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꽃 전설 17

by 박래여

17. 소용돌이 속의 생명들



권섭아, 나에게 남편이라는 사람은 사랑이 너무 진해서 스스로 내 곁을 떠난 사람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1948년 우리나라는 미군과 소련이 서로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해서 나라를 두 동강으로 갈랐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하지 못하고 강대국들의 힘으로 독립을 했으니 다시 그 강대국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남한은 단독정부 수립을 발표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뽑은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때 좌익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지하로 숨거나 북한으로 갔지. 남편은 좌익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서울 사람은 세포 책으로 여운형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을 따라 지하로 숨어 다니다가 내가 친정으로 갔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단다. 그 사람은 나에 대해 다 파악하고 있었단다. 그는 좌익분자들의 검거 선풍이 불고 있었으니 고향으로 갈 수도 없었다. 요 주의 인물로 찍혔으니 말이다. 그 합천 골짝에도 감시의 눈이 늘 붙어 있었지.

1950년 4월경 농지 개혁과 분배가 단행되고, 5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었지. 독립 국가로서 정식으로 문을 연 해였지만 세상은 어수선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가 어떤 꼴이든지 나에겐 관심 밖이었다. 여자가 세상일에 대해서 뭘 알겠냐만 여자라서가 아니라 농촌 실정이 그랬다. 농민들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지 상관없이 농사를 지어야 했고 관청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말 한마디 잘 못했다가는 좌익으로 몰려 잡혀 들어가는 시절이었으니까. 독립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세태였다. 소작인은 여전히 소작인이었고, 지주는 여전히 지주였으니까. 큰 집의 수난은 아마 그 임시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오빠는 세상살이에 무관하게 살았다. 아무런 사상도 없이 뚜렷한 이념도 없이 신탁이니, 반탁이니, 민주니, 공산주의니, 또는 무정부주의자라든가, 사회주의라든가 하는 것에 관심도 없이 그저 조그마한 마을의 천석지기 지주의 아들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하더군. 내가 시집가는 것을 보고 학도병을 지원해 갔던 오빠였기에. 큰 아버지 손에 끌려 다시 집으로 오긴 했지만 세상 살 맛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어. 세상이 조용해지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는 큰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다지. 그러다가 내가 다시 친정으로 왔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었어. 사람 마음이란 것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겠더군. 피 끓는 남녀여서 일까. 나는 다시 오빠와 얽힐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나 때문에 그 좋은 혼처 자리 다 마다하면서 세상이 조용해지면 미국으로 함께 떠나자고 굳은 약속을 하고 있었지.

그러나 큰 어머니는 억지 혼사를 서둘렀지.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오빠가 학도병으로 지원해서 또 언제 사라질지 불안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오빠가 선 본 처녀에게 홀딱 빠졌다고 소문을 냈지만 사실은 그 처녀가 오빠를 본 순간 홀딱 반했다더구나. 오빠에게 시집 못 가면 죽겠다고 소동을 벌리는 통에 큰 어머니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며 오빠의 혼사를 매듭지은 것이었다. 나 역시 오빠의 혼인을 적극 밀었지. 이미 나는 시집살이를 모지게 한 아낙이었으니까. 사람의 도리는 알고 있었다. 오빠와 나는 더 이상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란 것, 하늘이 무섭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빠가 장가가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네가 알다시피 결혼식을 앞둔 그날 밤, 나는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오빠를 병신으로 만든 사람은 내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 남편을 저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남편이 두려웠다. 자결을 하라고 강요를 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까. 그 사람은 내 앞에서 펑펑 울면서 외쳤다. 당신을 잃는다는 것은 차라리 나 보고 죽으란 소리보다 더 하다고. 처음에 나는 오빠가 다리나 팔이 하나쯤 잘려 나간 줄만 알았다. 몸을 조금 불편하게 했을 뿐이라며

“만약 당신이 내한테서 도망을 치면 그 길로 당신 오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앨 것이며, 부르주아적 지주로서 당신 큰 집은 쑥대밭이 될 것이오.”

나는 그 사람의 눈 속에서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도망을 친다고 그 사람이 나를 찾아내지 못 할리도 없을 것 같고 또 어디로 도망을 가느냐 말이다. 나는 이미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몸인 데다. 세상은 여자들이 혼자서 살아가기엔 부적합한 곳이란 것은 너도 알겠지. 요즘 세상에도 여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인데 그 당시야 더 했었다. 자유란 것이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별 것 아닌 것 같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를 지탱해 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곤 한다. 부처님의 등에 기대서 내 한 목숨 이어 왔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지만 너를 잘 키웠다는 자부심은 있다. 너에게는 몹쓸 어미겠지만 어미가 자식 생각하는 마음을 너도 알 나이가 되었으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6.25가 터졌을 때 나는 지리산 자락에 있었다. 남편을 따라 산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남편에게 나는 짐일 수도 있었지만 부부라는 것이 남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받침대가 되어 주었고, 안전하게 농가를 파고들어 농민들에게 사상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서울 손님이 지시한 것도 그것이었던 모양인지 남편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좌익을 하는 사람의 알선으로 지리산 자락에 있는 못 골이라는 곳에서 오두막을 짓고 보금자리를 털었다. 그때 이미 너는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남편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당신은 그 아이를 꼭 낳아야 할 책임이 있어.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을 죽도록 사랑한다면,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 믿는다면, 가정을 버릴 만큼 참으로 질긴 것이었다면 낳아야 할 것이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마지막 사랑일 테니까. 또한 그 아이는 우리의 끈이 되어 줄 것이니까. 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지. 그 처남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오.”

요즘 같으면 봉합수술을 할 수도 있고, 돈만 있으면 인공 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수도 있지만 그 시절엔 그런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남편이 하는 말의 뜻을 그때는 몰랐다. ‘오빠가 그날 밤에 병신이 되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의 아내로 살아야 했다. 왠지 아니? 너를 가졌으니까. 너를 가진 나는 입덧을 심하게 했다. 남편은 신 것이 먹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설익은 풍개를 따다 주었고, 쌀밥이 먹고 싶다고 하면 쌀을 팔아다 주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남편은 일등 농사꾼이기도 했지만 장사꾼이기도 했다. 산채며 약초를 거두어다 외지에 갖다 팔았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는 한 달에 보름은 떨어져 살아야 했다. 나는 그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남편을 마주 보고 산다는 것이 내겐 고문과 같았으니까.

전쟁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이웃사람들의 신망을 얻으면서 단란한 가족으로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해 유월, 전쟁이 터졌다. 서울을 정복한 북한 인민군은 장수를 거쳐 전라도의 육십 령 고개를 넘어서 산청 지방에 도착한 것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경이었다. 남편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했다. 가난하고 핍박만 받고 살아온 우리 농민을 해방시켜 주려온 사람들이라며 환영식을 준비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없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겠니. 똑 같이 일하고 똑 같이 분배받아먹고사는 세상, 국가에서 공부도 시켜 주고, 옷이며 일용품까지 무료로 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니.

마을 사람들의 놀라움은 컸었다. 늘 남의 집 일을 제 집안일처럼 돌봐 주고, 조용하던 성품이었던 남편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섰으니 말이다. 소학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하더구나.

“새댁 신랑이 샌님인 줄만 알았더니 사람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단 말이 맞는구먼.”

“공산주의가 그리 좋은 세상을 맹글어 준담사 싫다 쿨 사람이 누가 있것노.”

“참 젊은 사람이 용하기도 하제. 나라에서 금하는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리고로 하고 댕긴 것 보모 기가 차구마는.”

“내 알아봤니라. 장날 마동 꼴짝 사람들이 쬐깬씩 맹글어 오는 나물거리랑 약 뿌리들을 달라는 금액을 줌시로 쳐 갈 때 알아봤다. 금을 후히 주니 진주 장꾼들이 싫어 했거마. 다 우리 가난뱅이들 도울라꼬 그랬던 기라. 당의 명령을 수행한 거뿐이라 안 하나.”

“참말로 저 사람 말 맹키로 살기 존 세상이 되모 올매나 좋것노.”

그러나 가난한 농민을 해방시켜 주겠다던 인민군이 지배하던 기간은 겨우 두 달여 기간뿐이었다. 그 사이 그들이 농민에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 남자들을 모아놓고 군사 훈련시킨 것과 벼며 보리 등, 과실과 잡곡류에 이르기까지 낱알을 세고, 감나무에 달린 감을 세고, 밤나무의 밤송이를 세고, 옥수수와 조의 알갱이까지 세는데 농민들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현물세를 징수하기 위한 자료 조사를 한다는 명목이지만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 시절의 혹독한 공출에도 없었던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여론은 다시 뒤숭숭해지고 공산주의의 허를 보게 되자 사람들은 은근히 두려워하면서 좌익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산과 들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고, 가을 들판이 황금빛으로 일렁이게 된 구월 어느 날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길 떠날 차비를 하라고 일렀다. 나는 산달이라 몸이 무거웠다. 그래도 그 사람이 간단한 가재도구만 챙겨 따라나서라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다. 그 사람과 도착한 곳이 부산 당감동이었다. 작은 방 하나를 빌어 놓았더구나. 혹시 모르니 신분을 완전히 감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자신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살아 있으면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고는 지리산으로 간다며 떠났다. 나는 너를 낳았다. 남편은 가끔 들려서 양식을 대 주고는 말없이 떠나곤 했다. 나는 남편의 얼굴에서 전쟁이 절망적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나에게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봇짐장수였다.

전쟁은 끝났다. 말 그대로 난장판 전쟁은 3년을 끌다가 허무하게 끝났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은연중에 그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다. 그 사람은 너를 무척 사랑스러워했었다. 그것이 내게는 심한 회초리가 되어 내 심장을 때렸지만. 차라리 그 사람이 나와 너를 싸잡아 미워하고 증오했다면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기다려졌다. 오래 그 자리에서 기다렸었다.

“이 아이는 내 아이요. 내 호적에 올리소.”

나는 그 말을 따르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슴은 더 깊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갈기갈기 찢어졌을지 모르나 너를 위해서는 그러고 싶었다. 너를 영원히 그 사람의 아들로 묻어두고 싶었다. 그 사람의 본심이 너를 자신의 아이로 키우고 싶어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은 영영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시댁으로 갈 수도 없었다. 너를 그 집 아이라고 할 수는 더욱 없었다. 너는 오빠의 판박이였으니까. 씨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때 죽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나는 혼자였다. 너를 안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었다. 그러나 남편의 어깨너머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장사하는 것이었다. 무작정 자갈치 시장으로 나갔지. 그래서 너는 자갈치 시장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나는 살아야 했고 어떻게든 너를 키워야 했으니까.

권섭아, 너에게 나는 몹쓸 어미지? 이렇게라도 마음을 털고 나니 조금은 가뿐하구나.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제 조상의 내력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네가 가끔 내게 너의 아버지에 대해서 물을 때 내가 곤혹스러워했던 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니까. 너는 오빠의 유일한 혈육이거니와 큰 집의 기둥인 셈이다.

큰 아버지는 북한군이 주둔해 있던 그 두 달 동안에 돌아가셨다. 인민재판에 희생되었다고 들었다. 살림은 살림대로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면서 고방은 비어 갔고, 진주 고보까지 나와 시집 가 사는 두 언니까지 합세해 살림을 빼내갔다. 인색하고 잔정 없기로 소문났던 큰 어머니는 소작인들의 원성을 많이 사고 있었으니 전쟁이 끝날 동안 낮에는 경찰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밤에는 공비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재산을 빼앗겼다고 한다. 잘 생기고 맘씨 좋았던 오빠는 그래도 이웃의 신망을 받았던 터라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목숨은 부지했지만 오빠는 행복하지 못했다. 늘 병색 짙은 얼굴로 술만 마시며 살았다고 했다. 나 때문에 큰 집과 우리 집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뒷공론에 견디지 못한 것은 우리 집만이 아니라 당사자인 오빠였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버림받아야 했으니까. 그건 불 보듯 뻔한 이치였다. 남자 구실을 못하는 사내가 어찌 아내를 건사할 수 있겠니. 그것도 제 사촌 누이와 그랬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니 그 심정은 죽고만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빠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더구나.

내가 몹쓸 년이지. 아들아, 나를 용서해 주겠니? 이 나이가 되도록 살면서 한시도 마음 편해 본 적이 없었다. 너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내 남편을 생각하면 두 사람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다. 나 하나로 인해 단란했던 우리 집안과 큰 집, 그리고 그 사람의 집까지도 풍비박산이 난 셈이 아니겠니.

아마도 내 남편은 스스로 죽음의 길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너의 외삼촌에게서 들은 이약이지만 휴전이 되기 얼마 전에 꼭 한번 밤손님으로 처가에 들렸더란다. 아버지께서는 혹시 나를 찾으려 왔는가 싶어서 간이 조마조마했는데 내 안부는 묻지도 않고 지리산으로 거점을 옮기는 중이라면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 줄 수 없느냐고 하드란다. 아버지는 자수하라고 권했지만 그 사람은 피식 웃으면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시 낍니까.”

하드란다.

아버지는 할 말을 잃었단다. 딸자식 가진 부모는 지은 죄가 없어도 아들 가진 부모 앞에서 주눅이 든다는 말이 있다. 몇 년 만에 찾아든 밤손님이 사위였는데 그 딸은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 죄를 짓고 도망을 가고 없으니 제 마누라 내놓으라고 엄포라도 놓는다면 영락없이 당해야 할 처지였는데 용서해 주겠느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더란다.

“그 아가 집에 없는 줄 자네 아는가?”

아버지가 되묻자.

“소문이 무성하데예.”

“면목이 없네.”

“잘 됐지예. 지 같은 놈 믿어 봤자 평생 고생인데.”

담담하게 말하면서 떠났다 했다.

왜 그 사람은 나를 데리고 나와 함께 살았다는 이약을 하지 않은 것일까. 내가 다시는 친정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어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탓일까. 자기 하나로 인해 돌아가신 나의 시아버님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너는 그 사람의 아이로 자랐어야 했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내가 너를 지금처럼 잘 키울 수 있었을까. 너는 농사꾼이 되어 있을지 모르지. 그 산골에서 공부시킬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아들아. 이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이 편지를 읽으며 네가 느낄 아픔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구나. 잘 살아야 한다. 영덕이 잘 키우고. 그 아이 대에 가면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티 없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란 것을 명심하여라. 너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그래서 너에게 그 집과 논 서마지기를 남기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것 같아서 혼자 결정해서 처리했다. 섭섭하게 생각 말거라. 내가 늘 지켜보마.

어머니의 편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쓴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그 공책을 덮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아내의 손길이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내가 어깨너머로 이 글을 다 읽었다면 그 표정이 어떨까. 아내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두려웠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내 나이는 이제 감정을 자재할 수 있을 만큼 단련되어 있다고 해야 옳을 나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내의 반응이 무서웠다.

“울지 마이소. 어머이가 참 현명한 분입니더.”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공책을 어깨너머로 들어 올렸다. 아내는 말없이 그 공책을 받았다.

“당신이 하도 열중해 있어서 호기심에 넘겨다보면서 대충 읽었십니더.”

“할 말이 없소.”

“당신 잘못이 아닙니더. 물론 어머이 잘못도 아니고예. 시절 탓이라 생각 하입시더. 그나저나 우리 어머이 참 대단한 분입니더. 외삼촌이란 분이 나타날 때 대강 짐작은 했지예. 어머이는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분이 아닐까하고예.”

“당신은 내가 괴물 겉이 안 보이나?”

“그라지 마이소.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예. 전쟁 통에 피난길에서 부모 잃고 헤어진 남매가 있었는데 서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피붙이가 있었는지도 몰랐다데 예. 젖먹이였던 여동생과 겨우 아장아장 걸었던 오빠는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각각 남의 집으로 입양이 되어 자랐지예. 대학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낸 기라예. 서로가 첫눈에 끌리게 되었지예. 친구들은 둘이 너무 닮아서 천생연분이라고 놀리기까지 했지예.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안 있습니꺼. 부부가 오래도록 같이 살다 보면 서로가 닮는다는 말도 많이 하지만 우리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부부가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도 더러 있어예. 그 두 사람은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결혼을 했지예. 남매를 두고 행복하게 살던 어느 날 남자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자기 아들에게 입양했단 사실을 이야기했답니다.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고아원을 찾게 되었고, 여동생이 입양되어 간 집을 추적해 찾아내고 보니 자신의 장인 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더. 법적으로는 버젓이 남남인데 알고 보니 친 남매 지간인 데다 두 아이까지 있으니 우짭니꺼.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것십니꺼. 당신 같으모 그들이 다시 헤어지겠습니꺼? 오누이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꺼. 알면서도 사는 거지예.”

“그런 경우와는 다르지 않나.”

“다른 기 머가 있습니꺼. 일본에는 아직도 왕족은 왕족끼리 결혼한다는 말이 안 있습니꺼. 아직도 족내혼을 하는 나라가 있다는데. 우리나라 역사에도 사촌끼리 혼인한 흔적은 많이 있습니더. 사랑한기 죄지예. 당신이 괴로워한다고 달라질 문제도 아닙니더. 어머이가 평생 스스로 죄인으로 사신 것을 생각 하이소.”

아내라는 여자,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다. 같은 여자라서 일까. 어머니를 이해하려 드는 점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내가 관내 중학교 서무실에 근무할 때 그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키가 유난히 작았던 그 사람들을 사람들은 난쟁이 용범이라 불렀다.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살았는데 하필이면 그 집에서 한 마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있었다. 사무실 창가를 바라보면 언덕배기에 유별나게 작은 판잣집이 난쟁이 용범이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그들 부부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었는데 항상 붙어 다녔다. 너무도 다정해 보였다. 늘 둘이 손을 잡고 다녀서 어찌 저리 잉꼬부부가 있을까 싶어 누군지 궁금해서 집사 아저씨께 그 부부에 대해서 물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남매 사이라 했다. 자기 부모들은 정상적인 사람이었는데 두 아이는 키가 자라지 않았다. 초등학교 아이들만큼만 자라고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 사람들 부모는 죽으면서 남매가 혼인을 해서 살라 했단다. 물 한 그릇 떠 놓고 혼인을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충분히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그 난쟁이 부부를 생각했다. 그들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었다. 전쟁만 안 일어났으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관성과 타성에 젖어 산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당신은 농촌에 들어가 살 수 있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따라야지 예.”

“저 녀석이 좋아할까?”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전들 무슨 일이건 할낍니더. 어머이가 당신을 키움서 아팠을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더. 저 아이 때문에 어머이는 더 힘드셨던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누구 잘못도 아닌데.”

“고맙구려.”

나는 진정 아내가 고마웠다. 이제 남은 일은 이 도시를 떠나는 일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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