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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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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03. 2024

문득 친구 생각

문득 친구 생각 


    

  오전 아홉 시경 이층 컴퓨터 앞에 앉으면 동녘햇살이 눈을 찌른다. 숲의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창문을 향해 쏟아지는 빛줄기에 눈을 찡그린다. 돋보기를 쓰도 불편한 시력인데 너까지 나를 힘들게 하냐? 되받아 쏘아본다. 둥근 해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잔가지 사이에 둥글게 앉아 사방으로 무지갯빛을 쏘며 나를 응시한다. 나도 같이 응시하다가 자판을 보면 글자는 안 보이고 보랏빛과 흰빛의 무늬가 오묘하다. 실눈도 떠보고 작은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떠봐도 글자는 제멋대로 드러났다 숨었다 한다. 


 어릴 때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솔가리와 짚동을 가득 쟁여놓은 대나무 숲 옆의 공터였다. 가끔 황소가 말뚝에 매어 뱅뱅이 질을 하고, 느긋하게 누워 되새김질을 하던 너른 땅이었다. 솔가리 묶음 사이에 숨거나 짚동 사이에 숨었다가 술래가 잡으러 오면 요리조리 피해 뛰어다녔다.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혹여 이승 떠난 친구도 있지 않을까. 우리 동네는 작은 동네라 친구들도 많지 않았다. 한두 살 간격의 대여섯 명이 고작이었다. 내 동갑내기 친구는 한 명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도시로 유학을 떠났던 나는 고향과 멀어졌다. 동갑내기 친구도 잊고 살았다. 50년이 지난 어느 날 문자가 왔다. 중년의 남자 사진이 날아왔다. 나 기억하냐고. 아랫집에 살던 욱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엄마 택호를 물었다. 그제야 생각났다. 나를 참 예뻐했던 아주머니였다. 그 집에 놀러 가면 감자며 고구마를 삶아서 주곤 했다. 우리 집보다 가난한 과부댁 살림이었지만 음식솜씨가 좋았던 것 같다. 밥때가 되면 밥을 비벼서 욱이랑 같이 먹고 가라고도 했었다. 누야, 누야, 하면서 나를 따랐던 동생 생각도 났다. 동생도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단다. 


 언제 한 번 보자고 했지만 만나볼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찾았느냐고 묻자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했더니 나오더란다. ‘너는 유명인사더라. 어려서도 책벌레더니 여전하더라.’고 했다. 인터넷이 힘이 세구나. 인터넷 글밭을 누비면서 세상 보기를 한다는 것은 내 삶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사진을 뜯어봐도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사진 속 그는 낯선 남자였다. 추억을 줍다 보니 엊그제 일인 듯 어린 모색이 보였다. 


 어릴 적 삽화 한 장 열어본다. 누구에게나 지고는 못 살던 나는 그 애랑 칼싸움을 했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우기도 했었다. 내 뒷배가 든든했기 때문이다. 내가 울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그 애의 엄마를 불러 호되게 나무랐다. 내 귀한 손녀를 울린 녀석 고추를 까버리겠다고. 그 애는 나를 슬슬 피했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 엄연했지만 할머니도 엄마도 내게 바느질을 하라거나 길쌈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때는 동네 여자라면 모두 길쌈을 했고 홀치기라는 부업을 할 때였다. 아버지는 앙증맞게 작은 지게를 만들어 내 어깨에 걸쳐주셨고, 나무칼을 만들어 주셨다. 남자애들한테 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내 눈을 찌르던 햇살이 살짝 비껴간다. 자판의 글도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 손가락에 익숙해진 글자판이 고마워질 때다. 열려라 참깨, 천일야화에 나오는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손가락은 알아서 글자를 만들어 화면에 띄운다. 햇살도 못 이기는 척 나뭇가지사이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솟는다. 동장군이 며칠 째 웅크리고 앉았더니 기분이 풀렸나 보다. 동장군의 인품이 너그러워지길 기다려볼까. 새벽꿈이 길몽이었으니 좋은 소식이 오려나. 


 고향 마을에서 어릴 적 친구들 만나는 꿈을 꾸어서 그럴까. 그 친구도 자기 자리에서 오늘을 살겠지. 나처럼 머리카락 희끗희끗 늙어가겠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던 친구를 생각해 주는 아무개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도생이지만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주는 친구 한두 명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따뜻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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