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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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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22. 2023

마늘을 까면서

 마늘을 까면서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주면 좋겠다. 이유 없이 축축 쳐지는 몸과 마음을 바짝 끌어당겨 줄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김장준비를 한다. 마늘을 깐다. 농부는 식수 문제로 군청과 면사무소를 들락거리느라 바쁘다. 식수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지만 바위에 달걀 던지기 같다. 달걀은 깨어져도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라도 남겨 내년에는 좀 더 희망적인 결과가 나오길 빈다. 


 시렁에 걸렸던 마늘을 저장고에 넣었다. 김장 양념할 마늘을 까는데 자꾸 시어머님 생각이 난다. 고부간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마늘을 까던 시절이 있었다. 엄지와 검지에 반창고를 붙이고 작은 칼로 마늘 껍질을 벗기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마늘농사를 많이 지을 때다. 김장도 백여 포기를 할 때다. 어머님은 좋은 것은 돈하고 돈 안 되는 자잘한 마늘을 일을 삼고 쪼개서 물에 담갔다. 마늘껍질이 적당히 물에 불러지면 대소쿠리에 담아 동네 옆 도랑에 나가 씻었다. 1차 껍질 벗기기가 끝난 마늘은 다래기에 담겨 마루에 놓였다. 작은 칼 두 자루를 챙겨 마루에 앉으면 햇살이 온몸을 따뜻하게 했다. 


  나는 금세 싫증이 났다. 자잘한 마늘을 까는 것이 고역이었다. 손가락 끝은 금세 발그레해지고 따가웠다. ‘이 마늘 다 까야해요? 김장할 때 조금만 넣지요.’ 툴툴대면 ‘아이가, 마늘이 되고로 들어가야 짐치가 맛있다. 나머지는 갈아서 냉동실에 보관해야제. 겨울 내내 심 안 들이고 꺼내 묵기도 좋고 애들 오모 한두 뭉치 조야제.’ 도시 사는 맏이와 막내며느리 줄 생각부터 한다. ‘사 묵을 라모 이기 다 돈이다.’ 그때마다 옆에 사는 며느리는 서운했었다. 농사는 우리가 짓는데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항상 찌질 한 것들이었다.  

 

 며느리 차별한다고 눈물 짰던 적이 몇 번이던가. 삼십 수년 시부모님 옆에서 며느리로 살아온 난데 알게 모르게 쌓이는 불만이 어찌 없었겠나. 시부모님이 연세가 드시고 나도 노인 대열에 서면서 두 어른 모시기가 힘들어 쩔쩔맸다. 누구 한 사람 내 고충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옆에 사는 며느리가 시부모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집은 딸들이 모시기도 한다는데. 참 인정머리도 없지. 내 숨통 좀 틔워주면 어디 덧나나.’ 그런 불만도 있었다. 어쩌면 맏며느리도 아닌데 맏며느리노릇을 해야 하는 현실이 힘들었는지, 말끝마다 집안의 대들보는 맏자식 내외라고 쇄기를 박는 시어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올해로 두 어른은 저승길 떠나셨다. 지인들이 어른들 안 계시니 홀가분하고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날마다 전화벨만 울리면 가슴부터 벌렁거리던 버릇이 줄어들었다. 오라 가라 하시던 시부모님의 부재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편하긴 하다. 김장철이 됐는데도 지시하고 간섭할 시어머님이 없다. 시댁 김장까지 해야 했던 지난날이 까마득한 옛일 같다. 배추김치, 무청김치, 동치미, 파김치, 갓김치, 백김치, 고들빼기김치, 고춧잎 김치, 깍두기 등, 여러 종류의 김장을 며칠에 걸쳐 준비하고 해 내는 작업에 진을 뺐던 시절이 있었다. 농사철에 일꾼을 많이 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김장도 조금만 한다. 무청김치 한 항아리, 배추김치 한 독이면 된다. 동치미와 백김치 등은 생략했다. 파김치는 농부가 좋아하는데 파를 안 심었다. 우리도 노인이 되니 먹는 것도 적어진다. 우리는 무공해 고추농사를 짓는다. 자급자족할 정도만. 올해는 탄저병이 일찍 와서 건 고추를 여덟 근 정도 거뒀다. 고춧대를 걷어내고 김장배추를 심을 때다. 농부는 싱싱한 고춧잎이 아까운지. 고춧잎 김치를 담그라고 했다. ‘싫어. 고춧잎 안 삭힐 거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농촌에는 전통이란 이름으로 이어지는 것들 중 매해 건너뛸 수 없는 것이 있다. 메주 쑤어 띄워서 장 담그기, 김장 무와 배추 길러 김장하기다. 4년 전, 시어머님이 자리보전하면서 나는 그 전통을 깼다. 간장 된장도 떨어지면 담그겠다고 선언했고, 무와 배추도 조금만 심어 거두었다. 농사를 줄이면서 일꾼 쓸 일도 없으니 굳이 김장을 많이 할 필요도 없어졌다. 궁하면 통한다. 아직 반찬가게에서 반찬이나 김치를 사 먹지는 못하지만 더 노인이 되면 어쩌겠나. 몸이 안 따라주면 맛집 찾아 주문해야지.

 

 농부가 왔다. 마늘 까면서 주리를 틀고 앉은 아내를 위해 그는 팔을 걷어 부친다. ‘마늘쪼가리 똥꼬만 칼질해라. 먼지떨이 송풍기에 확 불어 주께.’ 농부 덕에 마늘 까기 일도 없다. 마늘 한 소쿠리 까서 씻어 쪽마루에 내놓았다. 김장 다 한 것처럼 가볍다. 착착 양념거리 준비해서 이번 주말에 김장을 할 생각이다. 텃밭의 배추도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고소하고 달착지근해졌을 것이고 더 뒀다간 지칠 것 같아 서둘러야겠다. 

                  20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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