자들, 선장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다. 요트는 난상 파티 중에 태풍을 만나 떠밀리다가 해적의 표적이 된다. 수류탄을 만들어 거부가 된 부부는 배에 떨어진 그 수류탄을 집어 든다. 결국 배는 폭발하고 외딴섬에 흘러들어 목숨을 건진 몇 사람은 참으로 낙천적이다. 피서 온 것처럼 웃고 즐긴다. 그들의 생존 방법에는 돈의 가치는 필요 없다. 생존방법을 아는 자가 강자다. 섬에서 불을 피울 수 있고, 음식을 조달할 수 있는 청소부 아줌마가 선장이 된다. 선장에게 굽실거리며 음식을 구걸하는 부자들, 죽은 아내가 해변에 떠밀려 왔는데. 아내의 시체를 안고 울면서 아내의 목걸이와 다이아반지를 빼는 남편, 선장이 된 청소부 아줌마는 모델 지망생 청년과 음식을 놓고 잠자리 거래를 한다. 

 

  청춘 남녀는 서로 질투하고 거짓말하면서 서로 이득을 먼저 챙기는. 사랑과 거리가 먼 관계, 당나귀 울음에 혼비백산하고, 그 당나귀를 죽여 배를 채우는 과정, 반전은 더 웃긴다. 유명 브랜드 가죽 백과 시계 등을 팔기 위해 나타난 장사치, 모델 여자와 선장 청소부 아줌마는 섬을 돌아보기로 하고 나갔다가 뜻밖에 해변 리조트를 발견한다. 엘리베이터가 놓인, 그곳에는 부와 권력이 지배하는 그들의 세상이다.

 

 그러나 무인도에서 선장이 되어 권력과 돈 맛을 알아버린 청소부 아줌마는 망설인다. 그곳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도 들키고 싶지도 않다. 그러려면 모델 여자를 죽여야 한다. 돌덩이를 숨기고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모델 여자에게 다가가는데. 모델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사회로 돌아가면 당신을 비서로 채용해도 좋을 것 같다 한다. 청소부 아줌마는 돌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장면이 바뀌어 모델지망생 남자는 얼굴과 몸에 생채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숲으로 달려가는 것이 끝이다. 

 

 황당한 대단원이 기다리지만 관객을 빨려 들게 하는 영화다. 코미디 같지만 전혀 코미디가 아닌 말 그대로 <슬픔의 삼각형>이었다. 평등을 부르짖는 부르주아적 사람들, 돈에 지배당하는 사람들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쳤다고 봐야 할까.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들에게 평등은 과연 어떤 것일까. 죽음보다 돈이 먼저일까. 돈보다 배고픔이 먼저일까. 먹을 것 앞에서 비굴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영화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끝났지만 세 사람은 조용히 앉았다가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202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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