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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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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18. 2023

배추를 눕혀 숨을 죽이고

배추를 눕혀 숨을 죽이고   

 

 농부는 수돗가에 앉아 칼을 간다. 부엌에 있던 칼을 몽땅 들고나가 갈고 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한 뒷모습은 아름답다.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지만 어깨가 반듯하다. 쓱쓱 칼 가는 소리를 음악처럼 듣다가 조용히 부엌으로 돌아온다. 식탁에 밥상을 차려놓고 창밖을 봤다. 그 사이 농부는 잘 드는 칼로 배추의 밑동을 잘라 텃밭에 눕히는 중이다. 오후에 해도 되는데 아침부터 왜 서둘까. 나는 창문을 두드린다.


 밥 먹고 해요.

 다 됐다. 


 아침을 먹고 본격적으로 배추 절일 준비를 한다. 큰 고무다라기 두 개가 수돗가에 놓이고 그 옆에 방수포를 편다. 방수포 위에 거친 잎을 떼어낸 알 배추가 놓인다. 농부가 배추를 방수포에 쟁일 동안 나는 도마 두 개와 부엌칼을 챙긴다. 천일염도 넉넉하게 퍼다 놓고 다라이 소금물을 푼다. 농부가 배추를 잘라주면 나는 소금물에 담갔다가 통에 담는다. 배추는 간이 잘 되어야 김치가 맛있다. 구구단도 까먹은 나이다. 배추에 소금 절이는 것도 손  대중, 눈대중이 몸에 배었다. 


 배추를 절여놓고 양념에 들어갈 재료를 챙긴다. 생각날 때마다 한두 가지씩 준비했다. 까먹지 않으려고 재료들을 수시로 점검한다. 나잇살이 까마귀 고긴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재료준비를 완벽하게 해 놓고도 어떤 해는 실컷 김장 끝내고 ‘아차, 깨소금을 안 넣었네.’했고, 어떤 해는 ‘생강을 까먹었어.’ 울상을 짓기도 했었다. 이미 끝난 일, 자책하기보다 ‘괜찮아. 김치가 맛있으면 됐지 뭐.’ 금세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장점일까. 


 올해는 나보다 농부가 더 안달이다. 오후 4시경이 되자 배추가 잘 절여진 것 같다고 해지기 전에 씻자고 한다. 중간중간 배추를 뒤집기 했지만 대여섯 시간이면 배추 숨이 덜 죽는다. ‘배추가 워낙 실해서 숨이 잘 안 죽는데. 저녁에 씻으면 될 것 같아.’ 해마다 저녁에 절여 놨다 다음날 아침에 씻어서 오전에 물 빼고 오후에 양념에 버무리는데 농부가 다그친다. 빨리 해 치우고 싶다는 눈치다. 내 말은 쇠귀에 경 읽기다. 참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당신 내일 약속 있어요? 비 온다고 했어요? 

 없다. 


 간단한 대답이다. 별일도 없는데 왜 서둘러요? 묻고 싶으나 참아버린다. 말해봤자 소용없다. 농부가 하자면 해야 한다. 맞니 틀리니 했다가는 기분만 상한다. 오랜 세월 길들어 살아온 나는 아직도 흔쾌히 농부의 장단에 못 맞춘다. 겉으로는 맞춰 주지만 내 속까지 흔쾌히 맞추지 못해 앙금이 생긴다. 그 앙금조차 시원하게 씻어버려야 내가 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고난 성격, 애고를 버리기 참 어렵다.


 다 절여진 것 같더라. 씻어야 안 되나?

 한 시간만 더 있다가 씻어서 물 뺍시다. 치대 넣기는 낼 아침에 하고요.


 나도 갈등한다. 내일 아침까지 소금물에 담가 놓으면 간이 세게 밸 것이고, 오후에 씻어 놓으면 싱거울 게 뻔하다. 씻으려면 저녁 먹고 씻어야 하는데. 농부는 해 지기 전에 해 치우고 싶어 안달하니 방법이 없다. ‘할 수 없지 뭐. 배추가 싱거우면 양념을 짜게 할 수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한 욘 포세의 『멜랑꼴리아』를 떠올렸다. 


 마침 택배가 도착했다. 내 기분을 눈치챈 걸까. 아들이 보낸 떡갈비 세트다. ‘이 녀석이 김장하는 줄 알았나? 내가 좋아하는 떡갈비를 보냈네. 그래, 아들 생각해서 기분 풀어야지.’ 택배 박스를 뜯었다. 네 가지 떡갈비가 푸짐하게 담겨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치즈 떡갈비부터 챙겼다. 


 여보, 그냥 배추 씻어서 물 뺍시다. 짠 거보다 낫다. 


 농부는 서서 김치 양념하기 좋게 나무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판자를 펴고 씻어놓은 두꺼운 비닐을 깐다. 애쓴 덕인지, 간이 맞은 건지 알이 실한 배추가 숨을 죽였다. 물에 씻어 속에 것을 떼어먹어보니 달착지근한 것이 맛있다. 숨 죽은 배추를 자꾸 떼어먹었다. 저녁에 떡갈비 쌈 싸서 먹으면 제격이겠다. 슬쩍 농부의 눈치를 봤다. 뭐가 저래 불만일까. 마음공부는 왜 할까. 말짱 도루묵이네. 마음은 일상 속에서 닦는 거지. 내 알바 아니고.  


 저녁에 떡갈비를 구웠다. 씻어놓은 배추 한 포기 가져다 쭉쭉 찢어 떡갈비를 돌돌 말아먹었다. 맛있다. 아들이 보낸 선물에 농부도 기분이 풀어졌다. 저녁에 김장할 양념 준비 한다고 잰걸음 치니 농부가 도와준다. 무도 썰어주고, 당근도 썰어준다. 나는 만신이 아파 빌빌 매겠다. 농부가 거들어주지 않으면 김장 못하겠다. 혼자 사는 어떤 할머니는 이웃에서 준 김장김치가 몇 통이나 된다며 딸과 며느리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았단다. 복도 많지. 


 그러나 나는 아직 남이 담가주는 김장김치 얻어먹고 싶지 않다. 내 손으로 담근 김장김치가 내 입에 맞으니까. 애들이 오면 엄마 표 김치 최고라고 하는 그 김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집에 들러 밥을 먹고 갈 때, 김치 맛있다면 한두 포기 나눠 줄 수 있는 그 정을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무공해로 키운 배추와 고춧가루로 담그는 김치다. 밥 먹으러 오라고 청하기는 겁나지만 불쑥 와서 보온밥통에 있는 밥이라도 같이 먹고 가는 누군가라면 언제든 반가울 것이다. 김장도 정성이 들면 제 맛을 낸다. 


 요즘엔 절임배추 사다 만들어 파는 양념으로 김장을 하는 집이 많다지만 사람 입맛은 까다롭다. 나이 들수록 더 까다로워지는 것이 입맛이다. 젊어서는 모르다가 나이 들면서 어릴 적 먹던 김치 맛을 그리워하게 될 날이 온다는 거다. 그처럼 김장은 집집마다 그 집 고유의 입맛을 낸다. 우리 집 김장은 우리 가족 입맛이다. 사람마다 손맛이 다르듯 집집마다 김장 맛도 다르다. 김치, 보약이다.

              20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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