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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Mar 12. 2024

나도 춤을 추고 싶다.

나도 춤을 추고 싶다.    

 

 소설가는 누군가. 타인의 삶을 엿보는 이야기 수집 꾼이고 수집한 이야기를 뭉뚱그려 하나의 삶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인생을 짜는 직조공이다. 소설가는 간접 경험이든 직접경험이든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삶을 이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기 론 그렇다. 수많은 소설을 읽고 습득해도 나만의 것을 찾거나 짓지 못하면 독자의 자리에 머물 따름이다. 


 무라까미 하루끼의 『반딧불이』 단편집을 읽다가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가에 꽂혔다. 나도 소설가지만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따름이다. 현실과 가상이 뒤얽힌 단편들이지만 우선 읽는 재미가 있다. 『반딧불이』에 실린 단편은 어느 작품이든 질서 정연하기보다 엇박자를 내고 황당무계한데 묘하게 여운을 남긴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타고난 재주 아닐까. 어떤 주제나 소재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도 작가의 필력이다. 문장이 예리한 작가도 있고, 미사여구가 뛰어난 작가도 있다. 평범한 이야기도 평범하지 않게 쓸 수 있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나는 아직도 글잘 쓰는 작가에 대해 시샘이 난다. 나는 왜 저렇게 못 쓰는가. 절망하기도 한다. 충분히 잘 쓸 것 같은데 평범한 문장 밖에 만들 수 없어 화가 날 때도 있다. 내 글쓰기에 모자라는 부분이 뭔가에 골몰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온종일 우울하고 의기소침하다. 젊어서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글이 쓰고 싶은데. 글을 쓰고 싶다. 마음의 갈증만 길렀다면 늙어서는 느슨해진 만큼 언어유희의 맛이 밍밍해져 버렸다. 내가 쓰는 문장 자체만으로도 신선하게 빛날 때가 있긴 했을까. 예전에 썼던 글을 보면 내가 저런 글도 썼던가. 싶을 때가 있다. 


 인생에 대해, 글에 대해, 열정이 사라져서 그런가. 세상 다 산 것 같을 때, 뭐든 다 알 것 같아진 마음 탓은 아닐까. 새로운 것이 없어져버린, 인생이 뭔지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마음이 될 때가 있다. 분노도 호기심도 사랑도 맹물 같아진 것을 느낄 때면 ‘삶은 다 그런 거야.’ 치부해 버린 탓은 아닐까. 모나고 깊고 둥글고 제멋대로였던 감정의 기복조차 평지가 되어버린 느낌일 때 나는 내가 살아온 날에 대한 회의에 빠진다. 잘 살아온 것 같지 않을 때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을 한다. 


 내가 힘들다고 했을 때 아들은 ‘엄니, 업입니다.’ 했다. 그 말이 참 가슴을 때렸다. 그렇구나. 내 업이구나. 내 팔자구나. 지극히 평범한 여자로 살아왔구나. 소설가라면 뭔가 다른 사람과 달라야 마땅한데 나는 지극히 평범한 며느리였고, 아내였고, 엄마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왤까. 타고난 재주라서 그럴까. 글 한 줄 안 쓰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보통사람인데. 나는 보통사람도 못 되는가. 지혜롭게 살고 싶어 하면서 어떻게 해야 내가 지혜로워지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남매의 말처럼 ‘우리는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문제는 엄니에게 있습니다. 엄니 마음인데 엄니가 스스로 다스려야지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엄니, 그것이 업입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간섭도 자식을 망치는 일이다. ‘저거들이 알아서 한다. 당신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남편은 내 탓을 하고 나는 자식들 인생에 무관심한 이기주의자라고 남편을 꼰대 영감이라 지칭한다. 내 자식인데, 돈 걱정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왜 내 탓으로 돌려야 하느냐고 반박해 봐도 정답은 없다. 나만 힘들어질 뿐이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일이다. 이 글로 생활비를 벌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또래에 직장 생활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내가 이래 편하게 살아도 되나?’ 위기감을 느낀다. 모아둔 재산도 없다. 남매가 결혼도 안 했다. 마음 같아서는 시니어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이 나이에 사람들과 어울려 시시덕거릴 자신도 없고 내가 내 몸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돈 벌 궁리를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 같다. ‘엄니는 글이나 쓰소. 엄니는 잘 살고 있소.’ 아이들이 우스개를 던진다. ‘잘 살고 있나?’ 반문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인데 돈 되는 글쓰기는 없나? 글쓰기를 돈벌이로 사용하면 문학의 추락인가.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금상첨화 아닌가.’ 다 같잖은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유명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나랑 무엇이 다른가. 생각할 때가 많다. 나도 이 정도 작품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무명작가로 묻혀 있나. 내 글에서 무엇이 모자라는 거지? 자책도 해 보고 질투도 해 본다. 글만 잘 쓰면 누군가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나는 순진한가. 바본가. 무라까미 하루끼의 『반딧불이』마지막 장을 덮었다. 나는 글 춤을 추고 싶다. 몸으로 추는 춤이 아니라 글로 추는 춤꾼이고 싶다. 내 글의 무아지경에 빠져 독자의 넋을 빼앗을 수 있으면 좋겠다. 꿈 깨셔. 슬프다.

             20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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