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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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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07. 2023

글로써 푸는 마음

글로써 푸는 마음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마음을 풀어내는 일이다. 가을이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가 청량하다. 크고 작은 잎사귀가 뒤집어지며 반짝거린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싱그러운 날이다. 바람은 속에 든 이물질을 흔들어내는 소리다. 바람이 불 때면 새들도 숨을 죽인다. 매미소리도 뚝 그쳤다. 검은 호랑나비가 나풀거리고 나뭇잎이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흔들림이 있어 살아있는 느낌일까. 


 친정 부모님 제사에 쓸 고사리를 챙겨 동생 집에 택배로 보냈다. 시어머님 초상치고 달도 안 가셨기에 이번 제사는 참석을 포기했다.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 제사가 음력 칠월 달에 일주일 간격으로 들었다. 제사의 의미도 살아있는 형제자매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로서 소중한 것은 아닐까. 서로 살기 바빠 만나기도 힘들다. 부모님 제사 때나 얼굴 볼 수 있는 형제자매와 사촌들, 지금은 사촌도 사라지는 추세다.


 사방에서 들리던 예초기 소리도 올해는 뜸하다. 몇 년 전까지 벌초 때면 말끔하게 단장되던 묏등이 올해는 아직 풀이 무성하다. 묏등을 관리하던 노인이 아픈 것일까. 돌아가신 것일까. 산에 들면 묵정 뫼가 더러 눈에 띈다. 자손이 잃어버린 뫼도 있을 것이고, 벌초할 여력이 없어 방치한 뫼도 있을 것이다. 그러구러 세월이 가면 봉분은 낮아져 평지가 되고 온갖 씨앗은 떨어져 숲이 된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길이 보인다. 


 뒤꼍 고무 통 위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 늘어지게 누워 낮잠을 잔다. 하얀 바탕에 검은 반점이 있는 고양이다. 음식 찌꺼기를 모아 바위 위에 올린다. 들 고양이도 텃세 싸움을 한다. 얼마 전에는 노란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가 배외하더니 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고양이에게 자리를 빼앗긴 모양이다. 새들 먹이로 주는 음식 찌꺼기를 고양이가 먹는다. ‘그래, 사이좋게 나누어 먹어라. 사람에게 길들지 마라. 자유롭게 살아라.’ 나는 군담을 한다.   


 나는 들 고양이에게 곁을 주지 않으려 한다. 숲에 낳은 들 고양이 새끼를 거두어 키운 적이 여러 번이다. 사람 손에 길들어 집 고양이가 되어 버리면 야생을 잃는다. 천적이 많은 숲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몇 번의 아픔을 겪은 후 거두지 않게 되었다. 정 붙이는 것은 쉬워도 정 떼기는 어렵다. 사심 없이 품에 안기는 고양이를 쓰다듬을 때면 그 부드러운 털, 가릉거리는 숨소리, 지그시 감은 눈에 깃든 신뢰감에 애착이 깃들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이건 사랑이 아니라 족쇄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밀고 당기기가 오히려 낫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마당에 노는 후투티 암수를 관찰하는 재미에 빠졌다. 호두가 익어가면 나타난다. 호두 도둑이지만 밉지 않다. 특이하게 생김새 덕일까. 부리는 길고 아래는 굽었다. 머리에 긴 깃이 있고 검은 반점이 있다. 날개는 흰 색과 검은 색이 교차한 띠 모양이다. 머리와 목은 갈색 털이다. 호두가 익어갈 즈음이면 자주 보인다. 산비둘기와 자리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후투티 부부가 이긴 것인지 마당을 차지했다. 아장거리며 마당을 거닌다. 사진을 찍으려고 현관문을 열면 금세 숲으로 날아간다. 청각이 무척 예민한 새다. 사방을 경계하면서 먹이를 찾는 것을 보면 태초부터 내려오는 새들의 본능이 아닐까. 

 

 올해는 일꾼 세 사람을 댔지만 선산 벌초를 다하지 못했다. 농부가 힘들어 일찍 일을 마쳤단다. 나머지 한 곳은 농부가 하면 된다. 벌초도 힘에 부치는 시간이 왔다. 해마다 직접 와서 벌초를 하던 도시 친구도 벌초 대행업을 찾는다. 벌초벌이를 하는 후배를 연결시켜 준다. 농부의 죽마고우 남해 친구도 벌초 철이면 부부가 직접 와서 벌초를 하고 갔었다. 올해는 그 친구가 아프다. 그 친구의 선산은 가깝다. 새벽에 농부가 직접 벌초를 하고 왔다. 


 친구 부인이 전화를 했다. ‘언니, 계좌번호 줘. 벌초 비 보낼게.’ 그녀와 나는 인연이 깊다. 너나들이 하는 참 좋은 사이다. ‘복 짓게 해 줘 고마운데 벌초 비라니. 고마 됐다.’ 거절했다. '안돼, 안돼, 고생했는데.'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인연은 돌고 도는 거다. 정을 주고받는 것도 공평하다. 오랜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그녀에게 준 것보다 그녀가 내게 준 것이 더 많다.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하던가. 작은 배려도 고맙게 받아들일 때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더 행복해진다. 한동안 시부모님으로 인해 힘들었던 마음을 그녀 덕에 푼다. 농부의 형제자매들에 대해 가졌던 마음도 애증의 척도 아닐까. 깊은 정을 주었기에 내가 받은 상처도 그만큼 깊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나는 글로서 나를 풀고 있다. 선들거리는 가을바람에 내 몸속의 찌꺼기를 말끔히 날려버리고 싶다. 악연이든 선연이든 인연의 굴레를 돌며 살다 가는 것이 사람이다. 내게 상처를 주면 악연인가 보다 생각하면 내가 편하고 내게 복을 주면 선연인가 보다 생각하면 된다. 전생에 내가 무엇을 베풀었을까. 전생 복 다 까먹지 않게 이생에서 나도 복 짓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에 품는다. 오가는 것이 모두 소중한 인연이다.  

                          202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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