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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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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Nov 15. 2023

우문에 현답

우문에 현답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문이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인간의 정해진 길을 꾸준히 걷고 있는 셈이다. 일상의 타래를 감는 일도 푸는 일도 정해진 길을 가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노인의 길을 걷는 우리는 아침에 잠이 깨면 불면을 이야기한다. 잠이 안 온다. 잠을 못 잤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입맛이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은 벌써 지친다. 걷기 싫어도 걸어야 하고, 움직이기 싫어도 움직여야 하는 노인의 길이 참 멀다. 


 “어머님아버님은 이런 상태로 구십 중반까지 어떻게 사셨을까. 우리가 옆에 있어 살았는지 모르겠네.”

 그런 너스레도 푼다. 어쩌면 두 어른이 오래 생존했기에 우리가 먼저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마음이 빨리 늙어버리니 몸도 따라 늙어간 것은 아닐까. 새벽형인 농부가 독감을 심하게 앓고 일어나서 그런지 아직 맥을 못 춘다. 어제 단감 작업하고 죽겠단다. 농촌은 팔십이 넘어도 농사를 짓는 노인들이 사는 세상이다. ‘힘들다. 죽겠다.’ 하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은 농토를 묵정이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고 노동에 인이 박힌 오랜 습관일지 모른다.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요.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우리 동네는 팔십이 넘은 노인이 이장을 한다. 평생을 한 곳에 붙박이로 살아온 노인은 자신이 노인이란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다. 마음이 젊기 때문일까. 노인회에서 부부동반 밥 먹으러 간다며 오란다. 노인회 회원 자격을 갖춘 우리는 새내기 노인대열에 섰다. 농부도 나도 ‘몸이 안 좋아 참석이 불가합니다.’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팔십 노인이 주류를 이루고 구십 노인도 흔한 세상이다. 칠십 대는 노인 축에도 못 낀다. 팔십 노인에게 우리는 젊은이다. 늙어가는 농촌,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사람이 는다지만 우리 동네는 여전히 늙어간다.


 미국 캐나다에서 오렌지 책방을 하는 사람이 있다. 오렌지 북에 내 소설 『끈과 매듭』을 낭독한다고 허락을 구했었다. 그러라고 했다. 오늘 낭독 소식을 들었다. 엘에이에 사는 수필가와 호주에 사는 친구가 전한 소식이다. 내 홈으로 옮겨 들어보고 싶으나 어떻게 하는지 몰라 고맙다는 인사만 문자로 남겼다. 내가 쓴 소설이 공중파를 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다. 글쎄! 요즘 오디오북 낭독이 유행인 것 같다. 자신의 소설이 낭독된다고 광고하는 것을 보면 자랑스러운 것 같다. 이미 발표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독자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집안에 고인 먼지를 닦아낸다. 일상생활도 버거워지는 나날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주검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까. ‘인간은 어차피 한 번은 죽게 된다. 사는 날까지 잘 살 생각만 해야지.’ 그런 긍정적인 말도 듣는다. 열심히 운동하고,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책 읽기가 자꾸 어려워진다. 정신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지던 시절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시간을 그냥 놀리는 것이 싫어서 부지런을 떨던 시절도 있었다. 내 인생의 정점은 어디였을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현재의 내 자리에서 나답게 살다가 조용히 떠날 수 있다면 아니 고마우랴. 


 단감 못난이 중 굵고 괜찮은 것을 챙겨 수영장에 갔다. 그 시간대에 오는 지인께 나누어 주었다. ‘요새 단감도 비싼데. 돈 하지 이렇게 나누어주면 손해잖아. 자기 집 단감은 진짜 굵고 맛있어. 고마워’ 이런 말을 들을 때 ‘농사는 농부가 짓는데 인사는 제가 받아요. 맛있게 드세요. 고맙습니다.’이런 대답을 한다. 행복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는데. 별 것도 아닌 작은 나눔으로 나는 큰 보답을 받았다.  


 저녁에 닭 한 마리를 푹 고아 식탁에 올렸다. 중노동을 해야 할 농부의 입맛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닭이 왜 이래 맛이 없노. 넣을 건 다 넣었는데.’ 닭살을 소금에 찍으며 혼잣말을 했다. 농부의 젓가락질도 별로다. 닭이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입맛을 잃어서 그런 줄 알면서 닭 탓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음식 까탈이 심했던 시아버님을 떠올린다. 맛있을 때 많이 먹어 두라던 노인들 말씀이 진리다. 한 번 잃은 입맛은 좀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집 밥도, 외식도 싫다. 먹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그런데도 삼시 세 끼는 꼬박꼬박 챙긴다. 살기 위해선가. 살아있기 때문인가. 우문에 현답이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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