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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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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Nov 28. 2023

달달한 날

 달달한 날      



 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서릿발이 내리고 얼음이 언다. 마당의 잔디는 누렇게 변했고, 가랑잎이 떨어져 구른다. 빗질할 일 없는 잔디밭이라 구르는 마른 잎조차 운치 있다. 거기 비가 내리고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이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는 감성을 부른다. 시인은 타고나는 것일까. 마음의 소리에 귀와 눈을 열면 저절로 스며드는 것이 시가 아닐까. 언어의 유희라 부를 필요도 없이 잊고 있던 그리움 한 자락 불쑥 떠올라 센티해진다.


 단감 박스를 들고 오는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편다. 수영장 가는 길에 주문받은 단감을 택배로 부치려는 거다. 단감을 수확할 때는 주문 물량이 많아 택배기사를 불러야 했지만 단감 수확이 끝나자 주문도 뜸해진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아는 모양이다. 봉지 작업 하지 않은 단감을 선호하는 사람과 봉지 작업한 단감을 선호하는 사람들 선이 그어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장단감을 좋아한다. 다섯 개들이 봉지 작업을 하여 저장고에 들어간 단감은 오래 저장되고 숙성되어 당도도 더 높다. 온도만 알맞게 저장하면 내년 봄까지도 싱싱하고 아삭한 단감을 먹을 수 있다. 물론 저장 단감은 가격이 알 감 때보다 높다. 인건비와 포장비와 저장비가 더 들기 때문이다. 도매상에서도 봉지 단감은 가격을 더 책정해 준다. 알 감으로 남아있던 단감은 다 팔았다. 의외로 단감 주문이 꾸준히 들어온다. 이제는 봉지 작업한 단감을 보내준다. 가격은 올리지 않았다. 


 가락동 공판장 사이트에 들어가 단감 가격 변동을 알아봤다. 가격이 높다. 11번가나 쇼핑몰의 단감 가격을 비교하다가 놀라 자빠질 뻔했다. 단감 10킬로 31~ 40과 기준선이 9만 원을 넘는다. 나는 은근히 우리 집 단감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비싼 게 아니었다. 우리 집 단감처럼 굵고 아삭하고 달달한 단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역대 최곳값을 웃돈다. 어제 단감을 재 주문했던 문우가 그랬다. ‘언니 집 단감 먹다가 다른 단감 못 먹겠어요. 농사를 어떻게 지었기에 그리 맛있어요?’한다. 


 농사는 농부의 정성이다. 그만큼 투자도 한다. 기존 거름도 좋은 걸 쓰고 유박 거름도 내고 가능하면 비료는 적게 쓰고 미생물도 뿌리고 농부가 직접 만든 친환경 농약도 쓰고 부득이 사야 할 농약은 적게 쓴다. 덕분에 못난이가 많지만 단감은 아삭아삭하고 저장성도 좋고 달다는 평을 받는다. 기분 좋은 것은 못난이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거다. 흠집이 있어도 굵고 맛난 단감 반값에 먹을 수 있는데 선호하지 않을 수 있겠나. 오죽하면 못난이 농사지어야겠다고 우스개를 날릴까.


 단감 수확 철이면 고단해도 즐겁다. 못난이라도 나눌 수 있어 좋다. 퍼주기 좋아하는 나에게 눈총을 주면서도 농부 역시 퍼내기에 일조한다. 단감 맛있더라는 인사말을 듣는 것이 좋아서는 아닐까. 지인이 못난이 한 봉지를 갖다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수영장을 가면서 챙겨놨던 못난이를 들고 갔다. 하필이면 못난이 주문했던 지인이 아파서 며칠 째 결석이란다. 전화번호도 알 수 없고, 가져갔던 단감을 도로 가져오기도 귀찮아 나누어 드시라며 수영장 사무실에 줬다. 단감 맛있더라는 인사를 듣는 게 즐겁다.


 함께 수영을 즐기는 언니가 혀를 찬다. ‘너는 참 통도 크다. 저게 다 돈인데.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퍼내면 참 헤프다. 고생해서 농사지은 건데 한 푼이라도 받고 팔아야지.’ 충고는 고맙다. 나는 어차피 나누는 것이라면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보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을 수 있길 바란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노는 회관에 갖다 드리는 것도 혼자 독식하기보다 여럿이 나눌 수 있길 바라서다. 내 것보다 우리 것이 좋다. 


 택배사장님도 ‘이런 거 안 하는데. 단감 맛있는 집 알려달라는 말에 선뜻 주문을 받아왔어요.’한다. ‘주문받은 단감 배달해 주고 택배비는 꼭 챙기세요.’ 더구나 친척들 모임에 선물한다며 여남 박스를 주문해 가는 사장님이다. ‘우리 집 단감 비싼데. 무리하지는 마세요.’ 하니 ‘선물은 맛있고 좋은 것을 해야지요.’하며 웃는다. 선한 그 웃음이 좋다. 사방 천지 단감 농가를 돌며 택배 일을 하니 어느 집 단감이 맛이 있고 없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촌부 인심은 아직 살아있다. 택배를 오가면 단감 한 봉지라도 선물로 받기 때문이다. 작은 고장이다. 단감과 대봉농가라면 택배 사장님 손바닥 안이다. 


 택배를 부치고 수영장으로 간다. 농부랑 팔짱을 끼고 걷는다. 다리 부실한 내 보조에 맞추느라 농부는 거북이걸음이고 나는 잰걸음이다. 누가 보면 참 다정한 부부라고 생각하겠지. 우리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오가는 풍경을 본 지인은 풍기문란으로 신고해야겠단다. 이순 후반에 든 여자들 로망이 주말부부라든가. ‘징그럽다. 같이 다니기도 싫다.’ 남편과 같이 다니기 싫다고 너스레를 푸는 선후배도 많다. 속마음까지 그럴까. 부부로 오래 살다 보면 살가운 정도 없고, 미운 정만 남는다는 말도 있다. 미운 정도 정이다. 미운 정을 뒤집으면 예쁜 정이 되지 않을까. 늙어가는 우리, 혼자 보다 둘이 낫다고 생각하면 부부가 반목할 일도 적지 않을까. 

 

 병원에 가서 피를 뽑았다. 쯔쯔까무시 병을 앓은 후 간 수치가 높단다. 간수치가 정상치가 되어야 한다니 의사 선생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 사이 농부는 튀긴 통닭 한 마리를 사 온다. 비 오는 날은 맥주에 통닭이지. 둘이 마주 앉아 튀긴 닭을 저녁 대신 뜯었다. 밥을 손으로 조물주물 뭉쳐 그 위에 닭살 한 줄 얹고 김치 걸쳐 먹으면 한 맛 더 있다. 창밖은 겨울비가 속살거리고 거실의 난로는 활활 타오르고 겨울밤은 깊어간다.

        202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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