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Dec 16. 2023

생선회를 생겨자에 찍으며

생선회를 생겨자에 찍으며     


  어젯밤 진하게 술잔 기울이고 달빛 구경했더니 아침은 늦잠이다. 모녀가 술에 취해 희희낙락했다. 어미는 딸의 속내를 알고, 딸은 어미의 속내를 알게 된 시간이기도 한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김칫국을 끓였다. 묵은지 숭숭 썰어 넣고 멸치 육수 부어 끓인 김칫국은 시원하다. 딸은 맛있다 연발하며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신다. 숙취 푸는 데는 김치국밥이 최고다. 


  오후에는 회를 먹기로 했다. 오일장이면 활어를 싣고 와 파는 장사꾼이 있다. 횟집에서 먹는 것보다 싸고 싱싱하다. 촌로들이 좋아한다. 칼잡이 젊은 여사장은 야하고 짙은 화장을 했지만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예쁜 얼굴에 늘씬한 몸매에 잽싼 칼솜씨에 반했다. 장사가 잘 되자 아예 가게를 빌려 오일 장날만 열었다. 촌로는 그 가게에서 술과 회를 시켜 먹고 회를 싸 갈 사람은 줄을 서서 기다린다. 

 

 겨울엔 방어회다. 오후 늦은 시간에 갔더니 감성돔이나 밀치, 전어도 없고 방어만 있었다. 방어회를 시켰다. 매운탕 꺼리는 공짜다. 생선살을 발라내고 남은 뼈와 대가리를 주는데 푸짐하다. 나는 회보다 매운탕 꺼리를 더 좋아한다. 내 손으로 끓인 매운탕을 농부도 애들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매운탕을 끓일 때면 된장과 고추장도 풀지만 마늘과 생강, 밀가루 반죽을 해서 수제비 몇 점, 감자 몇 점, 무를 넣어 끓이는데 시원하고 구수하다. 깻잎이나 대파, 매운 고추는 마지막에 넣어 한 소금 더 끓여내면 된다. 

 

 어른들 살아계실 때는 자주 생선회를 떠 왔었다. 두 어른을 모시고 먼 길 나들이가 어려워지면서 오일장 생선 횟집은 효자 노릇을 했다. 생선회를 먹고 남으면 야채를 썰어 넣어 회덮밥을 만들어 매운탕과 드렸다. 두 어른은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두레상에 앉아 먹는 밥 한 끼가 더 반가웠을지 모르겠다. ‘오늘이 장날이제. 회 거리가 있을라나.’ 전화로 슬쩍 운을 띄워주시면 회가 드시고 싶다는 신호였다. 농부가 덜 바쁠 때는 점심때 생선회를 떠갔고, 농부가 바쁠 때는 저녁에 회를 가져갔었다. 

 

 그새 방어회를 다듬는 주인도 바뀌었다. 활어를 다듬던 사람은 아저씨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은 예쁜 노처녀였는데. 장사가 잘 돼 이웃 고장에 횟집을 냈다는 소문이더니 사실인가 보다. 오늘 회를 다듬는 주인은 짙은 화장을 했지만 어린 처녀로 보였다. 활어를 다듬는 사람도 오륙십 대 어머니였다. 어린 처녀도 인심이 후했다. 매운탕 꺼리 달라고 했더니 방어와 감성돔 대가리까지 한 봉지 싸 준다. ‘아이쿠, 고마워요. 복 받으세요.’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딸은 군불을 지피고 난로에 불을 피운다. 따뜻한 거실에 앉았다. ‘생선회에 소주가 빠질 소냐. 오늘은 간단하게 한두 잔만 하자.’ 술상을 봐 오는 딸이다. 이 시간 농부는 하루 한 끼로 저녁은 금식을 하며 명상을 할 텐데. 배가 고파서 잠이나 잘까. 일주일이 지났으니 하루 한 끼 먹는 것에도 길이 들었겠지. 살은 빠져도 눈빛은 맑아져 오겠지. ‘아빠에게 쬐끔 미안해지네. 우리만 잘 먹으니까.’ 그러면서 매운 생겨자에 생선살을 쿡 찍어 눈물 쏙 빼며 먹는다. 

 

 다음에 아빠랑 또 먹지. 오일장마다 난전에 판이 벌어지니까. 좋지.   

 산그늘 사이로 달빛이 빙그레 웃으며 실눈을 뜬다. 


 2023.   11. 

매거진의 이전글 시제 떡을 먹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