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중간>
군수나 도지사 찾아가서 따져볼까? 피켓 들고 군청 앞에서 데모라도 하고 싶은데 남편이 남 부끄러운 짓 말란다. 무슨 남자가 물러터지기만 해 가지고. 남편도 미워 죽겠다. 자기가 나서서 따져야 하는데 소심한 사람이 그럴 배짱도 없으면서 나도 못 나서게 한다. 여자가 남편 얼굴에 똥칠하고 싶으냐고 하네. 민원 제기라도 해 보자니까 뭐라는 줄 아니? 우리 군민의 숙원 사업이니 개인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네. 애국자 났어. 진짜.
너도 뉴스 봤지? 도심 한 복판에서 죽은 그 노숙자 말이야.
전화박스 옆에서 죽은 지 보름이 지나서야 발견된 사람? 그래 봤어. 참 무심한 세상이야. 그 사람도 농촌 총각이더라. 농사짓다가 장가 한 번 가 보려고 사귄 여자가 꽃뱀이었다네. 먹고 입는 것도 아끼며 피같이 모은 재산 몽땅 가지고 날랐다네. 그 속이 어땠겠어. 결국 땅을 잃어버린 농사꾼이 도시로 흘러들어 하루벌이에 거리의 노숙자가 되어 지내다 객사한 거지. 가족들조차 생사를 몰랐다니 얼마나 기막혀. 남의 일 같지 않더라.
그러니까 넌 행복한 사람이야. 땅 있겠다. 남편 있겠다. 애들 건강하겠다.
땅? 땅이 뭘 주는데? 농사꾼으로 산지 20년에 남은 건 산더미만큼 쌓인 빚뿐이야. 땅도 내 땅이 아니라고. 농협, 축협, 산림조합 등, 은행 땅이지. 빚 못 갚으면 땅은 몰수당해. 부동산 투기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노른자위가 뭔 줄 알아? 농가부채에 잡혀 나온 경매 품이야. 작은 투자로 단번에 대박 터뜨릴 수 있다더군. 그런데 난 빚 갚을 능력은 고사하고 먹고살기도 힘들어.
나도 알아. 식당을 하다 보면 온갖 소문 다 듣게 돼 있어.
이러고도 농촌에 살아야 할까? 어떤 작물이든 심어서 소득을 올려야 하는데. 그러자니 투자를 해야 하잖아. 농협에 빚내서 농사지어 봤자 겨우 입에 풀칠하고 빚은 고스란히 남아. 또 빚내서 농사짓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는 곳이 농촌이야. 물론 일억 농부도 있다더라만. 그 속내 파 보면 일억 빚쟁이 일 확률이 높아. 내 주변에서 아직 농산물이나 축산 해서 돈 벌었다는 소리 못 들었어. 번듯한 목장이나 과수원 등 겉보기엔 부자농부로 사는 것 같아도 속을 들어다 보면 대부분 국가 빚쟁이더라. 배 보다 배꼽이 큰살림이 농촌 살림이더라고. 거기다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합법적으로 이농을 부추기는 사업이란 게 낙후된 농어촌 지역 개발사업이야. 농어민을 잘 살게 한다는 취지는 그럴듯하지. 농사의 농 짜도 모르는 것들이 책상 앞에 앉아서 낸 구구단이 농어민을 위하고, 낙후된 농촌지역을 위한 숙원 사업이란다. 건물만 덩그렇게 지어 놓는다고 돈이 나와 쌀이 나와. 제대로 굴릴 줄 알아야 하는데 촌로들이 뭘 알겠어. 몇몇 감투 쓴 약삭빠른 인간만 제 주머니 챙기고 나가떨어지는 거라더라.
네가 지금 겪는 일도 그 숙원 사업 때문이잖아. 멀쩡한 자연 훼손하며 지방도로 만든다지?
그래서 더 화가 나. 난 가난한 촌부로 살아도 국가 빚쟁이 면하고 싶어.
명희야, 달리 생각해 봐. 너의 집 앞으로 길이 나면 좋은 점도 있지 않을까? 그들 말처럼 땅의 부가가치가 높아질 수도 있잖아. 미래의 그림을 그려봐. 속만 태우지 말고.
뭘 보고? 볼 게 있어야지. 발전의 가능성이 없는 곳이야. 고착된 촌구석이라고. 허긴 알 수 없지. 도시 사람들이 열에 다섯은 시골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고는 하더라. 특히 우리 또래 중년에게 시골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잖아. 맑은 공기라도 팔아먹을 수 있을까?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고, 닭을 봉황이라 속여 잘도 팔아먹더라만. 나도 그런 베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이 내게 득이 될 것인가 따져 봐도 우선은 덕 될 게 없는 것 같아. 집 앞으로 길이 나면 더 불편할 것 같아. 차가 많이 다닐 테니까. 조용히 살고 싶어 들어온 산골인데. 번잡해지는 것이 진짜 싫다.
그래도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나도 너처럼 현실적이 될 수 있을까.
막가파로 살면 돼. 겉으론 웃고, 뒤론 주먹총 날리면 돼. 때에 따라선 아부도 하고, 협박도 하고, 그래야지. 은근슬쩍 소금도 먹이고. 여자가 혼자 살기엔 참으로 팍팍한 세상이란 걸 너는 모르잖아.
참 요즘 시어머니는 어때?
우리 시어머니? 살 판 났지. 노인네가 노망이 든 건지. 바람이 난 건지 하고 다니는 꼴이 가관이다. 식당에 오면 겁나. 슬쩍하는 게 수준급이거든. 더 기막힌 것은 목욕 싸악 하고 연지곤지 찍고 노인정에 다닌다. 입을 만한 옷 없다고 까탈이야. 새댁처럼 젊은이들 취향의 옷을 골라 입고 다니는 꼴이라니.
노인네 바람났구나. 혹 늙수그레한 제비족한테 걸린 건 아니니? 차라리 잘 됐네. 노인네 시집보내면 짐 하나 덜잖아.
그러면 좋지. 그것도 아냐.
그럼 왜?
글쎄 노인네가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었나 봐. 자기밖에 몰라. 참 어처구니가 없어. 자식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아들 살았을 적보다 더하다고. 먹고 싶은 건 최고급이 아니면 안 되고, 사흘들이 한약이다. 곰이다 달여 먹으면서도 기운이 없어 다리가 휘청거린다 하고, 철철이 옷 사 입으면서 입을 옷이 없어 거지꼴이라고 내 얼굴만 보면 앙앙거린다,
며느님이 돈다발로 보이나 보네.
지랄하네. 쪼글쪼글 늙은 노인네가 분 하얗게 바르고 입술 빨갛게 칠하고, 거기다 젊은 여자들이나 입을 수 있는 꽃무늬 원피스에 뾰족구두 신었다고 상상해 봐.
볼 만하겠네.
우리 집 노인네는 한 여름 고치대 말라가듯 하는 며느리가 안쓰럽지도 않은가 봐.
노망 든 것 아니야?
진짜 노망이라도 들었으면 불쌍한 맘이라도 생기게. 나보다 더 기억력 좋아.
용돈을 끊어보지.
말도 마. 밖에 나가면 요래 저래 거짓말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돈 빌린다. 손자들 학자금을 넣어야 한다거나. 우리 며늘애가 아파서 다 죽게 되었다거나 하면서 눈물도 프로급이야. 사람들이 팍 속아. 죽은 아들 불러다 놓고 한바탕 눈물 바람 뿌리면서 노인네가 인정을 호소하는데 누가 거절하겠어.
나보다 더 어이없네.
진짜 울 시엄니 연극계로 진출했으면 출세가도를 달렸을 거야.
너네 시엄니 자기 아들이 유산이라도 듬뿍 남기고 죽은 줄 아는 것은 아니니?
너도 알다시피 내 남자 건축자재 하청 업을 하다가 쫄딱 말아먹었잖아. 백수로 여편네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한동안은 착실하게 살더니 어느새 노름에, 술에, 계집질에 푹 젖었더라. 난 그것도 모르고 장사한다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느라 파김치가 돼서 집에 오곤 했지. 친정어머니께 손 벌리고, 동생들에게 손 벌려 얻은 콧구멍만 한 식당 하나 붙들고 늘어지는 사이 내 남자는 그렇게 제 세상 만나 살판나게 살았더라. 여관방에서 축 늘어져 있는 몸뚱이 보니 엄청 좋았나 봐. 가관이더라. 이 식당도 조만간 문 닫게 생겼어. 내 이름으로 된 식당도 나 모르게 은행에 잡히고 빚을 내 썼다네. 참 재주도 좋아.
그렇게 악착스럽게 살았으면서 그걸 몰랐어?
당연하지. 내 남자를 철석같이 믿었거든. 다른 건 몰라도 나만은 끔찍이 위한다고 생각했거든. 맨날 우리 보물단지. 우리 복덩이 하면서 추켜세웠으니까. 그걸 믿은 거지. 내가 어리석었지. 아니야, 너라도 그랬을 거야. 일단 나에게 잘해줬으니까.
길바닥에 나앉게 된 것을 먹여 살리는 재주를 가진 여자니 오죽했겠어.
그래, 사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여자다움은 물 건너갔지만 내 남자만 좋다면 남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했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지. 그러니까 너도 자각하란 말이지. 사람 좋다. 순진하다는 소린 말짱 거짓말이야. 돌아서면 사기 쳐 먹기 딱 좋은 여자네 한단 말이지.
내게 사기 칠 게 뭐 있어. 난 아무것도 없는데.
아닌 말로 너, 서방 믿을 수 있어?
그럼 믿지.
믿다가 당해. 나처럼.
진짜 그럴까.
너의 남자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지만 다 믿지는 말라는 말이지. 세상의 모든 남자들 다 도둑놈이라고 해도 내 남자만은 예외로 치는 것이 여자잖아. 오, 그 이름도 거룩한 남자여! 나도 너처럼 믿었어. 진짜. 인생살이에서 예외란 것은 없더라. 내가 살아 본 바로는 그래.
인생을 얼마나 안다고.
너 보단 많이 알지. 내가 살아온 것을 글로 쓴다면 소설 서너 권은 되고도 남아. 사랑 어쩌고 이별 어쩌고 하면 더 권수가 늘어나겠지. 요즘 대하소설이 유행하잖아. 너도 나도 권수 늘려 한 밑천 잡자는 식이잖아. 오죽하면 시인은 밥을 굶어도 소설가는 산다고 할까. 나 소설 한 번 쓸까 싶다.
그래라. 여고 때부터 너는 선생님께 글재주 있다고 칭찬 들었잖아. 시인이 되든가, 소설가가 되든가. 한 번 도전해 봐. 사는 재미도 나지 않을까? 밥장사만 하다 늙는 것보다 근사하다 야. 진짜 너 소설 써 봐라. 재밌을 것 같아. 내가 첫 독자가 돼 줄게.
난 그딴 것 싫어. 차라리 밥장사가 속 편해. IMF 때 손님이 뚝 떨어지더니 이젠 경제 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허리띠 졸라매라고 신문마다 대서특필이니까 또 손님 떨어지네. 그래도 세끼 밥은 챙겨 먹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은행이 경매 딱지 붙이기 전까지지만. 사방팔방으로 돈 구하려 다니는 중이야. 너 보상금 받으면 나 좀 뚝 떼어 줄 수 없니? 불우이웃 돕는 셈 치고.
말 되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 국 마시는 사람이 여기 또 있는 줄 몰랐네.
농담이고. 나 요즘 무지 외롭다. 너는 내 맘 모를 거야.
알아. 대일밴드 식 남자도 없냐? 과부가 바람 좀 피면 어때서.
내 남자만큼 맘에 쏙 드는 남자가 없어서 독수공방이다.
누가 열녀문 세워 준다던? 가슴에 대못 박고 죽은 남자가 뭐가 좋다고.
글쎄, 그게 희한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미운 짓은 생각 안 나고 좋은 것만 생각나서 미치겠다. 오입질을 하든, 도박을 하든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속 썩이는 서방이라도 있는 년은 당당해 보인다니까.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너도 많이 지쳤구나. 우리도 늙어가는 걸까?
그런 셈이지. 진짜 요새는 혼자 살림 꾸리는 것이 싫다. 특히 아플 때는.
그럼 시집 가. 전업주부 자리 알아봐 줄까?
됐네요. 돈에 푹 담가 줄 수 있는 남자라면 모를까. 그런 남자가 날 좋아할 리 없을 테고.
그런 사람 있으면 시집갈 맘이 있는 거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진리 아닌가? 류시화 시인이 그랬잖아. 그대가 옆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둘이 사는 나도 외롭기는 마찬가진 걸.
복에 겨워서 옷에 똥 싸누만.
우리 만날까?
언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