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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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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Jan 07. 2024

보리와 나는 무언극을 하고

보리와 나는 무언극을 하고 


    

 “엄마, 아들 보고 싶어도 일주일만 참으세요.” 

 아들은 대청소를 해 놓고 떠났다. 열흘 만에 우리 부부만 남았다. 집이 텅 빈 것 같다. 아들이 벗어낸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딸이 떠났을 때는 아들이 있으니 허전함이 덜했지만 아들도 떠나니 허전함은 배가 된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하다. 마음부터 느슨해진다. 집안이 조용해지자 슬그머니 컴퓨터 앞에 앉는다. 쓰다만 소설을 뒤적여보지만 진도가 안 나간다. 주섬주섬 일상을 줍는다. 탕탕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린다. 부부만 남으면 각자 제 할 일에 몰입한다. 낯선 사람소리에 움츠렸던 새들도 살판이 났다. 덤불에는 오목눈이 떼가, 차밭에는 직바구리 떼가 활갯짓을 한다.


 길 건너 작은 못이 일렁인다. 수달이다. 한동안 안 보여 궁금했는데 아래 큰 못에 놀다가 작은 못에 올라온 모양이다. ‘큰 괴기 씨를 말리겠다. 잔챙이들만 오글오글 하겠네.’ 남매가 떠난 것을 동물도 아는 모양이다. 보리가 낑낑댄다. 수달을 보고 짖었던 것일까. 길 가는 사람도 없는데 짖어서 ‘너 자꾸 그러면 입에 재갈 물린다.’ 호통을 쳤었다. 개의 시력은 약하지만 코는 예민하다고 한다. 건너편 고사리 밭에 내려온 멧돼지나 고라니를 보고 짖는 줄 알았더니 못에서 노는 큰 수달 냄새에 짖었던 것일까. 말이 안 통하니 알 수가 없다. 침팬지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소통할 수 있었다던 제인 구달이 생각난다. 사람과 동물이 오래 함께 지내면 저절로 소통이 된다. 물론 내가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집 보리가 풀이 죽었다. 남매가 하루에 한 번씩 산책을 시켰었다. 산마루에 올라가 목사리를 풀어놓곤 했다. 보리는 자유가 주어지면 야생에 눈 뜬다. 냄새를 맡고 고라니나 너구리를 좇는다. 얼마 전, 저절로 끊어진 보리의 목사리 덕에 자유를 만끽했었다. 보리는 사냥한 너구리를 물고 왔다. 사랑방 앞에 갖다 둔 것을 농부가 거두어 묻어줬다. 개의 야성인데 혼쭐 낸다고 달라질까. 보리는 목사리를 풀어주면 산을 뛰어다니다가도 ‘보리야!’ 부르면 쏜살같이 달려와 주는 충견이다. 보리도 딸과 아들이 떠난 것을 아는 모양이다. 아들의 승용차가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말은 못 하지만 눈에 그리움이 가득 고여 있다. 밤이 되면 늑대울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보리야, 우리 운동 갔다 올게. 집 잘 지켜.”

 집을 나서며 당부한다. 보리는 심통 난 듯 꼬리도 흔들지 않는다. 어떤 때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못 본 척한다. ‘너만 두고 나간다고 삐졌어? 다녀올게.’ 그러면서 손을 흔들면 슬그머니 일어나 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방방 뛴다. 꼬리가 아프도록 흔들면서 반긴다. 개도 외로움을 탄다. 우리가 나가면 집이 빈다는 것을 안다. 개도 식구다. 비록 집안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우지는 않아도 주인이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말귀도 잘 알아듣는다. 보리가 50일 된 강아지로 우리 집에 온 지도 예닐곱 해가 됐다. 사람으로 치면 사십 대쯤 됐을까. 


 “보리야, 별일 없었지?”

 운동을 갔다 오면 보리에게 먼저 말을 건다. 보리의 눈빛에 깃든 반가움 덕에 일상은 또 조용히 흐른다. 보리와 나는 무언극을 하고 농부와 나도 무언극을 한다. 어떤 작가의 짧은 소설이 떠오른다. 남편을 하늘로 보낸 작가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소설로 푼 것 같다. 부부가 오래 같이 살면 열정보다 편안함이고 정이다. 부부는 서로 무언극을 하면서 서로 울타리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옆에 없으면 허전하고 옆에 있으면 안전하거나 불편한 무엇, 무덤덤함도 편안함이다. 무언극을 해도 부부사이는 타인이 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보리와 우리처럼 우리 부부도 무언극을 하며 하루를 산다. 


 아들이 제 자리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다. 또 하루를 살았다.

                     202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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