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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10. 2024

영화 『파묘』를 보고

영화 『파묘』를 보고     



  명당이란 뭔가. 명당이란 풍수지리에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좋은 터를 말한다. 옛날에는 집터를 찾을 때도 묏자리를 찾을 때도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을 불렀다. 아파트가 즐비해진 지금은 풍수지리에 맞춰 집을 짓는 건설업자도 드물다고 본다. 중장비로 산 하나를 깎아 평지로 만드는 일이 쉬워졌기에 경치 좋은 곳이면 어디든 집을 짓는다. 사람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수목장이니 납골당이니 하던 것도 사라지는 추세다. 시신을 화장해서 유골가루를 바람 태워버리는 일이 흔해졌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땅에 묻었다. 선산에 모실 때도 지관을 불렀다. 산자의 바람은 좋은 묏자리를 찾아 돌아가신 조상을 잘 모시는 일이다. 좋은 묏자리 즉 명당을 찾는 일은 후손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서다. 바로 운이 틔어서 복을 받는다는 발복에 대한 간절함이 깃든 행위가 아닐까. 명당을 찾는 일은 지관 몫이었다. 한두 해 사이 시부모님을 북망산으로 모셨다. 두 분의 생전 바람대로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선산에 모셨다. 묏자리도 살아계실 때 잡아둔 자리였다. 시부모님의 혼령은 좋아하실까. 


 영화『파묘』는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말한다. 파묘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집안에 문제가 생기거나 후손들에게 나쁜 일이 자꾸 생길 때면 무속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 중 하나다. 유명한 점술가를 찾아간다던가. 이름난 지관을 찾는다. 죽은 조상이 저승에서 힘들어하기 때문에 이승에 남은 후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길일을 택해 파묘를 했고 시신의 남은 뼈를 잘 추슬러 화장을 하거나 좋은 명당 터를 찾아 이장도 했지만 조상의 음택을 산자가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파묘』는 읍내 도깨비영화관에서도 상영했다. 마침 딸도 왔기에 영화를 보러 갔다. 무속 신앙은 한국인의 정서에 깃들어 있다고 본다. 주인공 화림 역의 김고은보다 지관 김상덕으로 분한 최민식의 연기는 실감 났다. 지관 역에 딱 어울렸다. 장의사 고영근 역의 유해진 역시 약방의 감초 역할을 제대로 했다. 영화의 도입부는 몰입이었다. 그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 그럴까. 영화는 처음부터 복선이 여러 개 깔렸다는 것을 암시했다. 


 영화 『파묘』의 1장 음양오행, 2장 이름 없는 묘, 3장 혼령, 4장 동티부터 뭔가 심상찮게 흘러갔다. 첩장이었다. 시신을 안치한 위에 또 다른 시신이 얹어 만들어진 묘라는 뜻이다. 5장 도깨비불부터 일본의 귀신 다이묘의 정령이 출현한다. 6장 쇠말뚝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백두대간에 박은 쇠말뚝이 등장한다. 그것을 파 낸 도굴꾼은 독립투사들이었다. 그때부터 영화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된다. 쇠말뚝은 주술에 걸린 일본의 요괴 오니의 관이었다. 그 위에 부와 권력을 누리던 친일 반역자 고관대작의 시신을 묻게 한 것은 일본인 음양사의 짓이었다. 쇠말뚝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지관은 한반도를 대륙을 움켜쥐고 있는 호랑이로 보는데 오니를 가둔 쇠말뚝이 박힌 곳이 범의 척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비석에 적힌 숫자는 위도와 경도를 나타낸다고 했다. 


 영화에서 기억나는 대사가 몇 개 있다. 

 화림: ‘뭐가 나왔다고 거기서? 존나 험한 게.....’

 지용: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상덕: ‘불과 물은 상극이다. 쇠의 상극은 나무다. 그러니까 불타는 칼의 상극은 물에 젖은 나무다.’ 


 결국 지관 상덕은 쇠말뚝으로 박혔던 다이묘의 정령 오니를 소멸시킨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친일파의 혼령은 왜 자신의 후손을 모두 데려가려 했을까. 친일을 한 탓에 일본인 음양사로부터 악지 중의 악지에 묻혀 춥고 배고팠던 혼령은 자신을 그 저주에서 풀어주지 않은 후손에게 분노했던 것일까.『파묘』덕에 혼령의 저주를 벗고 증손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그 집안으로서는 다행이라 해야 할까. 영화의 마지막을 보며 나는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 해학적이라 해야 할까. 시대의 변천에 따른 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굿을 하던 무당 화림은 오니의 환영을 보고 놀라고, 장의사 영근은 개신교 장례식에서 혼령이 흐느껴 우는 소리에 당황하고, 지관 상덕은 아파트 건물 방향을 잘못 잡은 건설업자에게 화를 내다 수술자국이 터져 피가 나온다. 감독은 무엇을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을까.


 한국영화 『파묘』는 외국 SF 영화 『듄 파트 2』 보다 몰입도가 높았고 재미있었다. 어쨌든 영화는 직접 보고 느끼고 평해야 한다. 『건국신화』는 아직 못 봤지만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파묘』가 훨씬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아닐까.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며 핍박받았던 독립운동가 후손이 봤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나는 쇠말뚝의 진실 공방을 떠나서 현재의 한국 정치판을 보면서 느끼는 괴리감을 어떻게 아우라야 할지 모르겠다.  

            20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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