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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19. 2023

과꽃과 할머니

 과꽃과 할머니     



 나비바늘꽃이 참 곱게 핀 강둑을 걸었다. 외래종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바늘나비꽃으로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다. 나비바늘이나 바늘나비나 마찬가지라며 씩 웃었다. 색깔도 흰색과 분홍에 가까운 꽃이 있는가 하면 입술 색처럼 선홍색 꽃도 있었다. 흰빛이 많은 꽃보다 붉은빛이 많은 꽃이 더 고와 보인다. 가느다란 줄기에 나비처럼 앉은 꽃 모양새가 내 마음을 훔친다. 꽃을 쓰다듬으니 ‘과꽃이 어떻게 생겼지?’ 농부가 물었다. 


 과꽃, 그래 어릴 적에는 시골 집집마다 작은 화단에 과꽃과 붉은 맨드라미, 채송화가 있었다. 골목길 양쪽으로 키 큰 코스모스와 그 앞에 키 낮은 과꽃이 색깔별로 피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꽃은 보랏빛이었다. 꽃의 가운데는 노란 꽃술이 있다. 과꽃을 할머니들은 과부 꽃이라고 불렀던 기억도 소환했다. 과부를 지켜낸 전설을 가진 꽃이라던가. 그 과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저절로 동요가 떠오른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강둑을 나와 마을길을 달릴 때다 어느 집 화단에 과꽃이 피어 있었다. ‘여보, 저기, 저기, 과꽃이야.’ 내가 소리치자 농부는 차를 후진해서 화단 쪽으로 갖다 댔다. 보랏빛과 붉은빛 과꽃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수줍어했다. ‘저게 과꽃이구나. 예전에는 동네서 흔히 보던 꽃인데 언제부턴지 사라져 버리고 없더라.’ 농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려서 시골집 화단에는 흔히 채송화, 맨드라미, 과꽃, 달리아 꽃이 있었다. 가을 산과 들에는 쑥부쟁이, 구절초, 코스모스가 있었다. 요즘은 외래종 노랑 금계국이 지천에 피어난다. 


 꽃도 시절을 탄다. 사회가 변하면서 외래종 꽃들이 토종처럼 자리를 잡았다. 토종 풀보다 외래종 풀이 더 흔해진 들이다. 꽃이나 풀만 그런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외래종이 판을 친다. 누군가 외국에서 들여와 아끼고 사랑하다 식상해서 내다 버린 것들이 자리를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 소멸하지 않으려면 어떤 환경에서든 적응하고 뿌리를 내린다. 인간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실수가 생태계를 교란시킨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은 잊힌 초가집 전경이 떠오른다. 아래채 마구간에는 누렁 소 한 마리 선하품을 하고, 지붕에는 박꽃이 환하게 피어있던 전경이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곰방대에 연초를 재우셨다. 꾹꾹 눌러 담은 담뱃대를 화롯불에 댔다. 뻐끔뻐끔 빨아서 불이 붙으면 볼이 홀쭉하도록 빨아들이셨다. 하얀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뿜어내며 먼산바라기를 하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뭔가에 화가 나면 담뱃대로 화롯가를 탁탁 치시던 할머니, 손녀딸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면 빙그레 웃으시던 할머니 모습이 그립다.  


 그때 장독간 앞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과꽃이 살포시 고개를 숙였고 그 아래서 채송화가 올려다봤다. 채송화는 엄마를 닮은 꽃, 과꽃은 할머니를 닮은 꽃이었다. 밥때가 되면 초가집 지붕 위로 오르던 연기, 대나무 사이로 퍼져나가던 하얀 뭉게구름이 있었다. 철부지 손녀는 할머니의 곰방대를 빼앗아 뻐끔뻐끔 빨아보고 눈물이 나도록 기침을 하면 할머니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파안대소했다. ‘이늠아, 할미 담배는 근심초란다. 가심이 후련해진다. 아나?’ 하셨다. 


 할머니는 삼십 대 과부셨다. 삼 남매를 혼자 손으로 키우셨다. 억척스럽지 않으면 가난한 산촌 삶을 면할 수 없었으리라. 오지랖 넓고 호랑이 같았던 할머니를 나는 여장부로 봤었다. 꼬맹이 남자애들이 나를 괴롭힐 때도 할머니께 일러바치면 그 집에 찾아가 그 아이의 고추를 따버린다고 난리를 피우셨다. 지금 생각하면 엄포였지만 새파랗게 질린 남자애가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우리 할매한테 일러준다.’며 엄포를 놓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할머니의 손녀 사랑을 과꽃으로 피어난다. 


 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들길을 돌고 돌아 집으로 오는데 보랏빛 과꽃이 따라온다.  

                     202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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