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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속 풍경

<단편소설. 끝>

by 박래여

지금 올래?

아니, 손님 받아야지. 그나저나 자기 집 앞을 뛰어다니던 노루나 멧돼지 아직 있어?

그건 아, 예엣 날이여 어. 굴착기가 하루 종일 왱왱대는 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에 우지끈 탁탁 나무 넘어지는 소리, 승용차, 덤프터럭, 레미콘 차 등 시도 때도 없이 부릉부릉 앵앵, 공사판 인부들 와글와글, 뚝딱뚝딱하는 소리 등, 간덩이 떼 놓고 다니는 토끼 아닌 다음에야 이 골짝에 붙어 있겠어? 벌써 줄행랑을 놓았지. 참 그 짐승들도 괴로울 거야. 살 곳이 없잖아.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 해도 최신 장비 들여놓아 깎아내리고 쳐부수니 어딘들 안전할까. 환경단체들도 말만 앞세워.

갑자기 조용한 절에 가고 싶다.

나도

가랑잎이 소복소복 쌓인 숲길을 걸어 오르면 온갖 새들이 포로롱 날고, 향긋한 숲 내에 취해 그만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거기 살고 싶어지는 절, 그런 절에 가고 싶다.

사람 사는 곳에 번뇌와 고통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사니.

이런 맛으로 살지.

여자들, 수다로 푸는 살이?

그러네.

어떻게 할 거야?

몰라.

왜 있잖아. 옛날에 바위를 두 쪽으로 가르는 방법, 바위에 홈을 파고 밤나무나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를 세운다네. 그리곤 물을 준다는 거야. 계속해서 그러면 나무가 퉁퉁 불어서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진다네. 신기하지? 그 방법을 써 봐. 자꾸 찾아가서 담당자에게 우는 소리 해 봐. 설계변경 해 달라고. 우린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새 집을 지을 돈도 없다고. 쥐꼬리만큼 주는 보상금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자꾸 쥐어짜봐. 기름이라도 한 방울 더 나올랑가.

그래야 하는데. 잘 안 돼. 참 어젠 공사 감독이 왔더라.

뭐 하려?

뻔하지 뭐. 허락해 달라고. 지역민의 권익을 위해서 개인이 양보 좀 해달라고.

그래 뭐랬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고 했지. 삶의 터전을 잃을 판인데 지역민의 권익이 나오겠느냐고 따졌지. 도대체 건설업체 사람들 진짜 양심이 없어. 날마다 먼지 풀풀 날리면서 길에 물도 뿌리지 않잖아. 화가 나서 고함을 쳤더니 그제야 내일부터 물차 온대. 와 봐야 알지. 똥 누러 갈 때 맘 다르고, 나왔을 때 맘 다르다는 것은 세 살짜리 아이도 알걸.

그러게.

공사 측에서 하는 말이 아주 우습더라.

뭐라는데?

현재 책정된 보상 금액을 바꿀 수는 없지만 공사 측에서 좀 보태줄 테니 타협을 하자는 거야. 내가 알기론 총공사비에서 나오는 걸로 아는데. 현금으로 갖다 준다는 게 말이 되냐? 참말로 웃기는 이야기야. 농사꾼을 바보로 아나 봐.

맞아. 참 싸가지없네. 그래서 뭐랬어?

국가에서 하는 공산데 나도 손해 볼 필요 없지만 당신네들 역시 사재 털어 보상할 필요 없다고 남편이 옹이를 박데. 난 속으로 박수를 쳤어. 남편이 근사해 보이는 거 있지. 맨날 손해만 보는 남자라고 욕하다가 다시 봤다네. 나도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버티는 수밖에 없더라고. 똥줄 당기는 측이 손들게 돼 있어. 업체 측에서 협박도 하더라. 요즘엔 강제 수용 령을 발동시키면 시일이 별로 안 걸린다면서 공탁금 걸어놓고 공사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 하라고 했어.

잘했네. 이제야 너답다.

그러면서 웃었지. 당신네들 맘대로 해 보라고 했지. 저네들 말이지. 내가 알기론 그렇지도 않더라. 개인 사유재산을 저거들이 어쩌겠어. 산 같은 건 보상금이 얼마 안 되니까 공탁금 걸어놓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 소유의 집인데 저거들이 어쩌겠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 소유재산을 저들 맘대로 할 수는 없잖아.

그렇겠지. 여차하면 너는 공사 중지 처분인가 하면 될 테고. 쌍방 간에 법정 싸움이 벌어지면 서로가 다 힘들지. 그래도 네가 우선일 수 있어. 왜냐면 너는 거기가 생활터전이잖아. 버티면 수가 날질 몰라.

그나저나 너는 어쩌기로 했어? 음식점 문 닫게 생겼다며?

그래, 은행장을 만나 봐야지. 담당 대리란 작자가 은근슬쩍 만나자네.

그래서?

만나 봐야지. 잔챙이를 만나는 게 아니라 대가리를 만나려고 해. 나도 백 좀 만들게. 요즘 세상엔 성을 상품화해서 돈 버는 방법들이 좀 많아. '나도 한 때는 포르노 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책 봤어? 봤겠지. 그 작가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더라. 그런 용기로 세상을 살면 이혼녀든, 과부든 당당할 수 있지 않겠어?

맞아. 과부가 바람피운다고 누가 뭐라겠어. 은행장을 꼬셔봐라. 아주 섹시하게 차려입고 나가 봐.

그래볼까? 말이야 쉽지. 여자 혼자 살면 뭐가 문젠 줄 알아? 쌍안경을 끼고 본다는 거지. 자칫 처신 잘못했다간 화냥년 소리 듣는 것은 시간문제야. 없는 말도 만들어서 퍼뜨리는 세상인데. 참 별짓거리 다 당했어. 우리 서방 살았을 적엔 제수씨 제수 씨 하고, 형수, 형수 하던 놈들이 먼저 덤비더라. 얼마나 힘드냐고 위로랍시고 들락거리면서 호시탐탐 노리는 거 있지. 남정네들 다 도둑놈이고, 늑대라는 말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더라. 거기다 시어머니는 한술 더 떠서 새파란 젊은것이 요즘처럼 좋은 세상에 혼자 산다는 말 누가 믿겠냐며 나가라고 설치더라.'어떤 놈하고 눈 맞아서 살림 빼 돌리는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고.'그렇게 복장거리 시킬 때는 하도 분하고 억울해서 막가파로 살아버릴까 싶은 생각도 했었다. 그럴 주변머리가 없는 여자라 이러고 산다.

너도 좋은 사람 생기면 팔자 고쳐. 남은 청춘이 아깝잖아. 죽어지면 썩어질 몸 그냥 썩히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는 생각 안 들어?

가끔 밤이 길다는 생각도 들어. 젊은것, 늙은 것 할 것 없이 혼자 산다는 말에 돈 좀 있다 싶은지. 찔러봐야 손해 볼 것 없다는 식으로 덤비더라. 속 빈 강정인 줄 모르고. 하지만 싫다. 남자들,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잖아.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일은 못 된다고 생각해. 혼자 사니까 참 편하고 좋은데 내가 왜 또 남자에게 얽매여 헐떡거려야 해. 서방 복 없는 년이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고 달라지겠어?

아직 젊잖아. 사랑도 해 볼만 하지 뭐.

그럴까? 오는 사랑 막지 않고 가는 사랑 막지 말라. 그런 인생관으로 살까?

그것도 좋지. 외로운 것보다 좋잖아. 아이들은 어때?

신통방통이야. 지 애비 가고 나니까 오히려 철이 드네. 어미 고생한다고 조금만 참으면 저들이 효도하겠다고 그래.

힘이 나겠네. 여자는 약해도 모정은 강하다는 말이겠지? 암튼 자긴 대단해.

참, 모내기철이잖아. 보상 문제로 골치 앓느라 농사 작파 하는 것은 아니지?

상토만 갖다 놓고 놀고 있어. 모판에 넣어야 하는데 일이 손에 잡혀야지. 공사하니 좋은 점 한 가지는 있다네. 산을 온통 시뻘겋게 파 헤쳐 놓으니 황토가 지천이야. 동네 사람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경운기랑 트럭이랑 세워놓고 흙 퍼 담는 게 일이야. 황토방도 짓고, 상토도 하고, 객토도 한다나.

그것도 공사 측 눈치 보면서 해야 할걸. 흙도 팔아먹는다잖아. 나무들도 쓸 만한 것은 다 팔아먹는다던 걸. 일부러 공사 핑계 대고 쓸 만한 재목감은 베어 넘긴대.

그런가 봐. 속상해 죽겠어. 소나무 군락지가 하루아침에 거덜 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우리나라 환경단체들은 눈도 귀도 없나 봐. 개발이란 합법적인 자연파괴 현장을 보고도 입을 싸악 닦고 있으니.

또 열 낸다. 너 그러다 병나겠다.

요즘 욕지거리 하는 재미로 산다. 입만 뻥긋하면 욕이 튀어나와. 하루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 동네 사는 내 남자의 친구가 들렸더라. 그날따라 어찌나 바람이 불던지 먼지와 소음 때문에 엄청 열받고 있었거든. 개새끼들 한 구덩이에 싹 쓸어 넣어 젓이나 담갔으면 좋겠다고 혼자 군담을 했지. 하필 그 사람이 내 집에 들어서다가 내가 뱉는 욕설을 들었지. ‘머라쿠요? 내 보고 하는 소리요?’하면서 뜨악해하더군. 어찌나 창피하든지. 얼굴이 잘 익은 자두 빛이 되었어. 난 또 능청스럽게 말했어. 우리 집 강생이들 보고 하는 소리라고. 그랬더니 뭐랬는줄 알아? 개새끼는 욕이 아니래. 개만도 못한 새끼라고 해야 욕이 된대.

너도 욕할 줄 알고 사람 다 됐네.

오죽하면 내 남자가 그러겠어. 좋은 말을 쓰자고. 아이들 교육상 나쁘다고. 내가 아무리 욕해도 욕 들어가는 구멍 없다네. 욕하고 침 꿀꺽하면 다시 내 속으로 들어가는 거래. 웃지 마. 진짜 난 심각해.

우스운 걸 어쩌냐. 지금쯤 너의 집 주변이 온통 들꽃 밭일 텐데. 올해는 그 꽃구경 가기 힘들겠다.

그래, 매화고 복사꽃이고, 진달래고, 싸리 꽃이고 간에 흙먼지에 폭삭 골았어. 지붕에도 흙이 켜켜로 쌓였는걸. 그래도 자연은 참 신기해. 뿌리만 살아있음 새 움이 트고, 자라서 꽃을 피워. 내장을 온통 드러낸 산인데도 어느새 풀씨가 날아들어 새싹이 돋아나. 사람이 자연처럼 치유력이 뛰어나다면 사는 게 힘들다는 푸념들도 없을 텐데 싶을 때가 많아. 자연은 인간들이 제 이득을 위해 짓밟고, 파괴해도 말없이 순종하잖아. 그러면서도 제 본분을 잊지 않는 고집 쟁이지.

그러니까 너도 풀이네. 시인이나 작가들이 가난한 농민을 풀에 비유하지. 풀처럼 강인한 것도 없으니까.

난 풀도 못돼.

아니, 넌 풀이 맞아. 그것도 길섶에 난 띠풀이야. 밟아도, 밟아도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띠풀 어때?

내 소망일 뿐이지. 난 질기고 질긴 풀이고 싶은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 자신을 알게 되었어. 난 온실 속의 화초에 불과했어. 처음엔 내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거든. 우리 집 앞으로 2차선 지방도로가 난다는 소문에 이어 부동산 투기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려도 설마 했어. 이 산골에 무슨 도로가 날까 싶었지. 지리산처럼 골짜기가 충분히 깊거나 경치가 빼어나거나 하면 또 모를까. 그저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작은 산이 있을 뿐인데 관광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부동산 투기꾼의 땅값 부추기는 작전이겠지 생각했거든. 만약 기존의 길을 넓혀 포장을 한다 해도 충분히 비껴갈 여유가 있는 지형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지. 그런데 막상 일이 터지고 보니 자연사랑 운운하면서도 나는 구경꾼밖에 될 수 없더라. 내 권리 주장도 못하고 찬바람 맞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배배 꼬이기만 하드라. 작은 바람에도 뿌리가 뽑힐 것 같은 위기감에 숨이 막히더라.

그래도 너는 온실 속 화초는 아니다. 숲 속에 홀로 피고 지는 풀은 될지언정. 말 그대로 천연기념물이지.

진짜 천연기념물이나 되면 좋겠다.

명희야, 나 손님 받아야 돼. 전화 끊자.

나는 얌전히 수화기를 제 자리에 놓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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