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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30. 2023

밀밭 그림을 보며

밀밭 그림을 보며    


 

 내가 즐겨 찾는 홈에서 반 고흐의 밀밭 그림을 본다. 미술 평론가의 평을 읽을 생각도 않고 밀밭의 풍경에 꽂힌다. 연둣빛 하늘, 푸른 산, 노랑과 갈색의 뭉글뭉글한 밀밭이 구름 같다. 낫질을 하는 농부, 아무렇게나 묶어 놓은 밀단들, 구석에 선 가냘픈 나무 한 그루, 푸른 언덕 너머 골짝에 뚝 떨어져 있는 집, 화가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림을 본 후 그 작품에 대한 평론을 읽는다. 


 반 고흐가 정신병원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밀밭이란다. 화가의 생애를 간략하게 그려놓았다. 37살에 권총 자살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왜 그가 자살했는가. 그의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마음상태를 헤아리는 것이 미술평론일까. 작품에 작가의 심안을 담으면 그 작품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미술작품이든 문학작품이든 작가의 영혼이 담겨 있을 때 작품은 생명을 얻는다.


 미술이론을 전공한 딸에게 미술평론을 해 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딸은 어미보다 글을 잘 쓴다는 평을 듣는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 글 쓰는 재주를 타고 났다고 했었다. 그 딸이 요즘 그리는 그림을 보면 독특하고 감각적이면서 모호하다.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무제』라고 했었다. 제목이 없다. 제목이 없어서 제목이란다. 일단 작품은 발표를 하면 작가의 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주제로 그리고 썼던 간에 그 작품은 독자의 몫이 된다. 작가가 이러니저러니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반 고흐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던 그의 사후에 내려진 평가는 작가 본인이 아니라 미술평론가들 몫이었다. 훗날 그의 작품을 논할 때면 항상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인용된다. 그가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기에 그림의 평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지만 나는 그림을 그림 자체로 바로 보고 내가 느끼는 것이 좋다. 


 반 고흐의『수확하는 사람이 있는 밀밭』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밀밭이라기보다 불꽃이 뭉글뭉글 타 오르는 것 같다. 불 속을 걸어 들어가려는 화가의 모습이 반영된다. 그의 그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섬세한 곡선들,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기벽이 있다. 자존심과 자만심도 강하다. 자기세계에 빠져 있는 에고이스트다. 정신적 결함이 영혼의 풍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일지 모른다.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예술가의 혼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밖이 시끄럽다. 농부가 트럭에 고물을 싣고 있다. 재활용할 것들, 쇠붙이, 종이박스, 반납하는 술병들이다. ‘많이도 쟁여 놨었네. 저기 플라스틱이랑 깡통 모은 포대는 어쩌까?’ ‘저건 동네 쓰레기 차 오는 날 버려야지. 오늘은 고물상에 갖다 줄 것들이다.’ ‘고물 팔면 점심 값은 나오겠다.’ 둘이 사는데도 쓰레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지구를 지킨다는 차원에서 쓰레기는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데 플라스틱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일상에 편리한 것들이 차고 넘쳐 바다와 산을 오염시키고 거기 사는 동식물을 오염시킨다. 인간이 주범이다. 


 내가 화가라면 어떤 그림을 그릴까. 꽃과 나무, 숲과 하늘을 그릴까. 그것도 예쁘게 포장한 그림을 그릴지 모르겠다. 알맹이는 빠진 허영만 가득 찬 그림이 되지 않을까. 조금만 걷어내면 삶의 애환이 숨 쉬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다. 더 심오해지면 생활 속 쓰레기로 몸살 앓는 산짐승, 들짐승, 곤충들의 애환도 그릴 수 있겠다. 거기에 내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파괴하는 자연의 심장도 그릴 수 있겠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작가니 글로써 표현하고 싶은데 어렵다. 화가 반 고흐가 살다 간만큼 37년을 농촌에 붙박이로 살면서 써 낸 글들이 있지만 자연의 심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 


 하루를 열고 하루를 접는 일은 일생동안 반복된다. 사라지는 것은 사람이다. 삶의 본 모습이 어떠했던 평가는 가족과 후손, 독자의 몫이 아닐까. 다시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를 숲은 무심히 바라본다. 

                                 202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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